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의이혼 뒤 홀로 아이 키우는 엄마의 일기로 본 ‘양육의 매너’
여전히 책임감없는 아이 아빠에게 ‘면접 규칙’이라도 던져줘야겠다
▣ 김은하/ 이혼 4년차 엄마
아이 아빠는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토요일 밤 서울 시내는 텅 비어 있었다. 기온이 떨어져 전철역에서 약속 장소로 택시를 잡아탔다. 아빠를 만난다는 흥분(혹은 못 만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좋아하는 불고기 반찬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아이는 연방 “아빠 언제 와?” 하고 묻는다. 전화해봤자 뻔하다. 일이 늦어져서, 길이 밀려서, 급한 일이 생겼는데 데려다주면 안 되겠냐…. 그래도 예전처럼 아이를 안 만나려는 것보다는 낫다. 약간 초조해진다. 또 못 온다고 하면 어떡하나. 몇 달 전 아빠에게서 한 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자 아이가 앓아누웠던 일이 악몽처럼 떠오른다.
‘이혼’ 후회 안해도 과정은 후회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아 이혼을 결심했을 때 수중에는 땡전 한 푼 없었다. 학교 마치고 직장생활을 좀 했지만 결혼하고 바로 아이가 생기며 ‘눌러앉은’ 터였다. 아이 아빠가 진 카드빚을 갚으려 전세를 줄이다 그것마저 다 털어먹은 뒤 월세로 살 때였다. 재산은 어차피 없으니 신경 안 썼고, 위자료도 포기했다. 위자료 문제로 시간을 끌까봐 두려웠다. 친권은 물론 양육권도 지레 포기했다. 재판을 해도 경제력이 없는 내게 유리할 것 같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혼 3년 뒤인 올 초부터 아이를 맡아 기르고 있지만, 이혼할 때에는 내가 양육권이나 면접교섭권을 가질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나는 자포자기 심정이었고 자존감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혼하고 1년 반 동안 아이는 시가에 맡겨져 있었는데 어른들이 아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전화 통화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울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울었다.
이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이혼 과정에는 후회가 많다. 난 너무 늦게 이혼했고, 너무 빨리 이혼했다. 남편의 씀씀이가 헤픈 것까지는 견뎠지만 딴살림 차리고 나에게 들켜놓고도 “그 사람이 (우리가) 이혼하길 원해”라고 남 얘기하듯 하는 것을 보고서는 정말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도장 찍기 전후 몇 달 동안 아이는 기름 강아지처럼 친정과 시가를 오락가락했다. 이혼을 말리는 양가 어른들에게 아이는 일종의 ‘볼모’였다. 나는 집을 나와 의식적으로 아이를 보지 않았다. “애 생각해서 참아야지” 하는 어른들 얘기도 끔찍했고, “니가 설마 이혼하겠냐”는 표정의 아이 아빠도 보기 싫었다.
협의 이혼을 하기로 해놓고도 아이 아빠는 약속을 펑크내며 애를 먹였다. 간신히 이혼 신청을 했으나 (서류처리 문제로) 며칠 뒤 오라는 얘기에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 아빠가 또 안 나타나면 어떡하나. 다행히 그는 나왔고 진심으로 고마웠다. 결혼 만 5년 동안 그가 내게 해준 유일한 ‘선물’이었다.
이혼한 지 1년 반이 지나서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친가 쪽 고장의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지 않고 개그맨들이 몰라몰라 떠들듯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했다. 지금 생각하니 일종의 언어 장애였다. 같이 살게 된 뒤 아이가 고백했다. “그날 엄마 (1년 반 만에) 만났을 때, 날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른들이 일부러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며느리가 미웠을 테고(그분들은 아직도 나를 자기 집 며느리로 여긴다), 각별히 주의하지 않는 한 아이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 아빠가 재혼할 기미도 없고 아이가 학교 갈 나이가 되자 그쪽 어른들도 힘에 부쳤던 모양이다. 어느 날 내게 아이를 보냈다. 이혼 뒤 닥치는 대로 일해 경기도 한 도시에 간신히 전셋집을 얻은 상태였다. 그런데 양육비 문제는 달랐다. 내 능력이 된다면 모르지만, 또 내 능력이 된다 해도 부모가 같이 감당할 일이다. “아빠가 같이 살지는 않지만 우리 ○○이 태권도 학원 보내주고 맛있는 것도 먹으라고 돈을 보내주신다”고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 아빠와 친가에서는 내가 아이와 같이 사는 것만도 엄청난 은혜를 베푼 것처럼 여겼다. 양육비도 안 주려고 했다. “그러면 아이를 다시 데려가라”고 아이 아빠와 담판 지었다. 그 뒤 양육비는 주지만 들쑥날쑥했다. 돈은 애 밑으로 들어가는 건데 마치 나에게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아이 아빠의 빚을 떠안지 않은 건 다행이다. 배우자 대신 보증이나 대출에 이름을 빌려줬다가 이혼 뒤 고스란히 떠안는 이들을 많이 봤다. 아이 아빠가 내 이름으로 400만원 대출받은 게 있었다. 이혼 뒤 회사까지 찾아가 난리친 덕에 아이 아빠가 갚았다. 위자료 대신 갚아‘준다’는 식이었다. 아직 해결 안 된 일도 있다. 아이 아빠가 내 백화점 카드를 얼마나 긁었는지 모르지만 연체를 꽤 했던 모양이다. 신용불량 리스트에 오르는 바람에 나는 아직도 그 백화점과 은행의 카드는 만들 수 없다.
아이가 내 품에 오면서 마음은 편해졌지만 특정한 말이나 행동에 가슴이 철렁할 때도 있다. 발육 단계에서 보이는 사소한 문제들도 이혼과 연관짓게 된다. 지나치게 엄격해질 때도 있다. “넌 엄마랑만 사니까 뭐든 열심히 잘해야 해” 그런 식이다. 사실 이혼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아이를 인격체로 대접하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헤어졌다는 것만 알았지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이혼 과정이나 뒤에 규칙적으로 엄마 아빠를 만났더라면 달랐을 것 같다. 아이가 “엄마 이거 먹어” 그러면서 반찬을 내 입에 마구 넣으려 할 때나, 학교 선생님이 “○○이가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우리 엄마 아빠 이혼했다’고 얘기한다”고 전할 때는 아찔하다. 아이 딴에는 지난 몇 년간의 스트레스를 푸느라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심장이 뛴다. “양육의 짐을 왜 나 혼자 짊어져야 하나” 반발심이 솟구칠 때도 있다. 최근 초등학교 특기적성 교사로 일자리가 생기기 전까지 계속된 경제적인 어려움도 그런 마음을 부채질했다.
우리에겐 상처를 다독일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얼마 전 아이와 나는 “엄마 아들은 힘들고 불편한 게 너무 많다. 우리 누나 동생으로 살자”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아이는 그 뒤로 ‘땡깡’도 부리고 “자꾸 그러면 나 형(아빠)한테 간다~”는 ‘협박’도 한다. 나는 아이가 꾸물대다 지각하면 “혼나겠다, 쌤통이다”고 놀린다. 아이 생활기록부 보호자란에 아이 아빠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도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려 내 이름으로 바꿨다.
나처럼 시행착오 겪지 않기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양육권을 포기했다는 후회와 자기 모멸감이 몇 년간 나를 괴롭혔다. 조금만 여유를 가졌다면 미리 일자리도 알아보고 위자료도 요구하고 양육 능력도 인정받을 수 있었을 텐데…. 무엇이 내 눈을 흐렸을까? 벼랑 끝으로 떠밀리듯 이혼하게 했던 것일까? 이혼은 부부가 결혼 관계를 끝내는 것이지 가정(특히 아이와의 관계)을 끝내는 게 아닌데, 나는 모든 게 끝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배경에는 온 가족이 샌드위치 싸서 공원에 놀러가는 이른바 ‘스위트 홈’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런 이데올로기를 지키려고 말도 안 되는 결혼 생활을 유지했고 이혼하면서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자포자기했던 것 같다. 이혼 과정에서도 주변에 내 이혼을 설명하고 위로받는 것에만 급급했지 이것저것 따져보고 헤아리지 못했다. 누구도 법적 정보 같은 꼭 필요한 얘기를 안 해줬고(해줬다 해도 귀에 들어오기 어려웠겠지만), 제도적인 장치가 없었던 부분은 여전히 아쉽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법원에 무료 상담실조차 운영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안 겪었으면 한다.
이혼을 하고서 얻은 것도 있다. 현실을 대면할 용기를 얻었고,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뭔지 깨달았다. 하지만 수업료는 너무 비쌌다. 아이가 그 수업료를 같이 문 것이 미안하고 고맙다.
약속 시간 1시간 뒤 아이 아빠가 왔다. 아이는 “엄마, 아니 누나야, 낼 봐~” 외치며 떠난다. 한밤중에 보내니 마음이 편치 않다. 이참에 아이 아빠의 ‘면접 규칙’을 정해 공증을 받아둬야겠다. 아이 아빠 편한 시간에 들쭉날쭉 볼 게 아니라 아이 편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보게 해야겠다. 더 이상 제풀에 주눅 들어 당연한 권리와 의무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아, 엄마도 꽤 용감해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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