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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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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시장에 뛰어든 ‘물귀신’

등록 2005-08-03 00:00 수정 2020-05-03 04:24

기아를 흔들어 인수하기 위한 삼성의 전방위 로비가 X파일로 일부 드러나
업계를 ‘과잉투자’의 수렁으로 이끈 삼성차의 몰락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에 등장하는 기아자동차 인수를 둘러싼 ‘삼성 음모론’은 갑작스럽게 나온 말이 아니다. 1997년 기아 사태 당시 삼성 음모론은 △금융계열사를 동원한 삼성의 기아그룹 흔들기 의혹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삼성의 연계설 △삼성과 이회창 후보간 커넥션설 등 온갖 풍문 형태로 시중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물론 유령처럼 떠돈 ‘삼성 음모론’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심증만 있을뿐 뚜렷한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X파일을 통해 정·관계를 상대로 전방위 로비를 펼친 삼성의 막후 공작이 일부 드러났다.

재벌체제 아닌 기아를 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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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아차가 쓰러진 건 무리한 사업확장과 총체적 경영 부실에 따른 ‘자체 몰락’이라는 게 정설이다. 삼성쪽은 “음모론은 사실무근이다”며, 당시나 지금이나 “기아차를 인수할 여력도, 생각도 없(었)다”고 밝혔다. 오히려 삼성 음모설은 “기아쪽이 경영 부실의 책임을 삼성에 덮어씌우기 위한 역마타도어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아차 몰락에 삼성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다시 증폭되고 있다. 1997년 당시에야 “무너지는 기업에서 한결같이 제기되는 것이 실체가 확인될 수 없는 음모론”이라고 대충 넘어갔지만, 이번 X파일을 통해 삼성이 기아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1997년 당시 기아차쪽은 “4월부터 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할부금융 등 삼성의 금융계열사들이 기아차에 빌려주었던 수천억원을 갑자기 회수하는 바람에 기아차가 재정난에 봉착해 파산 위기에 몰렸다”고 주장했다. 삼성이 금융계열사를 동원해 ‘기아차 흔들기’에 나섰고, 이것이 연쇄적으로 다른 금융기관들의 잇단 자금 회수로 이어져 기아차를 부도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삼성쪽은 “당시 삼성생명과 삼성카드의 기아 대출금은 별다른 변동이 없었고, 기아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전에 오히려 삼성생명이 100억원을 추가 대출해줬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삼성이 금융계열사를 동원해 공개적으로 기아를 흔들면서 동시에 기아차 인수를 위한 지분 보유를 위해 뒤편에서는 다른 삼성 금융계열사가 기아차의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다시 매입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1997년 6월 삼성생명은 보유하고 있던 기아계열 (주)기산의 주식 1%를 며칠 동안 하한가에 대량 매각했다. 그러나 이 주식은 전량을 삼성의 다른 금융계열사가 매입했고, 이에 따라 시중에서는 “기아차에 대한 인수·합병 전 단계로 삼성이 외곽 때리기를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1999년 ‘국회 경제청문회’ 공판 조서를 보면, 김선홍 전 기아그룹 회장은 “1997년 6월 당시 재경원 강만수 차관이 ‘기아차 자금 회수를 자제하라고 삼성에 말하겠다’고 약소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뒤 사흘간은 삼성 금융계열사들의 자금 회수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또 “1997년 6월 삼성에서 인수 제의가 왔는데 이를 거절하자마자 자금줄이 완전히 막히고 여기저기서 만기 연장을 거부하는 등 본격적으로 압력이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삼성의 기아차 인수 시도가 1997년에 갑자기 표면화된 건 아니다. 전문경영인 체제인 기아차는 1990년대 들어 삼성의 인수 위협에 늘 직면했다. 삼성의 기아차 인수설이 가장 먼저 터진 건 1993년 10월에 일어난 삼성의 기아그룹 주식 매집 사건이다. 이건희 삼성회장이 자동차사업 진출을 선언한 직후였는데, 삼성은 삼성생명 등을 통해 기아차 주식을 대량 매집해 지분율을 9.72%까지 늘렸고 이때부터 삼성의 기아차 인수론이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삼성은 기아 지분을 일부 매각했고, 삼성의 1차 기아차 인수 시도는 이렇게 좌절됐다. 그러나 그 뒤 시중에서는 “언젠가는 삼성이 기아를 삼키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 끊이지 않았다. 1994년 12월 삼성이 자동차사업 진출을 허가받기 전부터 업계에서는 “후발업체로서 삼성차가 핸디캡을 일거에 만회하려고 필사적으로 기아차 인수에 나설 것이다. 삼성이 들어오면 현대차와 대우차는 재벌 체제라서 내부 계열사와 금융계열사를 동원해 방어할 수 있다. 따라서 재벌 체제가 아닌 기아가 삼성에 인수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1995년 3월에 출범한 삼성차는 1996년 쌍용차 인수·합병을 추진하기도 했다.

기아차 공략하다 국가 경제 흔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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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삼성이 자동차사업 진출을 선언하자, 자동차업계는 “정부가 반대하고 있지만, 결국 삼성자동차 진입은 기정사실이다”고 봤다. 삼성차 진입에 위협을 느낀 자동차업체들은 대응 차원에서 내수시장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설비투자를 급격히 증가시켰다. 금융기관의 ‘자동차·트레일러산업 시설자금 대출’ 추이를 보면, 은행 대출금은 1992년 말 6510억원에서 삼성차 진출이 불거진 1993년 말 7601억원, 1994년 말 9550억원, 1995년 말 1조120억원, 1996년 말 1조3610억원으로 대폭 늘었다. 비은행 금융기관의 시설자금 대출도 1993년 3분기 6780억원에서 1993년 4분기 7750억원으로 갑자기 늘었고, 1994년 말 9990억원, 1995년 말 1조4490억원, 1996년 말 1조9890억원으로 계속 급증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박홍재 소장은 “삼성이 자동차산업에 뛰어든다고 하자 1994년부터 기아는 물론 현대, 대우까지 모든 자동차업체들이 설비투자를 늘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미 국내 자동차산업은 ‘과잉중복 투자’ 상태에 빠져 저마다 무이자 할부판매를 내걸고 출혈경쟁을 벌이고 있던 판국인데, 삼성차 진입에 따라 더욱 무리하게 투자를 늘린 기아차와 대우차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고 이는 은행의 대규모 부실로 이어졌다. 이건희 회장이 철저한 사업성 검토 없이 뛰어든 삼성차가 자동차산업은 물론 금융기관 부실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삼성이 기아차를 공략하다가 국가 경제를 흔들어놓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당장 삼성이 인수·합병 대상으로 점찍은 당사자인 기아차는 무리한 확장과 재벌 체제로의 재편을 그 대응책으로 삼았다. 기아는 1997년 초 (주)기산을 계열사로 편입하고 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하는가 하면 기아차판매를 별도의 계열사로 떼어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길이었다.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연구위원은 “삼성의 자동차 진출은 기아차에 시장 선점을 위한 설비 확장 경쟁으로 설비 과잉, 투자비 부담을 가중시켰다. 기아차는 외형 불리기와 비관련 사업 진출에 나섰고, 자동차업에 주력하던 기아차도 재벌들의 행태를 닮아가고 있었다”고 밝혔다. 박홍재 소장은 “기아에는 당시 삼성의 인수 위협에 맞서 재벌그룹 체제로 재편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퍼져 있었다. 그래서 기아 내부에서 기획조정실을 만들고 김선홍 사장을 그룹회장으로 앉히는 등 재벌 체제를 갖추려 했다. 기아가 제 무덤 파는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음모론’에 자극받아 무리한 설비투자에 나섰다는 것인데, 기아 사태의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이 있다는 얘기다. “강력한 노조만 있으면 삼성의 인수·합병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서 당시 기아 경영진과의 담합 아래 ‘강성’ 기아차노조가 탄생했다는 지적도 있다.

고의적으로 루머를 유포시켰다는 소문도

특히 1997년 당시 기아차 인수계획을 담은 보고서(삼성그룹 비서실이 97년 3월4일 작성한 ‘신수종사업 추진현황 및 향후계획’과 97년 4월 삼성자동차 산업분석실이 작성한 ‘국내 자동차산업의 구조재편의 필요성과 정부의 지원방안’)가 공개되면서 삼성의 기아차 인수설은 더욱 증폭됐다. 당시 삼성이 보고서를 만들어 고의적으로 그것을 흘리면서 ‘기아는 성장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인수·합병이 불가피하다’는 루머를 유포했다는 말도 떠돌았다. 이런 모든 사태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삼성차는 1998년 3월 정식 판매에 들어갔으나 결국 총부채 4조2천억원을 남기고 1년 만에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삼성차에 2조1천억원의 보증을 섰던 서울보증보험에는 삼성차 손실에 대한 국민세금 6천억원이 공적자금으로 투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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