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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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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월드컵이 지루한가

등록 2006-07-01 00:00 수정 2020-05-03 04:24

세계 축구의 평준화 현상으로 이변 대신 ‘안전한’ 경기들만을 보여줘… 고전 ‘공돌리기’ 전략은 이해하지만 이젠 아름답게 이기는 플레이를

▣ 독일 프랑크푸르트·라이프치히=정윤수 스포츠 평론가

2006 독일월드컵 조별 리그 G조 한국과 토고의 첫 경기. 전반전의 기이한 몸놀림으로 0-1로 끌려가던 한국팀이 후반전에 이천수와 안정환의 연속 골에 힘입어 2-1로 앞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경기 종료 3분여를 남기고 토고 문전 앞에서 프리킥 찬스를 맞이한 한국팀의 키커 이천수가 갑자기 공을 뒤로 돌렸다. 그러고는 여지 없이 백 패스가 이어졌다. 프랑크푸르트 현지의 경기장 안에서는 일순간 야유가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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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이 퇴장을 당해 10명으로 끌려가고 있는 ‘약체’ 토고를 성원하기 위한 야유이기도 했지만, 그 야유가 한국팀 응원단 쪽에서도 꽤 상당한 질량으로 울려퍼졌음을 상기할 때 그것은 단순한 인지상정이 아니라 ‘왜 프리킥을 제대로 차지 않는가?’ 하는 비난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이 궁금해진 나는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게 됐다.

새로운 패러다임 안 보여

지금 세계 축구는 안전한 길을 가고 있다. 모험을 하는 감독을 찾아보기 어렵고 경악스런 동작으로 모든 사람들의 상식을 깨는 선수를 보기란 더욱 어렵다. 오늘날 공을 차는 사람들의 모든 정열과 방식과 시스템이 한자리에 모인 2006 독일월드컵의 현장 곳곳에서는 지난 수차례의 대회에서 경이롭게 등장했던 ‘이변’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가나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한국팀의 선전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이 세 팀의 경기도 지난 대회에서 나이지리아, 크로아티아, 세네갈, 카메룬 등이 보여준 폭풍 같은 전율의 행진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고진감래. 거친 경기 속에서 어렵게 16강의 희미한 빛을 찾아낸 힘겨운 승전보였다.

강호들은 건재했다. 그런데 그저 건재할 뿐이었다. 막판의 집중력이 잉글랜드, 독일, 스페인, 아르헨티나를 살렸다. 그들은 조별 리그의 상대 팀들과 힘이 서로 맞부딪치는 완력 싸움을 벌이다가 후반 10분을 남겨두고 어김없이 골을 넣어 16강에 안착했다. 이 지구에서 유일하게 단 한 사람의 ‘안티 팬’도 갖고 있지 않은 아름다운 예술가들의 집단인 브라질 선수들만이 ‘4-2-2-2’라는, 오로지 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포메이션으로 능수능란한 축구의 경지를 보여준 것이 그나마 흥미로운 조별 리그의 한 대목이었다고 할까. 지금의 세계 축구는 안전한 방향으로 힘겹게 운전하는 다소 지루한 양상이 거듭되고 있다.

요컨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선수와 팀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잠시 지난 20세기의 축구사를 돌아보자. 축구가 지나치게 거친 육박전에 머물러 있을 때 브라질의 펠레는 동료 선수들과 함께 포지션 플레이와 패스의 합리성을 1960년대에 증명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리뉘스 미헬스 감독과 요한 크라위프가 공격수와 수비수의 간격을 30m 안팎으로 좁힌 ‘토털 사커’로 중원을 선점하는 것이 90분을 장악하는 것임을 증명했다. 이웃 나라에서는 베켄바우어와 마테우스가 실천한 스위퍼 시스템이 고안돼 축구사의 또 한 페이지를 두툼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불멸의 기억은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다. 그는 지난 100여 년의 축구사를 통틀어 축구의 모든 요소를 분해하면 결국 신묘한 개인기가 남는다는 것을 예술적으로 실천한 유일무이한 선수다. 그리고 지단의 시대가 열렸다. 무조건 골문을 향해 일방통행으로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한 것이 강한 것을 어김없이 제압한다는 명제 속에서 지단은 상대방의 혈맥을 꽉 잡고 경기 전체의 흐름을 리드미컬하게 주름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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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난 세기의 축구가 일정한 패러다임의 변화로 흘러왔건만 최근 몇 년 사이, 그리고 독일 현지의 이번 여름에서도 폭풍우와 같은 경악스런 팀과 선수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피구의 포르투갈, 라울의 스페인, 토티의 이탈리아, 리켈메의 아르헨티나, 베컴의 잉글랜드, 발라크의 독일, 라르손의 스웨덴 등이 안전하게 16강으로 올라갔지만 좌우 측면으로 깊숙이 침투해 크로스를 올리고 이를 서너 명이 달려들어 헤딩 경합을 벌이는 단조로운 흐름이 지배적이다.

유럽 감독들 지휘하며 전술도 보편화

왜 이럴까. 나는 방금 언급한 대로 ‘세계 축구의 평준화’ 현상이 특수한 경향성 대신 보편적인 대세로 몰려가는 흐름으로 일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세계 축구는 모든 인프라와 기술과 감독과 선수에 대한 정보가 막힘 없이 흐르고 있는 양상이다. 어느 지역의 2부 리그 클럽 선수도 유럽 명문 구단의 리스트에 올라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유럽의 빅 리그에서 뛰는 대부분의 선수들은 월드컵에 진출한 자국의 대표팀 선수들이다. 설령 경기장에서 처음 만날 수는 있어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선수를 만나 어리둥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에서 명함깨나 통하는 명장들이 전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지휘봉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한국의 아드보카트, 오스트레일리아의 히딩크, 코트디부아르의 앙리 미셸 등 네덜란드 감독이 꽤 많은 수를 차지하는데, 굳이 대표팀 감독이 아니더라도 세계 곳곳의 클럽 대표팀 감독은 유럽과 남미의 뛰어난 지도자들이 맡고 있다.

이들은 서로 비슷한 경험과 기술과 지도력을 갖고 있어서 뚜렷하게 대별되고 전술의 흐름을 일관되게 유지하기보다는 서로의 장점을 끊임없이 벤치마킹하는 ‘축구 전술의 보편화’를 추구하고 있어 지난 몇 년 동안 사실상 세계 축구는 기술의 상향 평준화뿐만 아니라 스타일의 일정한 양식화도 두드러지게 일어나고 있다. 물론 과감히 선수 교체를 한다거나 기발한 착상으로 포메이션을 변화시키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양상에서 보면 지금 세계 축구는 선수와 감독 모두가 비슷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측불허의 신묘한 기술과 전략’을 구사하려는 모험가 대신 서로의 정보와 기술을 훤히 아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선취 득점을 하고 이후에는 그렇게 얻은 점수를 결사적으로 지키는 ‘안전한’ 축구가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지금까지의 경기로 보건대, 이번 월드컵은 조금은 지루한 육박전이 우세한 양상이다. 체력전을 방불케 하는 요소는 있어도 전통의 유럽 강호들이 신묘한 탄력과 기술을 가진 다른 지역 팀들의 ‘이변’을 봉쇄했다.

다시 한국의 토고전으로 돌아가보자. 물론 이천수 선수가 프리킥을 뒤로 돌린 것은 아주 순간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야유를 받을 만하다. 한편에서는 조별 리그의 특성상 승점 3점을 빨리 확보하는 것이 프랑스와 스위스를 만났을 때 효과적이라는 옹호도 있을 수 있다.

현대 축구의 새 페이지를 구상하자

‘안전한’ 축구를 하려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자면 이런 판단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전한 축구는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요소들을 집어삼킬 우려가 있다. 물론 신묘한 방식으로 패배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안전하게 이기기보다는 아름답게 이기자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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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얘기다. 전통의 강호들도 조별 리그에서는 그런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으니, 한국팀의 젊은 선수들에게 무리한 부탁일 수는 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비단 이천수 선수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스타들 역시 ‘안전한’ 플레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라는 점이다. 이제 곧 16강 이후의 토너먼트가 펼쳐진다. 단 한 번의 경기로 호텔 체크인 시간이 달라진다. ‘안전하게’ 공을 차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박빙의 순간들이 다가온다. 세계적인 스타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한국 선수들도 ‘아름답게 이기는’ 뛰어나고 경이로운 경기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이로써 현대 축구의 새로운 페이지를 다 함께 구상해보는 것이다.



한국 축구, 이건 아니잖아~

개혁의 필요성을 보여준 프랑스전, 결과주의 함정에 사로잡혔다

▣ 프랑크푸르트·라이프치히=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15-5.
2006 독일월드컵, 한국의 프랑스전 1-1의 스코어만큼 오랫동안 기억돼야 할 것은 슈팅 수다. 그나마 한국의 5개의 슈팅 중 2개만이 골문 안으로 향하는 유효 슈팅이었다. 2개의 유효 슈팅으로 1골을 넣는 경제적인 축구를 했다고 자축할 일일까(프랑스는 15개 가운데 4개만 골문 안쪽을 향했다). 아무리 축구는 골로 말한다고 해도, 다음을 생각한다면 과정도 돌아볼 일이다.
2006년의 대표팀이 2002년의 대표팀보다 발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2002년 한국팀의 장기였던 ‘압박’은 허술해졌고, 빠른 역습의 날카로움도 무뎌졌다. 박지성의 빛나는 원맨쇼와 체력을 앞세운 후반 공격으로 승부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경기운이 받쳐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과연 토고전에서 심판이 레드카드를 빼들지 않았다면, 프랑스전에서 비에라의 골이 인정됐다면 한국이 현재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솔직히 토고전과 프랑스전을 경기장에서 지켜보면서 한국 축구의 현주소에 착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경기 전반, 한국의 최고 찬스이자 프랑스의 최대 위기는 하마터면 자살골로 이어질 뻔한 갈라스의 백헤딩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45분 내내 위협적인 공격은커녕 변변한 패스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정말로 프랑스 선수들과 ‘클래스’가 달랐다. 한국 선수들이 공을 낯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프랑스 선수들은 공을 기꺼이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팀 최후의 ‘비기’인 박지성의 쓰러지기 전법마저 통하지 않았다. 박지성은 아비달의 긴 다리에 자신에게 오는 볼을 번번이 빼앗기자, 나중에는 패스가 와도 뒤의 아비달에게 신경 쓰느라 볼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 프랑스 선수들이 한꺼번에 경기장을 누비면서 폭풍처럼 몰아쳤다면, 한국 선수들은 4-3-3 대형으로 나란히 서서 기압대처럼 정지해 있었다. 가뭄에 콩 나듯 이어진 한국의 돌파는 프랑스의 최종 수비수까지 가기 전에 수비의 일선에서 저지당했다. 한국이 이번 월드컵에서 어려움을 겪고 축구계의 개혁이 이뤄져야 다음에는 기대를 해볼 수 있다는 어느 축구인의 말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자 주변의 관중석에 우울이 전염되기 시작했다. 전반 10분이 지나자 오른쪽의 청년이 응원을 포기하고 턱을 괸 채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나자 왼쪽의 아저씨가 “그건 아니지”라고 통탄했다. 후반 20분이 넘어서자, 경기 내내 끊임없이 한국 선수 이름을 목놓아 외치던 뒷자리의 언니도 마침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공격이 끊기면 “도대체 안정환은 왜 안 넣는 거야”, 수비가 뚫리면 “또 김XX야”. 옆의 아저씨는 후반에 이르자 울음 섞인 목소리로 “지려고 왔는갑다”라고 통탄했다. 오른쪽의 청년은 여전히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후반에도 ‘뻥 축구’는 이어졌다. 도통 패스는 안 되고 수문장이 프랑스 진영으로 공을 뻥 차기 일쑤여서, 오죽하면 이운재가 어시스트해서 골을 넣자는 전략인가 했다. 그나마 패스가 연결돼도 문전으로 공을 띄우기에 급급해서 도대체 한국팀은 조재진 머리 맞히기만 연습했나 싶었다. 후반 교체도 약발이 받지 않았다. 후반전에만 설기현의 역주행이 도대체 몇m일까 곰곰이 헤아려보았다. 반면 프랑스의 교체선수 리베리는 한국의 오른쪽을 산산이 돌파해버렸다. 70분이 넘도록 한국은 변변한 슈팅 하나 날리지 못했다. 그리고 79분 박지성이 기적적인 동점골에 성공했다.
그리고 열광의 도가니가 시작됐다. 옆의 아저씨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면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옆자리 청년의 우울증도 씻은 듯이 사라졌고, 뒷자리 아가씨의 짜증도 말끔히 지워졌다. 물론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동점골에 기뻐하는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도통 그들의 감동에 동감이 가질 않았다. 80분을 헤매던 팀의 동점골 하나에 흥분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한마음으로 기뻐하는 한국 응원단을 보면서, 이토록 우리 안의 결과주의는 뿌리 깊구나 생각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떻게 돼도 괜찮다는 성과주의는 여전히 축구의 흥분 안에도 남아 있었다. 경기장에서 돌아와 인터넷을 뒤져도 과정의 문제를 고민하는 글은 찾기 힘들었다. 경기 전에는 프랑스 관중이 두려웠는데, 경기가 끝나고 나서는 한국 관중이 무서워졌다. 정말 반성하지 않으면, 정녕 발전하기 힘들다. 경기장 전광판에 남겨진 ‘Shoot 15 vs 2’(실제로는 15-5)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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