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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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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킹 목사가 그립다”

등록 2005-09-16 00:00 수정 2020-05-03 04:24

부시의 에어포스원도 비켜간 혼돈의 재해현장에서 만난 흑인 주민들
“쾌적한 애스트로돔도 싫다” 뉴올리언스 도심만이 세계의 전부인 듯

▣ 뉴올리언스·휴스턴=박찬수 특파원 bretolt@pcs@hani.co.kr

“1965년 뉴올리언스에 홍수가 났다. 내 나이 15살 때였다. 허리케인으로 제방의 물이 넘치려고 하자, 백인 거주지를 보호하기 위해 (흑인 밀집 거주지역인) 시 동쪽 지역 제방을 일부러 무너뜨렸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 무렵 나는 마틴 루서 킹 목사를 보았다. 그는 우리가 언젠가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함께 노래를 불렀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고 싶지 않다. 미래를 보면서 앞으로 나가고 싶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자꾸 1960년대, 그때를 다시 생각나게 한다.”

지난 9월6일(현지시각) 미 텍사스 휴스턴의 애스트로돔에서 만난 웨슬리 오스틴(65)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꿈을 얘기했다. 그는 홍수가 나자 뉴올리언스 시내 슈퍼돔으로 대피했고, 여기서 나흘을 지낸 뒤 애스트로돔으로 옮겨왔다.

킹 목사는 1963년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겐 꿈이 있다”고 외쳤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이전 노예의 자녀들과 노예 주인의 자녀들이 형제애로 한 식탁에 앉게 되는 꿈이다. 언젠가는 앨라배마의 인종주의자들이 물러가고 거기서 나의 어린 아들과 딸이 백인의 아들딸들과 형제자매로 손잡고 살아가게 되는 꿈이다.”

부시는 왜 빌럭시부터 갔는가

그러나 오스틴에게 그 꿈의 실현은 아직 멀었음을 이번 대홍수는 일깨워줬다. 그는 “킹 목사가 죽은 뒤 그의 꿈이 어느 정도는 실현됐다. 그러나 완전히는 아니다. 이 현실을 보라. 아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에겐 지금의 뉴올리언스가 1960년대보다 낫긴 하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의 벽을 넘어서진 못한 지역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인명피해가 수천명에 달할 정도로 커진 데엔 이런 벽이 작용했다고 그는 느끼고 있다.

“나는 뉴올리언스에서 30년간 버스를 운전했다. 나는 수많은 사람을 본다.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 나를 대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여전히 인종차별의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만약 내가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번화한) 커넬 거리를 걷는다면, 백인들은 나를 미친 놈으로 볼 것이다.”

그는 “킹 목사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지금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고 증오하지도 않는다. 그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스틴과 같은 흑인 주민 2만5천여명이 지금 휴스턴의 애스트로돔에 수용돼 있다. 모두 뉴올리언스 시내 슈퍼돔이나 컨벤션센터에서 옮겨온 이들이다. 이들은 “슈퍼돔이나 컨벤션센터에 비하면 애스트로돔은 호텔”이라고 말한다. 한 이재민은 애스트로돔에서 불편한 게 없냐는 질문에 “여기는 천국이다. 언제든지 샤워를 할 수 있고, 먹을 것도 풍부하다”고 말했다. 참사 초반 대응이 미흡해 여론의 난타를 당했던 조지 부시 행정부는 이제 이재민들에게 마구 돈을 퍼붓고 있다. 매일 이재민 구호사업에만 7억달러가 든다. 한 가구당 2천달러짜리 직불카드도 주기로 했다. 그러나 뒤늦은 선심 공세로 갈라질 대로 갈라진 흑인 이재민들의 마음을 달래기는 힘들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도시

대참사 이후 조지 부시 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뉴올리언스가 아니다. 미시시피주 빌럭시라는 도시다. 뉴올리언스에 가려서 그렇지, 빌럭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비껴가면서 빌럭시를 정면으로 강타했다. 해변 콘도미니엄에서만 30여명이 몰살됐고, 빌럭시 일대에서 100명 이상이 죽었다. 부시가 그런 도시를 방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담백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현지 분위기다.

부시는 뉴올리언스 공항에만 잠깐 에어포스원(대통령 전용기)을 착륙시켰을 뿐 시내엔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며칠 뒤 뉴올리언스 부근의 배턴루지를 방문해 이재민들을 위로했다. 현지 언론들은 “배턴루지는 허리케인 피해도 별로 없는 곳인데…”라고 부시의 뉴올리언스 우회를 비판했다. 빌럭시는 백인 인구가 70%를 넘는 곳이다. 뉴올리언스는 정반대다. 뉴올리언스의 흑인 인구는 70%에 가깝다. 이 지역의 많은 흑인들은 부시의 행동을 이것과 연결지어 생각하고 있다.

부시가 빌럭시를 방문한 이틀 뒤인 지난 4일 빌럭시에서 침수 피해를 입은 유진 에드워즈(38)에게 “이게 누구의 책임인가. 조지 부시 행정부 책임인가”라고 물었다. 에드워즈는 “나는 부시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허리케인은 자연재해다. 대통령이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에드워즈는 백인이다.

흑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애스트로돔과 뉴올리언스 인근 대피소에서 만난 흑인들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부시에게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거의 똑같았다. “물론이다. 나는 부시에게 화가 난다.” 완다 테일러(39·여)는 “부시는 우리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흑인들을 돌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 이상 화를 내는 것도 소용없다는 듯이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에서 흑인들의 밀집 거주지는 시내 유명 관광지인 프렌치쿼터 외곽에서부터 바로 시작한다. 가장 번화한 상점거리 커넬 스트리트도 근처에 있다. 여기를 이스트(동쪽) 지역이라고 부른다. 이스트 지역 초입은 물이 많이 빠진 상태지만, 동쪽으로 들어갈수록 물은 더 깊어진다. 지난 3일 이스트 지역을 찾았을 때, 현관 앞까지 물이 들어찼는데도 상당수 주민들이 그대로 집에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들은 허리케인이 온다는 경보에도 집을 떠나지 않았고, 둑이 무너져 홍수가 났는데도 집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전기는 나갔고 수돗물 공급도 중단됐다. 가스가 누출되고, 각종 화학물질이 물 속에 녹아들면서 뉴올리언스는 지금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카트리나는 뉴올리언스 해안에 상륙하기 직전까지 최고 등급인 5등급짜리 초강력 허리케인이었다. 시정부에선 모든 주민들에게 외곽으로 빠져나가라는 대피명령을 여러 차례 내렸다. 그러나 수많은 시민, 주로 흑인들은 그대로 시내에 남았다. 뉴올리언스 인근 배턴루지 대피소에서 만난 제임스 라파엘(25)에게 ‘왜 잇단 경고에도 카트리나가 오기 전에 시 외곽으로 대피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우리는 차가 없고 돈도 없다. 대피해도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흑인들의 얘기도 비슷하다. 뉴올리언스 거주 흑인들 가운데 3분의 1이 차를 갖고 있지 않다는 언론보도도 있다.

미리 대형버스를 대거 동원해 흑인들을 밖으로 실어나르지 못한 행정당국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연방정부에서 주정부, 시정부까지 흑인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만 권유했을 뿐 나갈 수 있는 수단은 제공하지 않았다. 배턴루지 대피소에서 만난 제임스(43)는 “왜 정부가 학교버스들을 동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결국 그건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라고 비판했다. 카트리나를 피해 시내 대피소인 슈퍼돔과 컨벤션센터를 찾은 주민들은 3만~4만명에 이른다. 이들만이라도 버스를 동원해 시 외곽으로 실어날랐다면, 홍수 직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흑인들 “그래도 우리는 여기가 좋다”

그러나 그게 온전히 뉴올리언스 상황을 설명해주진 않는다. 군과 경찰이 시내 치안을 장악하기 시작한 지난 3일 이후엔 시내에 남아 있는 주민들에게 교통편이 제공됐다. 레이 내긴 뉴올리언스 시장은 계엄령을 선포해서라도 도심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시 외곽으로 소개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8일 현재 여전히 1만여명의 주민들이 버티고 있다. 길거리에서 만난 존 토머스는 “차가 없어 못 나가겠다”면서도 별로 나갈 뜻이 없어 보였다. 시내 컨벤션센터 부근에서 걸인처럼 지내는 데그니 투비어(41)는 휴스턴행 버스에 오르기를 거부하고 거리에 남았다. 그는 “여기가 좋다. 왜 내가 나가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휴스턴 애스트로돔에 있는 흑인들도 빨리 집에 돌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애스트로돔은 뉴올리언스 빈민가에 비하면 쾌적하고 지내기가 좋다. 완다 테일러는 “여기가 편안하긴 하지만 나는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평생을 빈민가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흑인들에겐 뉴올리언스 도심만이 세계의 전부인 듯했다. 그들은 한편으론 그곳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수십년간의 가난과 인종의 벽은 뉴올리언스에 사는 흑인들에게 자신만의 울타리를 치게 했다. 이런 계층적, 인종적 폐쇄성이 이번 허리케인 피해를 미 역사상 최대 재난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뉴올리언스 사태는 전국의 흑인들을 격동시켰다. 8일 공개된 퓨리서치센터 여론조사에선 흑인 응답자의 66%가 “대다수 희생자들이 백인이었다면 정부의 대응이 더 빨라졌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백인 응답자의 77%가 “정부 대응은 똑같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극히 대조적이다. 또 홍수 직후 도심에서 벌어진 약탈 행위에 대해 흑인 응답자의 57%는 “일반 시민의 생존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이건 흑인들의 잘못된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미국 사회의 근본적 갈등을 반영하는 현실적 지표임은 분명하다.

약탈? 그것은 생존!

개인적으로 뉴올리언스 현지 취재를 하면서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약탈에 대한 흑인들의 시각이다. 뉴올리언스 참사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충격을 준 이유는 엄청난 사망자 때문만은 아니다. 재난 이후 도시 전체가 마치 전후 이라크의 바그다드처럼, 행정력이 마비된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었다는 게 미국민들에겐 뼈아픈 대목이다. 나 역시 뉴올리언스에 들어가기 전에 텔레비전으로 약탈 행위를 지켜보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한국은 아무리 큰 재해를 당해도 저런 일은 없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흑인들의 낮은 교육 수준과 폭력성을 여기서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피소에서, 거리에서, 외부 도시에서 만난 많은 흑인들은 하나같이 “당신이라면 아이들이 굶주리는데 어떻게 하겠나. 그건 약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행동이다”라고 말했다.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했다. 흑인들에겐 오랜 빈곤 속에서 싹튼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듯했다. 미국에서 계층과 인종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빈부격차가 가장 줄어들었던 1960~70년대 초는 흑인 민권운동이 거셌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이후 미국의 빈부 격차는 계속 벌어졌고, 요즘엔 이것이 미국이 직면한 가장 큰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계층의 밑바닥엔 흑인들이 자리하고 있다. 뉴올리언스 홍수가 단순한 자연재해로 끝날 수 없고, 그 상처를 극복하는 게 지극히 험난한,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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