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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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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등록 2004-11-04 00:00 수정 2020-05-03 04:23

시속 20km의 놀라움으로 시작한 한국철도… 일제 침략과 함께 식민지 근대화의 첨병으로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를 각기 방 한간씩 되게 만들어 여러 수레를 철구로 연결하여 수미 상접하게 이었는데 수레 속은 상·중·하 3등으로 수장하여 그 안에 배포한 것과 그 밖에 치장한 것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독립신문 1899년 9월19일치 3면)

1899년 9월18일 한반도에 처음으로 기적 소리가 울리던 날, 기자는 처음으로 기차를 타본 놀라움을 이같은 시승기로 남겼다. 노량진을 출발한 기차가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제물포에 닿았다고 적었지만, 사실 당시 기차의 평균속도는 시속 20~22km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른이 쉬지 않고 걸어도 족히 12시간이 걸리는 80여리길(노량진~제물포 33.2km)을 1시간40분 만에 주파해버렸으니 기자의 과장이 심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당시 경인선은 4대의 증기기관차가 객차 6량, 화차 28량을 싣고 하루 두 차례 왕복 운행했으며 외국인만 이용할 수 있는 1등석은 1원50전, 내국인도 탈 수 있는 2등석은 80전, 여자들이 이용 가능한 3등석은 40전이었다고 한다. 이때 여인숙의 밥 한 끼니가 5전이었다고 하니 3등석도 서민들은 맘놓고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값도 값이었지만 난생처음 기차를 본 조선인들에게 기차는 놀라움, 신기함, 낯섦, 두려움이 뒤섞인 존재였다. 철도 정거장 근처엔 기차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차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가 하면 한쪽에선 기차의 굉음 때문에 지신이 깨어난다 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기차 개통 뒤 몇년 동안은 바람이 잘 통하는 철로변에 누워 선로를 베고 잠든 취객들이 기차 바퀴에 목숨을 잃는 사고도 빈번히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19세기 말 외세의 침입과 함께 등장한 철도는 식민지의 근대화를 위한 첨병이었다. 미국인 J. R. 모스로부터 철로부설권을 사들여 경인선을 개통함으로써 조선의 수도와 개항장 인천을 관통하는 축을 움켜쥐게 된 일본은 경부선(1905년 1월1일)·경의선(1906년 4월3일)을 속속 개통했다. 교통기관을 장악해 조선 경영의 틀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1911년엔 압록강 철도 가설 공사가 마무리돼 일본과 중국 대륙이 하나의 선로로 묶이게 됐고, 1914년엔 호남선과 경원선을 부설하며 호남의 곡창지대와 북부의 광공업지대를 장악했다. 1919년 말엔 총 2197km에 이르는 간선 철도망이 완성됐다. 선로 부설을 위해 노동력을 동원하고 철도 부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이 겪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과 땅, 묘지를 무상으로 빼앗는가 하면 작업장에서 게으르게 일한 조선인은 공사 현장에서 총살에 처해지기도 했다. 반일 감정은 철도 정거장의 공격으로 나타나 1900년대 초반 의병들에게 경의선 일산역·경부선 소정리역 등이 파괴되기도 했다. 1904년 7월부터 1906년 10월까지 철도와 관련해 처벌당한 한국인은 사형 35명, 감금 및 구류 46명 등 257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철도가 억압과 침탈의 채찍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철도는 일상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철도는 조선인들의 일상생활에 ‘근대적 시간’이란 관념을 새기는 효과적인 도구였다. 하루는 12개의 간격에서 24단위로 세분화됐고 분과 초로 잘게 쪼개졌다. ‘미시에 동네 어귀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나자’ 정도로 약속 시간을 정하던 사람들에게 몇시 몇분,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나 증기선, 우편물 수집 등의 시간표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기차 시간표와 배 운행 시간표는 신문에 광고나 기사 형태로 대중에게 홍보됐다. 일본은 경부철도를 개통하면서 처음으로 일본의 표준시를 적용해 식민지를 본토와 동일한 시간으로 묶었다. 비록 철도 부설은 군사적 목적이 앞선 것이었지만, 일반인들도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해변이나 온천·명산 등의 여행지가 개발돼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꽃놀이·단풍구경을 떠났다. 1920년대 철도국은 경인선 여행객들을 위해 인천 월미도에 바닷물을 데운 해수탕과 인공 풀장을 만들어놓았다. 온양온천 개발권을 쥔 철도회사는 1922년 천안과 온양 구간에 경남선(지금의 장한선)을 개통했고, 1931년엔 철원에서 내금강 사이 116.6km를 뚫어 금강산관광을 주도했다.

한반도에 철도의 시대를 열었던 증기기관차는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1167량으로 늘어날 만큼 발전을 거듭했지만 1950년대부터 그 수명을 다하기 시작했다. 1954년 4월 UN군에서 운용하던 디젤전기기관차 4량을 인수하면서부터 철도는 디젤 시대를 맞기 시작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따라 철도도 현대화가 진행되며 연차별로 디젤차가 도입되면서 1967년 8월 서울역에서 열린 증기기관차의 종운식을 끝으로 증기기관차는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참고 자료

, 박천홍 지음, 산처럼 펴냄
, 철도청 엮음
, 한국철도 펴냄
철도청 100주년 기념 홈페이지: http://www.korail.go.kr/2003/100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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