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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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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그것은 내 마지막 저항

등록 2005-06-23 00:00 수정 2020-05-03 04:24

박홍규 교수가 ‘자동차 공화국’에서 낡은 자전거를 고집하는 이유
멋들어진 레저스포츠가 아니라 오직 생활하기 위해, 움직이기 위해 탄다

▣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며칠 전 몇년째 아침 저녁으로 타던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얼마 전 고장이 나서 멀리 있는 자전거포에 힘들여 끌고 갔더니 자전거포 주인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웬만하면 바꾸라고 말한 그 자전거였지만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벌써 몇대나 잃어버렸는데도 말이다. 혹시 돌아올까 해서 며칠을 기다리다 너무 불편해 오늘 아침 아내가 타다가 고장이 나 창고에 처박은 여성용 자전거를 꺼내어 다시 자전거포에 갔는데 주인의 눈치가 더 이상했다. 내가 몇년을 단골로 다닌 할아버지가 주인인 자전거포는 얼마 전에 없어졌서 산악용자전거(MTB) 전문점인 젊은 주인의 자전거포에 간 탓이기도 했지만 혹시 수염 기른 내 얼굴을 본 독자라면 그 주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환경미화’에 좋지 않다고 하더라

요즘 우리나라 자전거는 MTB니 뭐니 이른바 레저 운동용이고 수송 수단으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듯하다. 그런 탓인지 요즘 우리나라 자전거에는 라이트가 거의 없다. 그래서 밤에 자전거를 타고 가로등 하나 없는 1차선 시골길을 달리기 위해서는 자전거 몸통에 라이터와 형광 테이프를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 헤드라이트를 단 자전거 모자를 일부러 만들어 덮어쓰며 형광 상의까지 입어야 했다. 그래도 시골길을 폭주하는 자동차 때문에 몇번이나 논두렁에 자전거와 함께 처박혔던 적이 있다. 그러나 결코 죽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가용 운전자들에게 욕을 먹기 싫고 그들의 교통사고를 방지해주기 위해 그런 치장을 한 것도 한때였고, 요사이는 귀찮아 그냥 평상복으로 탄다. 어쩌다 가끔은 양복을 입고도 타서 학생들이나 사람들에게 야릇한 웃음을 흘리게도 하고.

아마도 자전거를 많이 타지 않는 나라, 게다가 레저 운동용으로만 타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리라. 이상한 꼴의 값비싼 옷차림을 한 일률적인 MTB 부대나 접이 자전거 쌍쌍 부대가 대형 고급 자가용으로 그 자전거들을 귀하게 모시고 와 공기 좋은 산속이나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 취미는 나에게 없고, 그들을 보면 나 역시 행복하지 않게 웃는다. 어느 시인 교수가 1천만원 이상 간다는 MTB 타기를 찬양하며 엄청난 운동이 된다고 적극 권했으나, 나는 그런 말들이 싫다. 나는 운동한답시고 땀을 흘리기 위해 자전거를 맹렬하게 타지 않는다. 걷듯이 쉬엄쉬엄 콧노래를 부르며 탄다(시를 짓지는 못하지만). 타다가 힘들면 끌기도 하며 멈춰서서 책을 읽거나 그림도 그린다. 논두렁에 몇번이나 처박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밖에 세워둬 녹이 낄 대로 끼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의 몇만원짜리 자전거를 보고 개탄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때 학교 현관 안에 세워두었더니 환경 미화에 좋지 않다고 하여 밖에 세우고 있으나, 다른 고급 MTB 자전거는 모두 건물 안에 세워진다.

고급 자가용이 부의 상징인 사회라니

20여년 전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책을 낸 적이 있으나, 그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나를 보고 야릇하게 웃는 사람들이 그리 행복하게 보는 것 같지는 않다. 본래는 <사회주의는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말을 인용하고자 한 것이나 출판사의 배려로 그렇게 바꾸어졌다. 사실 사회주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한다는 많은 나라에서도 자전거를 열심히 타니 그 배려가 옳았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그 책을 복간한 출판사에서는, 좁아터진 우리나라에서 자가용을 타는 것은 일종의 범죄이고 자가용 사회는 이기적 사회라고까지 한 그 내용은 이제 우리나라에는 맞지 않으니 대폭 고쳐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느끼는 심정은 변함이 없다.

나는 그런 우리 사회가 싫다. 심지어 나는 김민기 세대로서 그의 노래를 좋아하지만 그가 묘사한 노동자들이 언젠가 자가용을 타리라는 꿈을 그린 부분에 대해서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저항한다. 지금 그의 노래가 현실이 되었기에 더욱 그렇다. 김민기는 자가용을 타는지 모르지만 그 세대의 많은 사람들, 심지어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들이나 종교인 등 이른바 생태주의자들이 자가용을 타는 것에 대해 나는 저항한다. 노동법을 공부하는 나는 노동자가 잘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노동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교통난이나 공해 배출이 적은 공용의 전철이나 버스 또는 자전거를 이용하기를 희망한다. 물론 통근 거리가 먼 경우에는 자전거가 무리이겠으나 외국처럼 전철이나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데는 자전거를 이용하기를 희망하고 그렇게 생활을 바꾸는 노동운동을 하기 바란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자전거로 통근하거나 부분적으로 자전거를 이용하는 나라가 많은데 우리나라만은 다르다. 자가용이란 것이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기묘한 우리 사회에서, 게다가 대형 고급 자가용이 부의 상징인 우리 사회에서 자전거로 통근한다는 것은 당연히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명색이 교수라는 내가 자전거를 탄다는 것도 이상하게 보이는 듯하다. 어떤 문제로 말다툼을 하게 된 마을 사람들이 교수라는 자가 자전거나 타고 개나 끌고 다닌다고 욕한 적이 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게 교수로서 적합하지 않은 일이라고 보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자가용을 타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교수는 거의 없다. 심지어 우리 학교 수위는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교수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례를 하면서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나에게는 경례를 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에게도 제발 경례를 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수위가 어떻게 내가 교수인 것을 안 뒤에는 경례를 하지 않은 것을 미안해하며 경례를 하게 되어 더욱 우습게 되었다. 물론 나는 그 문을 이용하지 않는다.

내가 6년째 살고 있는 시골에는 그 전에 살던 도시 아파트처럼 자가용이 한대라도 없는 집은 없고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도 나밖에 없다. 도리어 도시보다 생활이 불편한 시골에서 자가용은 필수라고도 한다. 우리 마을에는 버스가 하루 네번만 다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한다. 그런 필수적인 물건이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비롯해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나는 그럴 바에야 왜 시골에 사는지 정말 모르겠다. 공기 맑은 곳의 전원생활? 나는 그런 말이 싫다. 조금이라도 반문명 은둔자의 생활에 가까워지고자 시골생활을 택하지 않았는가. 텃밭에서 무공해 식료품을 스스로 키워 먹는 시골 생활? 그런 말도 싫다. 나는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 아침저녁 6백평 밭에 가서 1년 내내 잡초와 씨름하며 힘들게 농사를 짓고 그것을 먹지만 노동 자체가 목적이지 그런 걸 먹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 점이 유일한 우리 시골 부부싸움의 거리다. 몸에 좋으니 먹으라고 하면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도망간다.

시골일수록 자가용이 필요하다고?

왜 자전거를 타는가? 건강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오직 움직이기 위해 탄다. 자가용이 싫어서 자전거를 타는지도 모른다. 외국처럼 자전거길이 도로에 붙어 있기는커녕 1차선 흙길에 불과해 밤에는 물론 대낮에도 자전거 타는 일은 위험하기 그지없고, 눈이나 비라도 오는 날이면 폭주하는 자가용이 뿌려대는 흙탕물 세례에 온몸이 젖고 넘어지기 일쑤인 자전거 타기는 아직까지 나에게 자가용 사회에 대한 초라한 저항의식일지 모른다. 자가용 운전자가 던지는 꽁초나 내뱉는 침도 맞아보고 심지어 좁은 길에서 자전거를 탄다고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그 꽁초나 쓰레기를 주우며 자전거 타기는 이제는 거의 모든 꿈을 포기한 초라한 내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 자가용 뺑소니에 치여 죽으리라는 불길한 생각을 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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