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대연정 제안에 하나둘씩 다른 목소리 튀어나오는 한나라당
개헌 논의 공감하는 의원들 많지만 누구도 쉽게 치고 나서지 못하는 형국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무관심에서 불안과 관심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강도를 높여가며 줄기차게 퍼부은 연정론을 무시해온 한나라당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연정론에 “관심이 없다”며 무시해온 박근혜 대표가 두달 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박 대표는 지난 9월1일 연정을 논의해보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노 대통령이 “지역구도 극복과 대화정치를 제안한 것인데, 대의와 명분이 있으므로 한나라당이 계속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밝힌 지 하루 만의 일이다. 무슨 얘기를 나눌지와 상관없이,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특히 한나라당 내부을 놓고 봤을 때 연정에 대한 논의가 폭넓고 다양하게 진행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는 탓이다. 여기에 당내 각 계파간 이해가 얹혀지면서 봉합되지 않은 당 혁신안을 둘러싼 갈등과 별도로 또 다른 방향에서 갈등이 증폭할 가능성도 있다.
‘새정치 수요모임’이 가장 활발한 목소리
박 대표는 그동안 연정론에 함구령을 내렸다. 의원들의 발언이 중구난방식으로 터져나오면 당내 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탓이다. 한나라당은 민생 챙기기에 전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정론에 자칫 말려들 수 있다는 계산도 작용했다. 그대로 놔두면 노 대통령의 ‘삽질’로 끝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연정론을 거듭 제기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토조차 달지 않는 무관심을 애써 보였다. 박 대표는 지난 8월1일 기자회견을 통해 “연정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며, 국민을 혼란으로 몰아가는 연정 논의를 즉각 철회하라”고 당의 입장을 정리했다.
맹형규 정책위의장이 8월28일 개인성명에서 밝힌 “소극적 방어 자세에서 벗어나 노 대통령을 반대하고 진정으로 국가를 위하는 모든 정치세력을 결집하는 ‘빅 텐트 정치연합’을 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음날 곧바로 꼬리를 감춘 것도 연정 무시론쪽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지도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연정론에 대한 의원들의 각기 다른 목소리가 하나둘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탄핵 등 노 대통령이 던진 승부수에 번번이 말려든 아픈 경험이 있는 다수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무대응을 상책으로 치지만, 한편에서는 “가만히 있다가는 나중에 끌려다닌다”며 준비론을 역설하는 의견이 크게 맞선다.
이해관계가 다른 계파들의 연정론을 바라보는 시각차가 미묘하게 나타나기 시각한 것이다. 당 지도부의 함구령을 어겨가며 가장 활발한 목소리를 낸 것은 ‘새정치 수요모임’(회장 박형준)이다. 박형준 의원은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궁극적으로 정치 시스템을 바꾸자는 의도를 지닌 대통령의 연정론은 개헌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며 “다른 형식으로라도 개헌론이 또 제기될 수 있는 마당에, 계속 무시하고 갈 순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개헌론에 초점을 맞춰 뭔가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경필 의원도 “국회에 개헌 연구기구를 만들자”며 호응했다.
홍준표·김문수 의원과 함께 ‘국가발전전략연구회’의 좌장 격인 이재오 의원은 연정론은 무시하면서도 소선거구제 아래서 “권역별 정당 명부제 혹은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검토해볼 수 있다”며 노 대통령이 연정론과 함께 꺼내든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관심을 엿보였다. 이종구 의원은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연정 제안을 해온다면 검토를 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입장이다. 반면 영남보수파 의원들은 당 지도부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이방호·정형근 의원은 “무관심, 무대응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이명박·손학규는 각자의 길
아직까지 당 안팎의 대선 예비 후보들의 입장에 균열은 없다. 지난 7월 박근혜 대표와 손학규 경기지사가 만나, 연정을 비판하며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입을 열지 않은 채 관망하고 있다. 한 의원은 “박근혜와 이명박은 당장 절대 개헌을 원치 않을 것이다. 현재의 구도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세 후보가 계속 공동 보조를 취할 가능성도 그리 높지 않다. 어차피 각자 길을 가는 마당에, 계산이 틀려지면 지난 2월 임시국회 때 신행정수도건설 특례법을 놓고 후보들간에 의견이 갈렸듯이 언제든지 분열이 생길 수 있다.
의원들도 머릿속 생각과 계산을 다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개헌론으로 논의가 집중되기 시작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헌법연구의원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이병석 의원은 일찌감치 “권력구조, 선거구제 개편, 영토 조항, 경제 조항 등을 포함해 전면적인 개헌 논의를 하자”고 주장했다. 지난 2월 당시 김덕룡 원내대표가 개헌 논의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표도 정·부통령제 개헌을 선호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어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개헌 논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진 않고 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개헌 논의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의원들이 당내 다수”라고 말했다. 문제는 논의의 시기다. 연정, 선거구제 개편, 개헌 등 대통령이 주도하는 논의에 말려들어서는 곤란하다는 분위기가 우세한 상황에서, 누구도 쉽게 치고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성권 의원은 “노 대통령과 박근혜 대표가 만나는 것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가 노 대통령을 만나 연정 거부를 재차 확인하고 논의에 쇄기를 박으려 할 것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접점을 찾거나 논쟁이 다른 방식으로 확대재생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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