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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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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2 - 혼분식] 쌀 먹으면 대뇌변질증?

등록 2005-02-03 00:00 수정 2020-05-03 04:24

혼분식 장려 정책의 기억을 찾아서…점심시간마다 숨바꼭질 벌어진 학교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모여앉아 꽁당보리밥/ 꿀보다도 더 맛좋은 꽁당보리밥/ 보리밥 먹은 사람 신체 건강해.”

이 앙증맞은 노래를 아는가. ‘혼분식의 노래’는 19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방방곡곡 학교마다 울려퍼진 ‘건전가요’다. 상상력 넘치는 겨레의 청소년들은 마지막 소절을 “보리밥 먹는 사람 방귀 잘 뀌네”로 개작해 부르기도 하고 고무줄 놀이의 반주로 활용하기도 했다.

쌀밥 팔다가 영업정지 당해

그 시절 학교로 들어가보자. 정부가 지시한 30% 이상의 혼식을 지키지 않는 학생들은 반성문과 화장실 청소라는 ‘실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쌀밥을 싸온 학생들은 친구의 보리밥알을 얻어 쌀밥 위에 붙이는 손재주를 부렸다. 그러나 늘 뛰는 학생 위에는 나는 선생님이 있는 법. 점심시간마다 심증이 가거나 ‘상습범’인 학생들의 도시락을 숟가락으로 파보는 의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인터넷 블로그에 실려 있는 어느 중년의 회고는 더욱 절절하다. “누나가 소풍 가느라고 김밥을 쌌는데 어머니는 그냥 내 도시락에도 김밥을 넣어줬다. 그러나 잡곡을 30% 이상 섞은 김밥이란 순간접착제를 쓰지 않는 한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어머니는 그 바쁜 와중에 보리를 따로 쪄서 김밥 겉에다 몇알씩 ‘붙여’주셨지만 담임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혼식은 여러 가지 잡곡을 쌀에 섞어 만든 밥을 말하며 분식은 곡식의 가루로 만든 음식, 즉 밀가루 음식을 말한다. 1964년 1월 농수산부는 모든 음식점에 대해 25% 이상의 보리쌀이나 면류를 혼합해 팔고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은 ‘혼분식의 날’로 정해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박정희 정권의 혼분식 장려정책이 화려한 막을 올린 것이다. 그 추진 방식이 얼마나 ‘박정희식’이었는지는 1975년 서울시의 혼분식 위반업소 실적이 말해준다. 당시 서울시는 1336개 업소를 적발, 8개소는 허가 취소, 691개소는 1개월 영업정지, 637개소는 고발 조치했다. ‘밥’ 팔다가 장사 문 닫은 격이다.

혼분식 장려는 당시의 암울한 식량 사정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5년부터 식량증산 7개년 계획을 수립했으나 극심한 흉작까지 겹쳐 쌀 자급률이 나아지지 않자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식탁을 통제하겠다는 지극히 ‘새마을운동’적인 발상을 하기에 이른다.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통일벼가 전국의 논이란 논에 반강제적으로 심어지고 마침내 쌀 자급을 이룬 77년 이후에도 한동안 혼분식 장려가 계속됐다. 모든 통제가 그러하듯 혼분식은 점점 권력의 규율 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는데, 근면검소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의 필요조건으로 변신한 것이다. 청와대에서 보리밥을 먹었는지는 확인할 길 없으나 혼분식의 날 때문에 공무원들은 눈치를 꽤나 봐야 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공직자 골프 금지’ 같은 형태라, 시골에서 부모님이 올라와도 자장면을 대접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라면이 주식으로 떠오르다

쌀의 대체재는 뭐니뭐니 해도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였다. 이때부터 한국인의 밥상에 ‘건강식품’의 탈을 쓴 밀가루 음식들이 주식으로 올라오기 시작했으니, 라면도 예외가 아니다. 초기의 삼양라면은 너무 싱겁고 느끼했기 때문에 외면을 받았으나 혼분식 장려 정책이 나오면서 제2의 주식으로 자리잡았고, 군인들의 배식에도 끼어들었다.

이러한 혼분식 정책의 홍보에는 ‘과학’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1975년에 펴낸 초등학교 실과 교사용 지도에서는 “흰쌀 편식은 체질의 산성화를 초래하고 대뇌 변질증을 일으켜 판단력이 흐려지고 지능이 저하될 우려가 높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이 무시무시한 ‘독소’를 지금은 못 먹여서 난리니, 혼분식의 흥망성쇠는 과학자보다는 사회학자의 연구대상일 듯싶다. 혼분식은 ‘식탁 위에서 자행된 근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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