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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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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생, 눈앞이 감감합니다

등록 2004-11-11 00:00 수정 2020-05-03 04:23

취업쿼터 늘어날 거라 기대했는데 물거품될 듯… 외국 친구들과 구시렁거렸던 선거날 하루

▣ 정현태/ 컬럼비아대 건축학과 박사과정

지난 4년 반 동안 뉴욕에서 유학생으로 살아왔다. 1990년대 말, 어수선한 대학생활을 마감하고 착실히 밀린 공부 열심히 하자며 떠나왔는데, 웬걸 여기는 더 어수선하다. 세차게 공부하다가 때 되면 훌쩍 떠나야지 결심을 했건만, 요즘 같은 땐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자마자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얼마 지나지 않아 2001년 9·11 테러,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소식을 뉴욕에서 맞이했다. 그리고 일방주의 외교와 친기업 정책에 대해 와 많은 신문들이 거의 매일 아침 비판 사설을 내고, 전쟁 포로와 미국 시민들의 인권 문제를 여기저기서 제기해도 정부가 요지부동 일관성(?)을 잃지 않는 것도 지켜봤다. ‘강한’ 정부다.

개표방송 보다가 너무 충격받아

지난 4년 동안 유학생들과 관련된 작은 변화들도 적지 않았다. 테러범들이 유학생 비자로 입국했다는 이유로 비자 발급과 갱신이 까다로워졌다. 아랍계 학생들은 갑자기 거의 지원자가 없어지고, 중국 학생들도 많이 줄었단다. 경기 후퇴로 학업을 마친 유학생들은 취업이 어렵다. 해마다 외국인 취업자 수를 결정하는 취업비자 쿼터도 많이 줄었고, 또 취업비자 발급 과정 자체도 어려워질 모양이다. 학교에서 관리하던 유학생의 신상자료는 정부가 감독할 수 있게 되었고, 이사할 때마다 주소지 변경신고도 해야 한다. 공항에서는 지문 채취와 사진 촬영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 유학생들이랑 테러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지난해인가 미국의 항공·관광·무역업계 등에서 외국인 출입국을 쉽게 하자고 했다지만 별로 나아진 게 없다. 전세계의 우수한 인재들을 골라 받아왔던 대학들도 학생들의 미국 입국을 예전처럼 해보려고 나섰지만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미국 내 문제를 주제로 대통령 후보 2차 토론회를 하는 날, 이탈리아와 캐나다에서 온 동료들이랑 TV 토론회를 보기 위해 학교 근처 술집과 카페를 찾아나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야구 중계가 겹쳐서 10군데 넘는 곳을 돌아다닌 뒤에야 가까스로 토론회를 볼 수 있었다. 그것도 TV가 5대 있는 술집에서 4대는 야구 중계, 귀퉁이 방의 한대는 대선 후보 토론회를 보여줬다. 야구시합 보느라 술집마다 손님들이 빽빽이 들어찼는데, 토론회를 보는 곳은 귀했고, 마침내 발견한 장소는 거의 골방 수준이었다. 돌이켜보면 심상찮은 징조였는데, 그때 잽싸게 눈치채고 선거 패배의 정신적 충격에 대비했어야 했다. 아쉽다.

나라 걱정에 취업 걱정에

선거 당일, 개표방송을 보다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새벽까지 잠들 수 없었다. 가까스로 새벽 4시에야 잠이 들었다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학교에 갔다. 뉴욕은 공화당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해서인지, 흥분한 부시 대통령 지지자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체로 웃음이 어색한 초상집 분위기였다. 오죽 갑갑하랴!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선거 얘기는 하기도 싫었던지 말이 없었는데, 눈치 없는 한놈이 꺼내는 바람에 모두들 구시렁구시렁 끝도 없다. 세상이 갑자기 불만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내심 다들 어떻게 살려고 저러나 걱정됐다. 게다가 앞으로 4년간 뾰족한 수도 없는데.

저녁에 만난 한국 유학생들은 더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선거 과정과 결과에 더해서, 미국애들은 하지 않는 걱정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에 오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다들 ‘악의 축’이 또 나오지나 않을까, 핵 문제로 전쟁 위협이 고조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졸업이 가까운 일부 유학생들은 나라 걱정에 취업 걱정까지 겹쳤다. 민주당이 되면 취업비자 쿼터를 늘릴 것이라고 했다는데…. 일부는 실업률을 낮추려고 외국인 취업을 더 어렵게 하지 않겠느냐고 예상했다. 다들 예상이 맞으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산 너머 산이라더니. 앞으로 4년은 지난 4년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전쟁과 미국 내외의 갈등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고, 나의 불안정한 유학생 신분도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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