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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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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해줄게, 가지 마라”

등록 2005-05-25 00:00 수정 2020-05-03 04:24

카투사들이 미군들에게 인간대접을 받으며 처우를 업그레이드하게 된 비밀

▣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용산 미군기지의 아침은 ‘펑’ 하는 예포 소리로 시작한다. 5월16일 아침 6시 한-미연합사령부 앞 나이트 필드. 예포 소리에 이어 태극기와 연합사기, 성조기가 나란히 올라간다. 태극기는 한국군이, 연합사기와 성조기는 미군이 올린다. 조깅을 하던 이도,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이도 멈추고 경례를 했다.

85년부터 ‘불쾌한 표현’의 사용 금지

카투사의 하루도 시작된다. 오전 7시. D-FAC(식당)에는 미군보다 카투사들이 훨씬 많았다. PT(체력단련) 훈련을 마치고 평상복으로 온 이도 있고, 근무복을 입은 이도 있다. 미군과는 달리 한국군 월급을 받는 카투사들이 공짜 ‘짬밥’을 마다할 리 없다. 어느 식당이건 밥과 김치, 국은 꼭 있다. 규모가 큰 식당이면 점심·저녁에 비빔밥, 육계장, 닭도리탕 같은 한국 음식이 메인 메뉴로 제공된다. 2002년 김덕곤 현 한국군지원단장이 부임하면서 치약·칫솔·운동화 등 생필품이 한국산으로 지급됐고, 이발 쿠폰도 월 2장에서 3장으로 늘었다. 무리지어 밥을 먹던 헌병대 소속 카투사들은 “맛은 장담 못하지만 메뉴는 다양하다”고 말했다.

2005년 ‘카투사의 하루’는 어제와 다르다. 일상 생활의 ‘분리와 차별’은 대부분 해소됐다. 지난한 부침이 있었다.

카투사 처우와 지위 개선을 위해 한국군과 미군이 머리를 맞댄 것은 1980년대 중반이다. 그 전까지는 배치부터 훈련, 처우까지 미군의 손에 전적으로 좌우됐다. 카투사에 대한 양국의 이해를 조정하는 한-미인사실무자회의는 1986년 1월에 처음 열렸다. 1993∼95년 미8군 한국군지원단장을 했던 정성길 대령은 이 시기를 ‘안보지원기’에서 ‘안보협력기’로의 이행 시기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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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에 쓰이던 ‘노랑둥이’(yellow nigger)라는 욕설은 사라졌지만, 80년대 초반까지도 카투사들은 “우리가 너희를 지켜주니 말을 들어라” “한국군으로 꺼져버려” 같은 비하적 표현을 간혹 들었다. 1985년 양국 군 책임자가 카투사 운용 기준을 담은 미8군 규정 600-2을 손질하면서 ‘불쾌한 표현’의 사용은 금지됐다. ‘카투사는 동일 계급의 미군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 ‘미군과 동등하게 영내 의무시설과 오락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항목도 함께 담겼다. 1988년에는 ‘미군이 카투사를 처벌할 수 없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1985년 한국군 연락장교단이 한국군지원단으로 명칭을 바꾸며, 인사 행정에 대한 독립성을 획득하고 난 뒤다.

1960년대 후반, 자살에 집단탈영에…

이에 앞서 1978년 미2사단은 인권옹호상담병 교육을 시작하고 카투사의 날(8월21일)을 정했다. 1968년에는 한국군 ‘원복제도’를 폐지하고 전원 신병으로 카투사를 뽑았다. 한국전쟁 뒤 크게 세 차례(60년대 후반, 70년대 후반, 80년대 중반) 카투사 정책이 요동친 셈이다. 이때마다 카투사들의 일상적 처우도 ‘업그레이드’됐다.

그러나 이 세 시기는 주한미군의 처지에서 볼 때 ‘비용이 들지 않은 숙련 노동자’인 카투사 공급이 막히거나 줄어들 위기에 처할 때였다. 1960년대 후반, 미군의 차별에 대한 카투사들의 항의가 급격히 치솟았다. 미군을 죽이고 자살한 카투사가 생겼고 차별적인 몸 수색과 배식 차별에 반발해 집단 탈영한 카투사들도 나왔다. 급기야 미 국방성에서도 카투사 폐지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주한미군은 ‘전원 신병 모집’이라는 제도의 변화로 이런 분위기를 눌렀다. 또 카투사들을 달래는 방편으로 ‘원복제도 폐지’를 대대적으로 내걸었다. 1970년대 후반은 미국의 대학과 민간기관에서 카투사 제도의 효용성에 대한 평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였다. 미2사단을 필두로 주한미군이 카투사와의 ‘친선 우호’를 강조하는 이벤트를 벌인 것은 이런 연구를 겨냥한 ‘정치적 제스처’ 성격이 강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한국쪽에서 카투사 인원을 크게 줄이려 했다. 1986년 한국 육군은 미8군에 7240명인 카투사 인가원을 1988년까지 4240명으로 줄이겠다는 뜻을 전했다. 한국의 군사정부가 부대 증설을 꾀하며 병력을 늘이고 싶어서였다. 그러자 한-미연합사령관 리브시 대장은 박희도 육군참모총장에게 “미 의회가 주한미군의 예산을 줄일지 모른다”는 우려를 내비치며 당시 실지 병력 수인 6140명을 유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미8군 사령관은 한술 더 떠 “카투사는 부대 임무 수행을 위한 생명혈”이라고 표현한 ‘뜨거운’ 서한을 한국 육본에 보내기도 했다. 이런 줄다리기 끝에 한국과 미국은 카투사 병력 인가 작업을 공동으로 하게 됐고, 1991년까지 카투사 수는 미군이 원하던 6140명으로 유지됐다. 카투사의 처우 개선은 현상 유지를 바라는 미군이 제공한 ‘당의정’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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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도 줄 잘 서야 된다

운 좋으면 ‘계장’ 대우 운 나쁘면 붕대만 갈아줘야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카투사’라고 모두 펜대 굴리는 편한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논산’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카투사들은 경기도 의정부 ‘캠프 잭슨’으로 옮겨져 미군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추가훈련과정(KTA)을 거친다. 캠프 잭슨을 졸업하면서, 의무·행정·보급·수송·헌병·전투 등 군사 주특기(MOS)를 배정받게 된다.
의무는 쉽게 말해 위생병(Medic)이다. 미군의 생활여건이 뛰어나다고 해도, 군 생활 편하려면 ‘줄 잘 서야 한다’는 격언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운 좋은 카투사는 용산의 ‘121 종합병원’에서 ‘주한미군 한국지부 용산병원 김 계장’ 대우를 받을 수 있지만, 운 나쁜 카투사는 매일 야전을 뛰어다니며 다친 미군들 붕대를 갈아야 한다.
가장 무난한 것은 행정과 보급이다. 행정병은 말 그대로 미군부대의 작전과·인사과 등에서 서류 업무를 담당한다. 보급병은 미군부대에 필요한 물품을 나눠주고 수거하는 일을 한다. 편한 만큼 영어를 제대로 못하면 미군들의 따돌림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심하다. 같은 행정병이라도 ‘카투사 인사과’로 배치되는 사람들은 한국군 지원대장 눈치 보며 제대할 때까지 영어 한마디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수송은 운전병이다. 몰게 되는 차의 종류는 승용차에서 커다란 군용트럭까지 천차만별이다. 사고가 날 경우 본인 과실 여부를 따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미군과 달리 카투사에게는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어, 미군 지휘관들은 카투사에게 운전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경우 운전병은 행정병과 비슷한 생활을 하게 된다.
헌병과 전투는 카투사 가운데 가장 고된 군사 주특기로 꼽힌다. 헌병의 업무는 미군과 한국인 민간인 사이의 갈등을 조절하는 것에서부터 미군 군용트럭 ‘험비’ 위에 수류탄 발사기(Mike19)를 꽂고 야전을 누비는 일까지 다양하다. 갈등 조절 대상은 요금 못 받은 택시 기사, 기물 파손을 주장하는 술집 주인, 한해 농사 망쳤다고 울상 짓는 과수원 주인 등이다. 전투는 우리말로 ‘알보병’이라고 보면 된다. ‘빡센’ 훈련 강도로 악명 높은 미 2사단 506보병대대나, 503보병대대에 배치된 카투사는 2년 뒤 아주 건강한 몸으로 제대할 수 있다. 이들은 미군 야전식량(MRE)을 많이 먹어 변비(?)에 자주 걸리기도 한다. 훈련장을 따라다니며 미군들에게 만두와 콜라는 파는 ‘아지마’(아줌마의 미군 발음)에게 부탁해 사발면으로 바꿔 먹어도 변비에 걸리기는 마찬가지다.



폼에 죽고 폼에 산다

미군에‘꿀리지 않으려고’ 고난도 시험·훈련에 도전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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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들 가운데에는 의무사항이 아닌 미군의 체력·훈련 평가에 도전하는 이들이 많다. 군복에 붙이고 다니는 ‘휘장’의 매력 때문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꿀리지 않으려고” “검증하고 싶어서” “명예를 얻으려고”….

매일 아침 중대별, 소대별로 진행하는 PT 시간에 구령을 붙이는 이는 PT 마스터다. 일년에 두 차례씩 실시하는 정기 체력검정(APFT)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들에게 부여되는 지위다. 카투사는 이 테스트에 합격만 하면 되나, 고강도의 PT 마스터에 도전하는 이들이 많다. PT 마스터가 되려면 팔굽혀펴기 2분에 75개, 윗몸일으키기 2분에 80개, 3.2km 달리기는 13분 안에 해야 한다. 2000년 전방 전투부대인 506보병대대에서는 카투사 90명 중 25명이, 미군 700명 중 65명이 각각 PT 마스터를 땄다. 미군에 견줘 카투사의 성취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다.

야전·제식 지휘통솔력과 독도법 등 실무력을 배우고 측정하는 미 하사관학교 초급지휘자 양성과정(PLDC)에 도전하는 이들도 많다. 미국식 훈련법과 언어장벽을 극복해야 하지만 미군에 견줘 카투사의 합격 비율이 훨씬 더 높다. 종종 카투사 가운데 수석자가 배출돼 국방일보를 장식하기도 한다. 미 육군보병 최고영예로 꼽히는 우수보병휘장(EIB)에서 카투사들은 통상 미군 합격률의 두배를 기록한다. 우수야전의무휘장(EFMB)과 공중강습휘장에서도 카투사들은 좋은 성적을 거둔다. 지난 4월13일 미 2사단 1여단 4-7 기갑부대가 실시한 스퍼 라이드(Spur Ride) 시험에서는 응시한 카투사 7명이 전원 합격해 화제가 됐다. ‘진정한 기갑전투원 선발’을 내세우는 이 시험은 지원자격이 까다롭고, 군 지식부터 코스 실기까지 3단계 과정을 측정한다. 합격자는 매주 금요일과 부대행사 때 카투보이 모자를 쓸 수 있고 전투화에 박차(spur)를 부착하는 특권이 주어진다. 미군들 사이에서는 “가장 폼나는 복장”이라 불린다. 간혹 ‘독특한 성격’의 미군들은 이 휘장을 흉내내 붙이다 선임하사에게 걸려 근무 시간 뒤에 화장실 청소나 풀 깎기 같은 ‘벌근무’(디테일)를 서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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