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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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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안하고 기이한 개인주의

등록 2005-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젊은 세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이상한 동거 …의사소통과 연대를 통한 ‘시민성’ 획득 못해

▣ 전효관/ 시민문화네트워크 ‘티팟’ 대표·문화연대 청소년문화위원장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사회는 3저 호황을 거치면서 ‘소비사회’로 급속하게 전환한다. 한국 사회가 겪는 정치적, 문화적 변형의 내용은 민주주의의 제도화 경험과 문화세대의 형성 등을 통해 드러난 바 있다. 전 사회적인 빈곤 경험에서 형성된 ‘금욕’과 ‘절제’의 윤리는 ‘소비’와 ‘자기표현’의 윤리로 변화돼간다. 소비사회의 진전 과정에서 젊은 세대가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상품’을 소비하는 전형적 특성을 보였다.

개인주의 윤리의 부재공간을 국가가?

새롭게 형성되는 세대 정체성에 대한 서로 다른 가치 판단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 세대, 소비주의 세대, 인터넷 세대라는 규정은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통념들이다. 집단과 개인, 생산과 소비,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대비는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되어 세대 차이를 설명하는 핵심 이분법으로 활용된다. 아마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 변화를 설명하는 범주 중에서 세대론만큼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한 것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한 세대를 구성하는 내부가 동질적이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참조사항일 뿐 사회의 변화를 서술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세대론의 주기는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386세대는 그나마 역사적으로 형성의 근거를 갖고 있지만, 그 뒤에 나온 무수한 세대론은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재단되었다가 사라져갔다.

기존 세대에게 새로운 현상은 두려움과 불안감의 대상이었다. 어른들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고, 이 세대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사고할 수 있을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또 글로벌화되는 세계 질서 속에서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을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 하지만 촛불시위와 월드컵 응원에서 보여준 젊은 세대의 에너지는 모든 상황을 변화시켰다. 한때 얼굴이 노랗게 변할 정도로 놀랐던 어른들은 계기적인 에너지의 분출에서 안도감을 얻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에 놓인 골이 메워지고 있다는 안도감이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결합은 다소 기이하다. 비록 계기적이기는 하지만, 민족과 국가에 대한 열망은 복잡한 코드를 가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시기에 가방에 태극기 장식물을 달고, 월드컵 때 태극기를 두르고 나오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서사를 가진 영상에 열광하는 것을 단순히 태극기를 패션의 소재로 활용한 것이거나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인공에 대한 열망이었다고 해석할 순 없다. 어쩌면 불안정한 개인주의화 과정에서 개인주의 윤리의 부재 공간이 문제였고, 그 부재 공간을 기존 질서의 레퍼토리로 채우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여전히 학교와 가정의 억압이 강한 상황에서 일탈의 욕망이 민족주의 코드의 이름을 빌려 분출된 것은 아니었을까? 젊은 세대조차 자유롭지 못한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 풍토는 ‘쏠림’ 현상의 토대가 되었다.

높은 인권 감수성과 낮은 정치 의식의 충돌

아마도 젊은 세대는 과거 역사의 기억이 중요하지 않은 첫 세대일 것이다. 젊은 세대는 식민지, 한국전쟁, 군사독재, 광주 등의 경험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역사’보다는 돌출되는 ‘정보’가 중요하다. 국면적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내용에 따라 민족주의 코드에 존재하는 반미를 외칠 수 있고, 또 반공주의 코드에 있는 반북을 외칠 수도 있다. 이 특성은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대한민국주의’에 가까울 수 있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주의’를 상징하는 복잡한 기호이다. 태극기는 해외연수와 인터넷을 누비면서 형성되는 국가적 자존감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개인 주체가 민족과 국가에 속한다는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존재 불안을 해소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구조적 딜레마를 개인적 딜레마로 환원하도록 연습돼온 세대가 존재 불안을 국가적 상징을 통해서 해소하는 것은 확실히 아이러니하다.

나는 촛불시위와 월드컵을 통해 광장을 놀이의 공간으로 전환시켰다든지, 공적 영역에 개인 욕망의 문제를 투사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또 느슨한 정서적 연대를 통해 개인의 공간을 열어놓은 채 에너지와 열기를 분출하는 현상 역시 새로운 흐름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아마도 정치 민주주의에 뒤이은 문화 민주주의의 흐름 속에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놀이와 연대의 소재가 왜 민족과 국가이고 태극기일 수밖에 없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느낄 뿐이다. 여전히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라는 작은 주체와 국가라는 큰 주체 사이에 부재하는 연대의 형식과 내용일 듯하다.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화를 통해 형성된 감수성의 연장성에서 개인의 권리에 민감하다. 하지만 집단으로서 권리에는 점점 무감해지고 있다. 높은 인권 감수성과 낮은 정치 의식의 충돌은 태극기 세대를 규정짓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권리 주장이 생존을 위한 방어라는 측면에서 제한되어 사회적 공감과 연대 능력의 발전으로 드러나지 못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 중간 영역의 공백이 여전히 문제이고, 작은 주체들의 연대와 공감을 통해 매개 영역을 설정하지 못하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민사회의 영역, 생활세계의 영역에서 개인 상호의 의사소통 능력과 문제 해결력이 증진되지 못할 때, 개인의 권리 주장은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국지적인 보편성을 갖는 상호 소통의 시민성을 활성화할 수 있는 제도와 활동이 촉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 사고가 달라져야 하고, 언어가 달라져야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문화적 민주주의로의 전망 속에서 배제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는 ‘자율성의 기획’이 핵심적이다.

‘자율성의 기획’을 생각하라

시민성을 규범적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작은 주체 사이의 연대와 공감이라는 테마는 시민적 권리의 확장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연대와 공감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불안정한 동거는 사회적 지지 시스템의 부재라는 환경 속에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내재한 위험성을 곧 전면화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저성장이 시대 경향이라고 할 때 그 위험성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존재 근거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집단주의 코드의 발흥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은 집단주의를 넘어 개인과 욕망을 재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개인주의의 윤리를 확보하는 것은 다름과 차이, 다양성과 다중성을 인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고 하위 주체들을 억압하는 집단주의적 코드의 위험을 넘어서는 것은 필수적이다. 작은 주체들 사이에 ‘자율성의 기획’과 ‘연대의 기획’을 마련하는 것은 ‘고용 없는 성장’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시민적 과제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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