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 과를 가늠하기 힘든 시대… 성장 뒷면의 부작용을 무시하는 단선적인 견해는 위험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둘러싼 갖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집권 18년 동안의 경제적 성과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평이 많은 편이다. ‘압축성장’으로 요약되는 박정희 시대의 성장은 독재 정치의 짙은 그늘을 희석하는 효과까지 거두며 ‘박정희 향수’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의 객관적인 성장 실적이 불황을 겪고 있는 지금의 경제 현실과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인 듯하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층은 물론 진보학계 일각에서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통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까지 여기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적어도 양적인 성장만을 놓고 볼 때 박 전 대통령 집권 동안의 경제 성적은 가히 경이적이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8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 1636달러로 20배로 불어났다. 수출은 4천만달러에서 150억달러로 급상승했다. 이 기간 한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9.3%에 이르렀다.
이런 실적은 국제적으로 비교해보더라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제민 연세대 교수는 <한국 경제 성장사>(서울대 출판부)에 담긴 논문 ‘한국의 산업화와 산업화 정책’에서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이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고, 북한의 예에서 보듯 한국도 최빈국의 하나로 떨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고도 성장은 ‘기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라며 “한국의 성장은 그 율과 기간에서 유례없는 ‘대질주’(great spurt)였다”고 밝혔다.
경이적인 성장률은 국민의 업적?
이 교수는 논문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 초 1차 대전 전야에 이르기까지 1인당 국내총생산 증가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미국과 캐나다였는데, 2% 안팎에 그쳤다고 밝혔다. 또 1차 대전 전야로부터 1·2차 대전, 대공황 등이 끼어 있던 1913~50년까지 주요국 중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 증가율이 가장 높았으나 2%에 미달했다고 한다. 1950년 1인당 국내총생산 8.0% 증가 등 1950~70년대에 고도 성장을 경험한 일본의 경우 1955년까지는 전쟁 이전 수준의 회복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지속 기간에서 한국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 교수는 평가했다.
여기서 늘 논란이 되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를 오롯이 ‘박정희 개인’의 업적으로 돌리는 게 합당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잘해서 경제가 잘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지도자의 역량과 국민의 역량을 혼동하는 것”이라며 “국민의 역량과 시대적 요구에 의해 지도자의 역량이 발휘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흔히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예를 들어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만, 한국은 필리핀과 달리 우수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좋은 바탕을 깔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국제적인 역학 구도로 중동 특수를 누릴 수 있었고,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는 데 유리했다는 외부 여건을 무시할 수 없다고 김 교수는 진단한다. 따라서 1960, 70년대에 한국이 이룬 경제적 성과에서 박 전 대통령의 공은 제한적이라는 주장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이 시대 상황을 잘 이용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연 10% 안팎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모두 그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값싼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고, 집권 초창기 방위비 부담이 크지 않았으며, 1960~80년대에 걸쳐 미국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린 데 따라 반사이익을 볼 수 있었다는 객관적인 여건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 경제정책의 상징인 ‘경제개발계획’이 실상 5·16 쿠데타 이전인 2공화국 시절에 세워졌다는 점도 박 전 대통령 개인의 공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대목이다.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이를 추진할 경제기획원 설립 구상도 2공화국 때 이미 마련돼 있었다.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이와 관련해 “경제개발계획과 기획원 설립 구상이 2공화국에서 준비돼 있었다곤 해도 박 전 대통령처럼 뚝심 있고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5·16 쿠데타 이전 민주당은 신·구파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만큼 국력을 경제개발에 집중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다. 임 위원은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데 따른 정통성 부족을 경제적 성과로 메우기 위해 경제개발에 매진함으로써 강한 추진력을 발휘했다”며 “(개발독재에 따른 갖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공6 과4’로 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출 진흥·중화학 육성은 잘했다"
임 위원은 경제정책의 큰 방향을 수출 진흥으로 잡은 데 대해서도 후한 점수를 주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세계시장이 급속하게 통합되는 때여서 나라 밖의 수요를 적극 활용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해외에서 수출로 승부를 걸게 하고 잘하는 쪽에 지원을 더 해주는 유인체계는 국내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과 비교해 정경유착이나 시장 왜곡의 가능성을 낮출 수 있는 방안이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비교우위를 보이던 상황에서 수출에 집중한 것은 관련 분야 노동자들한테도 비교적 이로움을 안겨주었다. 당시 전체적으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960, 70년대에 이룬 경제적 성과의 상당 부분은 박 전 대통령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평가인 셈이다.
이제민 교수도 “박정희 정부가 타깃(목표)으로 삼은 중화학산업이 실제로 국제경쟁력을 갖추게 된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정부가 나서 집중 육성한 산업이 실제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국제적으로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덧붙였다. 옛 소련은 실패하고 말았으며 일본의 경우도 정작 정부 차원에서 육성한 산업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은 박정희 시대의 경이적인 양적 성장은 정경유착, 각 부문의 불균형 성장, 관치금융 등 어두운 구석을 배경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60, 70년대의 경제적 성과에서 차지하는 박 전 대통령의 기여도와 함께 또 하나의 커다란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양적 성장이 세계 경제사적으로도 괄목할 만했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을 고려하면 총점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독재를 했지만, 그래도 경제는 잘하지 않았느냐’식의 ‘박정희 신화’는 설 땅을 잃게 된다.
문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 총점’을 똑 떨어지게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박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크기가 확연하게 달리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순전히 경제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경제 철학과 가치관의 문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적 사안이어서 경제 총점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중화학 육성책 ‘마이너스 결산’이 주는 교훈
다만, 한 가지 실마리로 삼을 수는 있을 법한 연구 결과가 제시돼 있어 흥미를 끈다. 이제민 교수가 몇 군데 학회에서 밝힌 영문 보고서 ‘An Empirical Test of Industrial Targeting: The Case of Korea’가 그것이다.
이 교수는 보고서를 통해 1970~2003년 기간을 대상으로 박정희 정권 경제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중화학산업 육성 정책’의 ‘비용-편익’을 계량화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산업이 한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게 편익이라면, 국내 자동차산업 보호 정책 탓에 소비자들이 국제가격보다 몇배나 높은 값을 지불한 것은 비용이다. 자동차 업체에 금융·조세 지원을 해준 것도 국민경제에 비용을 준 항목들이다. 이 교수는 이런 비용과 편익을 분석한 끝에 “비용이 편익을 초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렇다고 이를 ‘박정희 모델’의 실패로 곧바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 연구자와 가정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중화학 육성책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결과를 경제정책 전반의 평가로 갈음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독재는 했지만, 경제는 잘했다’는 식의 단선적인 견해는 적절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증 사례로 삼을 수는 있다.
이 교수의 분석과 달리 ‘박정희식 경제개발’의 총점이 플러스(+)라는 계량 분석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박정희 모델이 오늘의 경제 문제를 푸는 유용한 해법이나 대안인 양 여기는 태도는 온당치 않다. 경제 규모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을 뿐 아니라 정부가 자본을 완벽에 가깝게 통제할 수 있던 시기의 틀이 지금에 와서도 통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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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에 경제정책을 주도한 자리는 경제부총리였다. 박 전 대통령 시절 경제부총리는 예산권을 쥔데다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부처 장관들을 압도했다. 부총리 재임 기간이 3년을 넘은 예가 드물지 않았던 데서도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청와대 경제수석의 힘이 경제부총리보다 셌던 전두환 정권 때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경제부총리제가 생긴 것은 박 전 대통령 집권 초기인 1964년 5월이었다. 초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한국일보사 창업주인 장기영씨였다. 1967년 10월까지 부총리로 재직한 장씨는 김학렬 전 부총리(1969년 6월~72년 10월 재임)와 함께 박정희식 경제 모델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고 포항제철과 비료 공장을 지은 게 이 시기였다.
박 전 대통령 집권 후반기의 경제정책을 앞장서 이끈 이는 남덕우 전 총리였다. 남 전 총리는 1974년 9월~78년 12월까지 경제부총리로 재직하며 중화학공업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폈다. 남 전 총리는 1960년대 서강대 교수를 거쳐 재무부 장관, 경제부총리를 지낸 뒤 전두환 정권 초기 국무총리로 일했다. ‘성장 우선론’을 주창하는 ‘서강학파’가 그에게서 비롯됐다.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남 전 총리는 지난해 12월17일 국회 토론회에서 서강학파의 맞수인 ‘학현학파’의 변형윤 전 서울대 교수와 특강 대결을 벌이는 등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박정희 시대 경제정책의 상징인 중화학공업 육성에서는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2수석의 역할도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 전 수석은 옛 상공부 관료를 거쳐 1971년부터 박정희 정권 종말 때까지 대통령 경제2수석으로 일했다. 1974년부터 79년까지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을 겸임했던 데서도 그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오 전 수석은 현재 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 고문으로 있다.
‘불도저’로 불렸던 김현옥 전 내무부 장관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김 전 장관은 1966년 3월부터 70년 4월까지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며 지금 서울의 골격을 이루는 각종 공사를 벌였다.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청계고가도로, 남산터널 공사가 이때 이뤄졌다. 한강개발, 여의도개발, 강남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곳곳에서 일으켜 서울시의 모습을 바꿨던 그는 자신의 작품인 와우아파트가 붕괴한 사건으로 물러나는 불명예를 기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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