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의 토양에서 발흥하는 민족주의 삼국지… 다원적이고 평등한 공존은 가능한가
▣ 백원담/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애국이라는 동전을 넣으면 성공이라는 상품이 나오는 자판기’, <태극기 휘날리며> <이순신>, 거기에 하버드에 가서 대한민국 대표선수를 외치는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의 장면을 넣어도 조금도 튀지 않는 것은 하나같이 ‘나라 사랑’ 표찰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2002 월드컵·촛불시위·한류, 21세기 한국은 이들 문화코드로 태극기 휘날리며 현전한다. 거기서 ‘좋은 나라 만들기 캠페인’과 ‘누구도 우리를 말릴 수 없다’는 동전의 양면이다. 자기 부정의 카타르시스와 막강 한국의 욕망은 후줄근하거나 찬란하거나 역사의 호환과 오늘을 문제 삼는 데 서슴없다. 식민지 지배, 분단 60년, 아직도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단할 수 없는 이 척박한 땅에서 21세기 신인류들은 조국을 헐벗지도 너절하지도 않은 휘날리는 깃발로 표상해내며, 새로운 한국을 말하고자 한다. 이를 아래로부터 발현된 민족주의의 새로운 흐름, 문화민족주의라고 한다면 그 민족과 문화의 새로운 절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한류로 나타난 문화적 민족주의
그것은 물론 문화의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중심부의 배제와 착취의 논리를 피눈물로 익히며 자본의 세계화라는 각축 속에서 일궈낸 문화 생산력에 힘입은 바 크다. 탈식민의 과정을 냉전으로 강요당한 결과, 우리 속에 내재할 수밖에 없었던 ‘아메리카’로 상징되는 서구자본주의 문화와 혼종 교배에 의한 잡종의 문화 역동성. 그것은 우선 근대적 민족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우리 문화 구성 과정의 특수성을 반영한다. 냉전 체제 속에서 떨어내지 못한 식민적 열성과 함께 ‘아메리카’가 내몰아간 문화적 파국, 그 냉전문화와 군사문화의 굴절을 현상 타파의 저항성으로 대응해가며 만들어낸 모방과 중역(重譯), 변종과 창신. 그 혼종화된 대중문화가 오늘의 한류로 현상한 문화적 민족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확하게 문화의 세계화, 지구적 지역화라는 국가와 자본의 회로 속에 있다. 민족과 문화의 변주, 그것은 발랄한 문화정치적 역동성으로 오늘의 반민족적 현실을 넘는 가능성일 수 있지만, 대한민국주의라는 문화민족주의의 요란한 취타악은 팝아시아주의를 꿈꾸는 무서운 욕망과 손을 잡는 데도 서슴없다는 데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토록 당했던 미국의 세계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아시아 속의 힘의 불균형, 그 비대칭성에는 눈을 감는. 한국식 문화민족주의 앞에 중국과 동남아시아는 우리 문화상품의 소비 대상으로만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기> ‘본기’ 중 한무제편은 전혀 <사기>답지 않다. 기전체의 역사기록에 사마천은 늘 촌철살인의 꼬리말을 달아놓았다. 그런데 <효무제 본기>의 꼬리말은 어이없게도 제사의례에 관한 것이다. 꼼꼼히 적어놓았으니 잘 따르라는 말까지 덧붙여. 게다가 고조선·흉노·남월(북베트남) 정벌과 같은 한무제의 치적은 단 한줄로 끝낸다. 오경박사 제도로 중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관료제도를 마련하고 봉건통치 구조를 구축한 사실은 아예 적지도 않았다. 한무제가 얼마나 신선을 만나고 싶어했나, 그를 위해 방사를 만나고, 봉선(封禪·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것)을 올린 내용이 거개를 차지하는 것이다. 한무제는 사마천을 궁형에 처했고, 사마천은 그 속에서 발분지작(發憤之作) <사기>를 저술했다. 그런 사마천으로서 한무제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이른바 중국 천하를 세운 한무제가 방사들이나 따라다니고 신선방술에 관심을 두면서 감히 황제에 비견하고자 했던 지극히 한심한 인물로 역사에 각인시켜놓았던 것이다.
그 한무제가 최근 중국에서 <한무대제>라는 역사 드라마(CCTV8)로 만들어졌다. 총 58부작, 텔레비전 드라마 사상 최대 규모의 제작비(3년, 약 60억원), 시청률 2위.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는 이 대하역사극은 ‘중화민족 정신의 발양, 애국주의의 기치, 영웅 서사시’라는 언론의 극찬을 받는다. 시청자들은 한나라에 관심을 가졌고, 그로써 중화의식·대국주의가 고양됐다. 강희제-건륭제-옹정제는 만주족이었지만 한족의 강한 통치자의 형상은 21세기 부강하고 강한 중국의 욕망을 그대로 전현해줄 것이다.
중국 블록버스터 영화의 국가주의
봉건 중국을 넘어 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를 건설했고, 아직도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리지 않은 오늘의 중국에서 전제군주의 형상으로 국민적 동의와 상업적 이해와 국가의 안위를 모두 거두고자 하는 것은 그야말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나날이 심해지는 빈부격차, 피폐해지는 농촌, 지방정부마다 개발 바람에 천지가 공사 중인 중국. 그 발전주의의 문제에 심입하기보다는 애국주의를 조장, 오늘의 어려움을 감수케 하려는 국가적 프로젝트, 중국은 과연 자본의 세계화 시대에 연착륙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중국이 문화산업의 기치를 들었다. 한류 바람에 문화대국 중국이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콘텐츠를 바탕으로 문화산업 대국을 꿈꾸는 것이다. <한무대제>는 바로 중국이 드라마 대국으로 나서기 위한 선언과도 같다. 물론 문화산업 대국의 몽상 앞에서 중국 정부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문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문화의 자율성을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문화에 대한 통제권을 놓을 수 없는. 장이모 감독의 <영웅>이 그려낸 상업주의와 국가주의의 절묘한 결합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해외 자본에 의한 블록버스터 영화는 중국 영화계를 거대한 자본의 돌풍에 휘말리게 했고, 그리하여 중국 영화계에서 일고 있던 독립영화 발전의 소중한 계기들을 박탈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장이모야말로 영상산업의 발전 메커니즘을 가장 잘 꿰뚫고 <연인>에 이어 무협 3부작으로 중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한 일대 실험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이모의 기획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중국 정부가 문화산업의 발전에 대한 과감한 구조조정에 들어간 것과 궤를 같이한다. 국가주의와 문화산업으로 세계사에 귀환하는 문화대국,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21세기 중국 문화민족주의의 화려한 등극을 표징해낼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거대한 중국은 사마천의 꼬리말을 잊은 것이 아닐까. 한무제가 봉선을 행하며 황제를 닮고자 했을 때, 끝내 신선을 만나지 못한 늙은 궁상으로 영원히 각인해놓은 사마천의 발분(發憤)을.
한국과 중국이 거침없이 국가주의를 드러내는 동안 일본은 그럴 수 없으니 노회하게 간다. 가장 문화화된 양식으로 21세기 동아시아에 일본 없는 일본을 전현해내는 것이다. 일본에 상업적 민족주의 같은 것은 없다. 탈색한 국가주의와 상업주의의 은밀한 결탁이 꿈꾸는 아시아 제패의 욕망. 거기에는 미국화한 일본 <라스트 사무라이>도 있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있다. 그리고 보아와 욘사마, 일식 한류, 일본이 한국에 손 내미는 아시아로의 문화적 공조 제의.
21세기 동아시아의 지구적 지역화를 일본은 무표정으로 기획한다. 희망으로서의 미야자키와 전지구화로서의 포켓몬이 미국의 유통 배급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국가와 자본은 잘 알고 있고, 그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대한 우리의 경계는 아직 무력하다. 아시아를 제패한 적이 있는 일본의 초국가적 지역화 프로그램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일본의 초국가적 지역화 프로그램
21세기 접어들어 세계화는 지구적 지역화 현상으로 양상한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지역 블록화를 요구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의 경제 성장과 국민국가의 발전에 따라 그러한 주동적 지역화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반세계화적 대응으로서 새로운 아시아 지역주의의 가능성, 아시아 지역화의 비판적 상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와 지역화의 흐름 속에 민족주의는 결코 쇠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한·중·일이 각기 그리는 아시아상과 세계상 속에서 각축하는 양상이다. 거기서 한국은 늘 불리하다. 한국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한민국 대표선수를 외치며 어깨를 거는 것, 그 대한민국주의로 다원적이고 평등한 복수의 아시아의 공존을 꿈꾸는 것은 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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