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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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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나나에게 전권 주면 내려온다”

등록 2006-06-15 00:00 수정 2020-05-03 04:24

요즘 동티모르를 엉망으로 만든 반란군 지도자 아프레도 레이나도 소령 인터뷰…“마리 총리와 정부군은 범죄자… 서부출신 차별에 맞서 군대 지키려 했을 뿐”

▣ 모비세(Maubisse)=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멀미 기운이 돌았다. 가파른 골짜기 사이로 끝없이 굽이도는 도로를 따라 거북한 속을 가까스로 추슬러 3시간 만에 오른 ‘반란군’ 요새는 뜻밖에 별천지였다.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꽃밭에 둘러싸인 보자라(포르투갈식 별장)를 누가 ‘반란’이라 불렀던가?”

어디에도 ‘반란’ 냄새는 나지 않는다. ‘반란군’ 무장들 눈빛에선 장난기가 돌았고. 그 아래 보자라 들머리는 또 어떤가?

정신없이 발가락을 후벼파는 이, 반쯤 드러누워 낄낄대는 이, 웃통 벗어젖힌 이, 그리고 예닐곱의 낯선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군! 직업 탓에 20년 가까이 각종 반란과 친분을 맺어왔지만, 세상에 이런 ‘반란’은 처음 본다.

어쨌든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긴 건장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첫 인사로 대뜸 “넌 누구냐?”고 묻는, 좋게 보면 자신감 넘치고 달리 보면 좀 시건방진 사나이가 바로 요즘 동티모르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주인공 알프레도 소령이었다. 일찌감치 결론이 났다. 내가 아니면 그 사나이인지, 아무튼 싸구려 할리우드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건 틀림없다.

외국군이라도 친구는 괜찮다

기분 괜찮나? 죄책감은 들지 않나? 내 땅에 외국 군인들이 득실거리는데,

= (부하에게 커피를 시키다 말고 흥분해서) 무슨 말이냐? 여기 온 외국군이 적도 아니고, 또 적을 데리고 온 것도 아닌데. 우릴 돕겠다고 온 이들인데!

동티모르는 외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25년 동안 전쟁을 했고, 그래서 얻은 독립이다. 당신도 그 전쟁에 참여했다. 근데, 이게 뭐냐? 또 외국군이다.

= 외국군도 친구면 괜찮다. 미군이 주둔해 있는 한국에선 모두가 죄의식을 지녔겠네?

물론이다. 상식적인 한국인들은 부끄러워하면서 미군에 반대해왔다. 지금도 싸우고 있다. 이런 건, ‘친구’ ‘안 친구’ 문제가 아니다.

= (커피가 나오자 상냥해지면서) 설탕 좀 넣지, 동티모르 커피는 아주 쓰니까.

동티모르 커피는 쓴맛에 마신다. 그보다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제 정부군과 인연을 끊은 건가?

= (핏대를 올리며) 난 군대를 떠나지 않았다. 군대를 사랑한다.

군인이 명령을 거부하고 무기 들고 뛰어나온 건 불법이다. 이미 군대는 떠났다는 말이다.

= 그 명령이 옳고 합법적인 경우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 군인은 국가를 보호하는 조직이다. 명령권자 개인의 이권을 좇는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

뭐가 불법적인 명령이었나?

= 4월28일을 봐라. (정부군이 불만을 품고 이탈한 군인들을 공격해서 사상자를 낸 사건) 그건 학살이다. 총리를 따르는 군 지휘관들이 내린 그런 불법 명령을 따라야 하나?

옳다. 그것도 불법이고 군대를 몰고 떠난 당신도 불법이다. 아무튼, 병영을 떠나기 전에 무슨 계획을 세웠나? 지금 같은 상황을 예상했나?

=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예상도 못했다. 군대를 지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무슨 말인가? 무장병력을 이끌고 병영에서 뛰쳐나오면서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니?

= 4월28일 사건을 통해 우연히 벌어진 일일 뿐이다. 군대를 지키려면 그 길뿐이었다.

군대를 지키겠다는 건 의지고, 병영을 이탈한 건 행동이잖아. 군인이 행동할 때는 작전계획 같은 게 있단 말이지.

= (목청이 높아진다) 군대를 잘못 이용하는 걸 거부했다. 정의를 바로 세우자는 거였다.

상식적으로 말해보자. 당신은 어쨌든 반란군 지도자고, 그 지도자에게는 계획이 있단 말이다.

= 만약 계획이 있었다면 나는 무슨 일을 저질렀을 것이고, 또 누군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일’과 ‘누군가’란 말은 당신의 반란군이 쿠데타로 정부를 엎을 수도 있었다는 뜻인가?

= 맞다. 근데, 그 ‘반란군’(rebel)이란 표현은 쓰지 마라. 언론이 사태를 호도하는 거다.

반란을 반란이라 부르지 않으면? 적합한 용어를 말해봐라.

= 내가 여기로 온 건 군대의 존엄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다. 반란이라 부르는 건 마리(마리 알카티리 총리) 쪽에서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넣으려는 수작이다. 내가 곧 군대다.

그러면 당신은 딜리에 남아 있는 반대쪽 정부군을 뭐라 부르는가?

= 범죄자!

혁명군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았어야

군대를 이탈한 자들이 스스로 군대라 부르며 군 조직 자체를 범죄자라 부를 수 있나?

= (또 핏대를 올리며)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하나. 군대 전체가 범죄자란 게 아니다.

흥분할 거 없다. 당신이 방금 “내가 곧 군대다. 반대쪽은 범죄자다”고 말했잖아.

= 당신 내게 불만을 가진 모양인데, 불만은 군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반대쪽에 터뜨려라. 내가 마리를 범죄자라고 했지, 군대 전체를 그렇게 부른 건 아니다.

속말 좀 들어보자. 정부를 뒤엎겠다는 것도 아니라면서 왜 군대를 이탈했나?

= 동부 출신들이 모든 걸 싹쓸이하면서 서부 출신을 차별했다. 독립투쟁 때부터 전통이 그랬다.

그야 서부가 인도네시아에 가까우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주축들이 동부였으니.

= 아니다. 이건 근본 문제다. 무장투쟁 조직인 동티모르민족해방군(Falintil)이 독립 뒤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이란 이름으로 거짓 선거를 통해 정부를 장악하고부터 문제가 생겨났다.

동티모르민족해방군은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의 무장투쟁 조직이었으니, 정치조직인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이 혁명 뒤에 정부를 담당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샤나나도 그 출신이고, 모두가.

= 혁명군이 정치를 맡아서 제대로 한 경우가 역사에 없다. 혁명군은 혁명을 위한 조직이니 정치에 개입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럼 누가 정치를 해야 하나? 독립을 반대했던 이들이 해야 하나? 비현실적인 말이다.

= 문제는 그들(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이 모든 요직을 독점하면서 서부를 차별했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 보직과 임금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부분에서 그랬다.

그래서 병영을 이탈했다면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사태를 풀어야 할 텐데, 해결책은 뭔가?

= 마리 총리와 그 주변 범죄자들이 모두 물러나기 전에는 해결책이 없다.

그건 당신이 샤나나 대통령을 지원한다는 뜻인가?

= 샤나나가 아니다. 지금 상황을 풀 수 있는 헌법적 권능을 지닌 대통령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게 그 말이 아닌가?

= 개인적으로 샤나나를 추종하는 게 아니라, 나라의 지도자로서 샤나나를 따른다는 말이다.

마리만 물러나면 하산하겠는가?

= 아니다. 그냥 내려가지는 않는다. 안전이 보장돼야 한다. 그 다음은 샤나나가 정부를 해산해야 한다. 샤나나에게 자주적인 전권을 줘야 한다. 이건 샤나나가 마음만 먹으면 쉬운 일이다.

군인이 너무 정치적인 거 아닌가? 정부를 무력으로 뒤엎겠다는 것과 다를 게 뭔가?

= 그게 유일한 해결책이다. 시민들이 바라는 바다.

헷갈리는 건 당신이야!

그러면 샤나나의 명령은 따르겠다는 뜻인가? 이탈 전에 샤나나 쪽과 의사소통이 있었나?

= 샤나나 명령도 옳은 것만 따른다. 만약 사람을 죽이라면 그것은 거부한다. 샤나나에게 전해도 좋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령관 믹 준장과 만났나? 서로 친밀한 교감이 있는 듯하던데?

= 아니. 교감은 무슨… 그냥 그쪽에 좋은 친구들이 있는 거지.

왜 안 만났나? 여기까지 오스트레일리아군이 들어와 있는 판에. 뭔가 일도 있을 거고.

= 왜 꼭 만나야 하나? 못 만날 것도 없지만, 만날 계획도 없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나?

= 우릴 돕기도 하고 수색도 다니고…. 그들이 있어서 좋은 게 많다.

당신을 따라나선 반란군 수는 얼마고, 무기는 어디에 숨겼나?

= 수는 나도 모른다. 무기는 100% 무기고에 있다. 내게 리스트도 있다. 안전하다.

여기 군인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뭔가?

= 이건 내 무기다.

내 무기라니? 무기는 군대 소속이다.

= 여긴 군대다. 군인인 나는 당연히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뭐가 문젠가?

군대와 당신 개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당신은 군대를 벗어난 반란자다.

= (고함을 지르며) 헷갈리는 건 당신이다! 난 국가를 위해 복무 중인 군인이다. (전화가 울린다)

그렇게 판을 접었다. 그는 정원으로 따라나서면서 “한국군에 좋은 친구들이 많다” “비무장지대도 환상적이더라” 등 별 상관도 없는 시답잖은 한국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외국군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처럼 동티모르 군인들끼리도 사고치지 말고 잘 지내라.”

하늘엔 먹구름이 떠 있고, 산은 지겹도록 이어졌고, 돌아갈 길은 아득하기만 한데, 알프레도 말이 뒷골을 때린다. “서로 마음 다른 군인들이 총 들고 한 병영에서 잘 지낼 수 있겠는가?” 그렇게, 대책 없는 정치군인들은 신생 공화국에도 어김없이 태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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