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원대회 폭력 부른 노동계 핵심 쟁점… 비정규직 문제를 ‘진정한 과제’로 취급한다면 교섭에 응해야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사업장 규모별 임금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노동조합이 잇따라 결성·인정된 이후부터 노동자 내부의 임금 격차가 오히려 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표 참조). 노동부 <매월노동통계조사>를 보면 500명 이상 사업체 1인당 월평균 임금총액을 100이라고 할 때 30∼99명 사업체는 1990년 77.2%에서 2003년 65.9%로 하락했고, 10∼29명 사업체는 74.1%에서 59.4%로, 5∼9명 사업체는 1999년 59%에서 2003년 50.7%로 떨어지는 등 임금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대공장노조가 분배 위주의 임금 교섭에만 조합원의 투쟁 동력을 동원하면서 중소영세 사업장과의 임금 차이가 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임금 격차로 상징되는 노동시장 ‘분단’은 노동조합운동이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 중 하나다.
교섭이냐 투쟁이냐
비정규직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노조의 잇단 파업 패배와 교섭력 약화는 노동시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 노동자간의 노동조건 격차가 커지면서 사회적 저항에 부닥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업별 노조 체계에서 노조가 제기하는 비정규직 문제는 본질적으로 자신들의 직접적인 이해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노조의 ‘진정한 과제’로 등장하기 어렵다.
이처럼 비정규직 문제든 임금 격차든 현행 기업별 노조 체계에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비정규직 문제는 기업 수준을 넘어선 차별의 문제고, 사업장별 임금 격차 역시 기업별 단체협약의 한계 속에서는 줄이기 어렵다. 노동조합 활동이 1년 내내 온통 단체교섭에 집중되는데, 오직 정규직 조합원의 실리를 챙겨주는 활동에만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요즘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는 민주노총 내부의 ‘사회적 교섭’ 참여론은 이런 맥락에서 제기되고 있다. 조직된 노동자의 이익뿐 아니라 사회적 이슈까지 포괄하려면 노동조합의 교섭 구조가 개별 기업 단위를 넘어 사회적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참여를 둘러싼 논쟁은 1998년 2월6일 노·사·정 대타협 이후 민주노총 내부 갈등의 일상적 진원지였다.
2004년 1월 사회적 교섭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대의원대회를 통해 사회적 교섭 참가를 추진하고 있다. 폭력 사태 등으로 두 차례 표결이 무산됐지만 민주노총은 오는 22일 임시대의원회를 열어 또다시 사회적 교섭안을 안건으로 상정하기로 했다. 민주노총 안에서는 실제로 표결에 들어가면 찬성표가 더 많아 사회적 교섭 참여안이 가결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2월1일 대의원대회에서 사회적 교섭에 반대하는 대의원들은 “우리의 힘이 크다면 교섭을 구걸할 필요가 없다. 철도·지하철을 세우면 정부와 사용자가 쫓아와서 교섭하자고 달려들 것이다”라거나 “고양이 목에 방울 달고 노사정위에 들어갔다가 방울만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또 “우리는 장관도 만나고 국회의원을 협박도 해서 노동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투쟁이 부족하니까 ‘만주노총’이니 (금속산업연맹에 대해) ‘양철산업연맹’이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며 시급한 건 교섭이 아니라 ‘투쟁’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수호 집행부의 사회적 교섭 방침이 백기 투항을 뜻하는 건 아니다. 이수호 위원장도 “투쟁과 교섭을 병행하겠다는 것이지 안 싸우겠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줄곧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이수호 집행부가 일단 노사정위에 들어가 쟁점을 만들어낸 뒤, 사회적 합의가 안 되면 이를 모두 모아서 내년 봄에 전선을 쳐 한판 큰 싸움을 벌이는 구상을 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싸움의 명분을 쥐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교섭에 참여해야 한다는 이른바 ‘전술적 참가론’이다.
주변부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 몸을 던지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사회적 교섭에 나서기로 방침을 정한 배경이 전술적 참여든 뭐든 간에 대공장 정규직노조 중심의 노동조합운동을 탈피해 비정규직 등을 위한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려면 사회적 교섭이 필요하다. 조직노동자들의 편협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 ‘바닥을 끌어올리는 싸움’을 하려면 노동운동이 사회·경제적 정책 결정에 직접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김태현 정책기획실장은 “투쟁과 교섭은 양날의 칼인데, 낮은 조직률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한계 속에서 양극화와 빈부 격차를 해소하려면 사회적 교섭을 활용해 노동계의 요구를 관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공장 중심의 경제주의 투쟁이 한계에 봉착하고 노동조합의 고립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파업을 전제로 한 벼랑 끝 협상’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는 없다. 특히 고삐 풀린 시장의 자유가 판치고, 구조조정과 노동시장의 유연화 압력이 더욱 커지면서 사회적 대화를 통해 전국적 수준에서 노동시장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현재 비정규직·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은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노조로부터도 소외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개별적으로 몸을 던져 저항하는 분신 사태가 잇따르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주희 연구위원은 “노동조합이 조직률 10%로 대표성이 취약한데, 바깥의 조직되지 못한 노동인구 전반을 책임감 있게 대변하려면 사회적 교섭에 나서야 한다”며 “노동운동 세력이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이 아니라 타협과 양보를 전략적으로 유연하게 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 단위 정규직 조합원의 협소한 이해와 요구를 넘어서 절대 다수 노동자들을 위한 ‘의제’를 갖고 교섭하려면 사회적 교섭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교섭에 반대하는 쪽은 “1998년 정리해고 합의의 쓰라린 추억을 벌써 잊었느냐? 노동계가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손해만 보는 게임이 될 게 빤하다”며 오히려 전투적 투쟁을 강화하는 것이 ‘비정규직을 위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2월1일 대의원대회에서 한 대의원은 “비정규직 싸움을 한다고 1998년 이후 해마다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대공장노조 중에서 제대로 파업을 조직한 개별 노조가 과연 몇이나 되느냐?”고 물었다. 총파업 투쟁을 경쟁적으로 외쳐댔지만 실제로 비정규직을 위한 파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노조 지도부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형국이 지속됐다는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연구위원은 “노동조합이 힘이 있어야 하는 건 맞지만 정말로 어려울 때 힘으로 풀어야 하는데, 한국 노동운동은 투쟁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며 “전투성만 강조할 경우 전투력이 꺾이면 노동조합의 힘은 치명적으로 약화된다”고 말했다.
‘기득권’이 발목을 잡는 것인가
물론 정부가 노동계를 포위한 채 “판을 벌여놨으니 들어올 테면 오고 말라면 말라”는 투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면 사회적 교섭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도 있다. 한신대 노중기 교수는 “노동운동이 전국적 수준의 정책 결정에 참가하는 것 자체를 거부할 이유가 없지만, 노무현 정부가 경제에 올인하면서 일자리도 비정규직 중심으로 확대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한 노사정위에 들어가면 노동계가 빼앗기기만 할 뿐이고, 노동쪽의 투쟁력 없이 오직 협상 테이블 위에서 노동자한테 유리한 합의가 만들어진 적이 한번도 없다”며 ‘현실적 조건’을 들어 사회적 교섭 참가를 반대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드라이브를 거는 통로로 노사정위가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다.
그러나 경남대 임영일 교수는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이 비정규직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 없는 구조이고, 기업별 교섭 체제에서 비정규직이 교섭할 틀도 없으므로 사회적 교섭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사회적 교섭이 본격화되면 향후 노사 관계가 재편돼 기업 단위 현장 노조의 힘이 총연맹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교섭 구조가 기업별에서 사회적 교섭으로 바뀌면 대공장노조의 활동 범위와 단체협상 안건이 대폭 줄어들 수 있는데, 이런 ‘기득권 축소’ 우려가 사회적 교섭 반대론의 진짜 이유일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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