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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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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잔은 넘쳐 흐른다

등록 2004-12-23 00:00 수정 2020-05-03 04:23

90년대 후반부터 전개된 청소년 저항과 강의석군… 우리 교육제도의 위기를 위기라고 말하라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변증법에는 ‘양질전화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얘기인데, 예를 들어 어떤 체제가 저항의 양을 감당할 수 없을 때 다른 체제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물리학에는 임계점이라는 것이 있다. 쉽게 얘기하면 밀폐된 용기에 물을 넣고 가열했을 때 물과 수증기의 경계가 사라져버리는 순간의 온도를 말한다. 양질전화의 순간, 임계점의 온도. 이것은 지금 우리의 교육 체제가 서 있는 곳을 가리킨다.

인터넷을 거점으로 생겨난 모임들

대한민국의 근대적 교육 체제는 다른 많은 제도들처럼 일제가 닦아놓고 유신시대가 확립했다. 이 시대부터 ‘시민’은 없고 ‘국민’만 있으며, ‘청소년’은 없고 ‘학생’만 있었다. 압축성장 시대에는 공산품처럼 학생을 찍어내야 했고, 이들이 곧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일류대학을 향한 경쟁은 오랫동안 국가, 학교, 학생, 학부모 모두가 참여한 공모였다. 그런데 약 10년 전부터 이 거대한 공모에서 학생이 점점 떨어져나오고 있다. ‘위기’의 징후인 것이다.

대규모의 학생 저항은 1980년대 전교조가 탄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청소년들은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하여 강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 폐지, 전교조 탄압 철폐 등을 외쳤다. 그러나 이 운동은 서구의 68혁명처럼 청소년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인권을 내걸었다기보다는 ‘참교육’의 선언에 머물렀다. 더구나 첫 저항에 부딪힌 학교는 더욱 폐쇄적으로 변했다. 본격적인 저항은 90년대 후반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인터넷으로 무장하고 소비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첫 세대는 자신의 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학교를 재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은 변했고 학교는 변하지 않았다. 이 괴리로부터 다양한 저항, 반항, 도피가 생겨나게 된다. 청소년 인권의 교본처럼 읽히는 (우리교육 펴냄)의 지은이 배경내(33)씨는 최우주씨를 90년대 저항의 신호탄으로 본다. 1995년 강원도 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최우주씨는 하이텔 토론장에 강제적인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결국 헌법소원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갈증을 느끼던 청소년들이 너도나도 토론에 뛰어들며 ‘중고등학생복지회’를 결성했다. 통신망에 거점을 둔 이 모임은 강압적 자율학습에 대한 비판여론을 확산시키면서 1998년에 ‘학생인권선언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자발적 청소년 인권모임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2000년 12월 결성된 ‘인권과 교육개혁을 위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두발제한 등 학교 안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인권침해를 공론화했다. ‘18세 선거권 낮추기 청소년연대’ 등 특정 사안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는 단체들도 생겨났다. 자발적 저항은 외부 활동가들과 연결되기도 한다.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은 20대 간사들과 함께 ‘청소년 열린학교’를 열고 네이스 반대서명을 펼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을 통한 참여는 모든 저항의 기본이다. 1999년 ‘10대들에 의한 10대 커뮤니티 포털사이트’를 선언하며 출발한 ‘아이두’(www.idoo.net)는 설립 당시 운영진이 모두 10대였으며, 청소년 인권 문제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이끌어왔다. 이들은 닫힌 교문 앞에서 어깨를 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소송 제기, 촛불·1인 시위, 인터넷 서명 등 다양한 저항의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탈학교와 교실 붕괴의 거센 바람

학교 안에서 개인적 저항을 택하는 청소년들도 늘어가고 있다. 이들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1999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김나영(22)씨는 강제 보충수업을 거부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학교 전체로부터 ‘왕따’가 됐다. 허성혜(20)씨는 지난해 학교에 대한 비판글을 서울시 교육청 게시판에 올렸다가 퇴학 처분까지 받았으나 법정싸움에서 이겨 복학했다. 최근 강의석씨에 이르기까지 이런 사례들은 끊이지 않는다.

저항만이 위기의 징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는 (또 하나의 문화 펴냄)에서 “1995년 학업 중퇴자들을 연구하던 나는 아주 새로운 유형의 자퇴생이 늘어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한 아이들, 학교가 더 이상 몸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아이들이다. “몇년 전만 해도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에게 주어진 선택은 오로지 검정고시를 보거나 서태지처럼 성공한 연예인이 되는 것 외에는 거리의 ‘막가파’가 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에겐 선택이 많아졌다. 손쉽게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고, 새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에 다니다가 인터넷 벤처 회사에 뛰어들 수도 있고….” 게다가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나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대안학교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이들은 ‘자퇴생’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는 이름을 거부하고 ‘탈학교생’으로 스스로의 주체성을 규정짓기에 이른다. 또한 예전처럼 부모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유학가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것도 ‘침몰하는 배에서 뛰어내리기’로 볼 수 있다.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를 혐오하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1999년부터 ‘교실 붕괴론’이 떠돌기 시작했다.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이 교실을 채우고 있다. ‘왕따’니 ‘일진’이니 하는 흉흉한 단어들이 교실을 돌아다닌다. 학원선생처럼 잘 가르치느냐가 교사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이 모든 현상들이 ‘위기’를 외치고 있다. 위기를 위기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손에서 위기는 증폭된다.

강의석군의 투쟁은 9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 저항의 지평을 넓힌 사건이었다. 배경내씨는 “학교 밖이 아니라 학교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징계와 위협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버텼다”는 점에서 강의석군이 차별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부분적으로 학교 안에서 교칙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이 있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학교 밖에서 모임을 조직하고 저항한다. 강의석군은 문제를 학교 내부로 끌어들여와 끝장을 볼 때까지 밀고 나갔다. 학교 안에서 저항하는 학생은 무수한 절충이나 포기의 유혹에 시달리고 대부분 굴복하게 되는데, 강의석군은 ‘단식’으로 자신의 굳은 의지를 알렸다. ‘하자’ 작업장학교 교장 박복선씨는 “중등교육에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감춰져 있던 종교의 자유라는 문제를 널리 알린 점, 사립학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로 강의석군을 평가한다.

강의석군이 승리했다고?

‘아이두’ 운영자 이준행(20)씨는 “청소년들이 저항의 수단으로 점차 미디어를 주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가능성을 강의석군이 보여줬다는 얘기다. 청소년들은 온라인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조직하고, 기성 미디어의 협조를 구하는 방법을 깨달아가고 있다. “청소년 저항이 앞으로는 개인보다는 공동 활동으로 나갈 것이다. 언론에 많이 알려지진 않았으나 ‘아이두’에 가입한 미션 스쿨에 다니는 친구들, 특히 여학생들은 강의석군의 투쟁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렇게 잠재돼 있는 여러 가지 의식들이 매체가 열리면 많이 쏟아져나오지 않을까.” 이씨는 기성 언론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초점을 자꾸 강의석군 개인의 성공에 맞추지 말라는 지적이다. 문제의 본질은 놔두고 그가 며칠을 굶었더라,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더라만 떠들 필요가 있을까. “언론은 마치 강군이 승리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이건 승리가 아니다”라는 이씨의 매서운 지적에 귀기울일 때다.

그러므로, 강의석군은 ‘영웅’이 아니다. 그는 잔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일 뿐이다. 다시, 문제는 “이 낡은 잔을 언제, 어떤 잔으로 바꿔야 하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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