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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피말리기’는 계속된다

등록 2004-11-11 00:00 수정 2020-05-03 04:23

공화당 정권 압승으로 북한 붕괴 유도 정책 강화될 듯…대북 압박수단인 6자회담 고수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미국 대선이 부시 공화당 정권의 압승으로 끝났다.

상·하원도 공화당이 싹쓸이했다. 이에 따라 부시 정권이 앞으로 4년간 어떤 외교정책을 펼지 온갖 시나리오들이 춤을 추고 있다. 당장 북한 핵 문제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 부시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극우적 정책에 대해 국민의 위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무것도 거칠 게 없어 보인다. 우선 부시는 이라크 테러조직 평정에 힘을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라크 저항세력의 본거지인 팔루자에 맹폭을 가하고 있다. 바야흐로 테러조직 박멸을 알리는 신호탄이 쏘아올려진 셈이다. 내년 1월 이라크 정부 선거 이전까지 기선을 확실히 잡겠다는 게 미국의 목표다. 이라크를 바라보는 이란과 북한은 사형장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죄수와 비슷해 보인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대체로 미국이 북한에 대해 섣불리 군사행동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는 듯하다. 이라크 전쟁은 부시에게 힘의 한계를 절감하게 만들었고, 1천명이 넘는 미군 희생자가 생겼을 뿐 아니라, 한국·중국 등 주변국들이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심지어 북한이 핵과 미사일 발사 실험 등을 해도 군사행동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까지 이어진다.

작전계획5030은 무엇인가

과연 그럴까. 상당수 국내 전문가들도 미국이 북핵 문제를 이라크처럼 선제공격으로 해결하려는 선택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선 북한 핵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모르는데다 외과수술식 공격이 전면전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라크와 달리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한과 중국 등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는 곧 미국의 국익 손상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북한에는 이라크처럼 무진장한 석유자원도 없는데다, 북한 체제 붕괴 이후 동북아 세력 균형이 흔들릴 경우 군사·외교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 남한 내 진보세력의 반미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면서 더는 주한미군을 묶어둘 수 없는 상황까지 맞닥뜨릴 수 있다. 게다가 중국과의 정면 승부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북한 선제공격은 아무리 물불 안 가리는 호전적인 지도자 부시라 해도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과제다.

그렇다고 북한의 핵 보유를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는 처지다. 선거 때 시달렸던 것처럼 북한 핵부터 해결하라는 여론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은 무엇일까. 미국통으로 잘 알려진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아마 군사적 행동보다 북한에게 더 괴로운 일은 미국이 공격할듯 말듯 하면서 시간을 질질 끄는 작전일 것”이라고 말했다. 속된 말로 ‘피 말리기 작전’인 셈이다. 상대방을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긴장을 최고조로 높여 제풀에 나가떨어지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선제공격을 유도해 정당방위 명분으로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하는 고도의 심리전 성격이 강한 전략이다. 이럴 경우 주변국들이 미국에 비판의 화살을 쏠 수 없는데다가, 오히려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 목표를 달성했을 경우 박수까지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북한이 맹비난하고 있는 미국의 적대정책은 체제 붕괴 전략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수단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붕괴 촉진 정책은 경제 제재의 강도를 서서히 높여 경제 봉쇄에까지 이르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끊임없이 주변에 군비를 증강해 직·간접적인 위협을 가함으로써 북한이 가뜩이나 부족한 국가자원을 막대한 군사비에 쏟게 만듦으로써 서서히 무너지길 기다린다. 이처럼 북한을 극도로 자극하는 저강도 전쟁 도발 위협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것이 미국의 이른바 ‘작전계획 5030’이다. 북한 지도부가 가장 소름이 끼치도록 두려워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북한이 남북 대화 중단 이유 중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 한국 정부의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인 ‘충무계획’이 언론에 공개되자 발끈한 것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셈이다. 이는 북한 지도부가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불신을 곱빼기로 만든 결정타이기도 하다. 사실 충무계획은 김영삼 정권 때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불거진 북한 조기붕괴론 목소리에 편승해 만들어진 비상계획이다. 하지만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핵심 관계자조차 이런 계획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모를 정도로 장롱 속에 깊이 쑤셔넣고 있었던 낡은 계획이다. 노무현 정부가 김영삼 정권처럼 북한의 조기 붕괴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비상계획은 장롱이 아닌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책상 안에 늘 보관돼 있었을 것이다. 즉, 미국의 작전계획 5030과는 전혀 무관한 문건인 셈이다.

소련도 무너뜨렸는데…

미국의 강경파들은 사회주의 제국이었던 옛 소련도 미국의 이같은 저강도 전쟁 계획에 따라 맥없이 무너졌다고 확신하고 있다. 더구나 당시 레이건 행정부 때 옛 소련 붕괴에 앞장섰던 인사들은 지금 부시 행정부의 고위직을 형성하고 있다. 북한은 옛 소련에 견줘 비교가 안 될 만큼 작은 사회주의 나라다. 강경 매파들은 북한 적대정책을 끊임없이 추진하면 결국 북한도 소련처럼 서서히 변질되면서 붕괴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군사적 충돌 없는 승리를 고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북한과 화해하고 협력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 보인다. 더구나 이들은 북한의 시장경제 요소 도입 등 자본주의적 변화가 지속적인 압박정책의 결과로 본다. 북한을 포용했다면 오히려 지금과 같은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북한 내 다양한 경제개혁과 부작용들은 어쩌면 미국의 강경파들이 목매어 기다려온 사회주의 변질의 징후인지도 모른다.

부시는 재선 확정 직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내 길을 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리고 “나는 이번 선거를 통해서 정치적 자산(political capital)을 얻었으며 그걸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유권자들로부터 이라크 침공 등 테러와의 전쟁 같은 극우적 정책들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라는 위임을 받은 것으로 해석하고, 강행 의사를 재천명했다. 그는 “세계의 일부분에 자유사회 건설을 촉진하려 시도하는 건 시간 낭비라는 일부의 태도가 있지만, 결코 동의할 수 없다”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의 정당성을 강변했다. 그러면서 이런 전쟁을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라고 포장을 한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과 9·11 테러와의 연관성은 아직까지 아무것도 드러난 바가 없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 이제 자유와 민주주의가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여질 것임을 예고한다. 그는 “자유가 사람의 습관을 변화시키는 힘을 믿는 게 내 외교정책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미국을 장기적으로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독재와 테러의 대안으로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장려하겠다”는 향후 부시 행정부 4년의 대외정책 방향을 가늠케 한다.

‘평화적 해결’이란 핵포기와 굴복

물론 이런 정책 기조는 북한을 그대로 관통할 것이다. 당장 최근에 발효된 ‘북한인권법안’은 그 첫 신호탄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미국은 자본주의적 개혁·개방을 추진하지 않는 나라와는 수교를 맺은 역사가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 초반 닉슨 행정부가 중국과 타협하기 시작했지만 기다렸다가 덩샤오핑이 본격적인 개혁·개방 노선을 결정했을 때 비로소 관계 정상화를 마무리했다. 북한을 겨냥한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훈련을 비롯해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의 가속화, 한반도 주한미군의 전력 증강 등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북한 해방과 자유화 정책이 더욱 강화될 것임을 예고한다.

부시 행정부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성경처럼 되뇌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듯하다. 미국의 핵심 전략가들이 생각하는 평화적 해결은 전쟁을 하지 않고 북한의 핵 포기를 유도하고 굴복시키는 것을 최선책으로 여긴다. 이른바 ‘이라크식 해법’이다. 영국의 중재로 핵포기 선언을 한 리비아가 선언 직후 즉각적으로 핵시설을 공개하고 포기 절차에 들어가는 대신, 미국은 정권 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관계 정상화와 경제 지원으로 보상했다. 부시 행정부는 집권 1기 4년 동안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면서도, 북한과 진지한 협상을 단 한 차례도 벌이지 않은 것은 리비아식 해법 외에 다른 방식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부시 행정부는 보기 드물게 6자회담에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대선 전쟁 때도 케리 민주당 후보가 북-미 양자회담의 유용성을 주장했을 때는 펄쩍 뛰었을 정도다. 부시는 “외교와 제재로 해결할 수 있다. 북한과 양자회담을 하는 순간 6자회담은 와해될 것이며, 이는 바로 김정일이 원하는 것”이라고 첫 대선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말했다. 미국으로서는 6자회담이라는 장이 불리할 게 별로 없다.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으면서 주변국들을 결집해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다. 북한의 태도 여하에 따라 매맛을 효과적으로 줄 수 있고, 보상도 분담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마치 피고인 북한을 재판대에 세워놓고 판사인 미국의 입맛에 따라 주변 배심원들을 요리조리 배후 조종하는 식이다.

북한은 미국의 속셈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다. 세 차례 6자회담을 지켜보면서 미국의 의도를 읽은 셈이다. 북한은 미국이 핵문제의 실질적인 진전보다는 명분쌓기용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은 이라크 전후 처리에 매달려 있지만 안정이 이뤄지면 미국의 다음 표적이 될 것으로 우려한다. 한성렬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가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확정된 직후인 11월3일 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들은 여러모로 곱씹어볼 만하다. “6자회담이란 형식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미국의 적대정책이 문제다. 미국은 최근 북한인권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대통령이 서명했다. 6자회담이 이라크처럼 우리를 침공하기 위한 시간벌기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6자회담에 몇 차례 참석하긴 했지만 대부분 마지못해서였다.

북한, 남한 당국이 미덥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태도 변화 없는 6자회담에 나가길 주저해왔는데 마침 더 없이 좋은 명분이 생겼다. 한국의 과거 핵물질 실험 사실이 불거진 것이다. 한 차석대사의 주장은 한국을 곤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투명성 있게 남쪽의 우라늄 계획이 해명돼야 한다. 우라늄 문제에 대해 남조선이 우리를 속였다. 6자회담이 시작된 지 1년 반이 됐고 핵 위기가 시작된 지 2년이 됐다. 우리의 우라늄 문제가 불거져나오는데도 한국의 우라늄 문제는 계속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 과정이 석연치 않다. 미국의 이중 잣대가 문제다. 이스라엘이 핵을 보유하자 미국은 그것을 묵인했다. 남조선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한국이 북한에 6자회담 불참 명분을 강화해준 꼴이 됐다. 김대중 정부 때 같았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을 노무현 정부는 그냥 대충 넘어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만큼 북한은 남한 당국이 미덥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은 11월5일 부시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부시 대통령과의 긴밀한 협력하에 북핵 문제를 양 정상의 역점 프로젝트로 해결해 한반도와 세계 평화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조만간 한-미 정상, 한-일 정상 회담도 예정돼 있어 한·미·일 3국이 북한을 6자회담의 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압박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부시 재선 확정 이후 한국과 일본이 미국에 바짝 더 가까이 다가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국은 6자회담이 열리면 북한에 논란의 핵심인 고농축 우라늄과 핵 폐기에 대한 전략적 설득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이다. 한국뿐 아니라 5개국이 모두 북한을 설득하고 보장해줄 것은 보장해주고 핵을 폐기하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줘서 북한이 전략적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을 일단 6자회담에 끌어내는 것이 과제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남북한 당국간의 불신도 해소하지 못한 채 핵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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