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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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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의 당당한 자신감을 배우자

등록 2004-08-26 00:00 수정 2020-05-03 04:23

10년간 외부로부터 진행된 신자유주의 공세… ‘철의 여인’ 대처도 공영성 거꾸러뜨리지 못해

▣ 김평호/ 단국대 교수 · 방송영상학부

KBS는 흔히 영국의 BBC와 비교된다. 나라를 대표하는 공영방송으로 영국에 BBC가 있다면 한국에는 KBS가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 비교는 거기까지가 전부이다. KBS와 BBC는 내·외부적으로 전혀 다르며, 그 정도는 영국과 한국의 정치·사회·문화적 차이만큼이나 크다.

영국의 보수세력은 BBC가 미웠네

지금의 KBS 개혁 역시 BBC의 변화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시간적으로도 KBS는 이제 막 개혁의 시동을 걸은 반면, BBC의 개혁은 지난 1980년 초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0여년에 걸쳐 진행됐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KBS의 개혁이 경영과 조직의 효율화를 포함해 공영방송으로서 공공성과 공익성을 더 강화하는 방향의 것’인 반면, ‘BBC의 변화는 미국의 레이건과 함께 80년대를 풍미한 대처 수상의 보수당 정권이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공영방송 BBC에 시장과 경쟁원리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라는 점이다.

내부적으로도 지속적인 논의는 있어왔지만 KBS 개혁의 직접적 계기는 외부로부터 주어졌다. 지난 5월 감사원이 국회에 KBS 감사결과 보고서를 제출하고 그것이 공개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TV 수신료, KBS가 개혁 프로그램으로 방영한 각종 시사 프로그램 등을 두고 한나라당과 조선·중앙·동아 같은 보수신문들이 벌여온 끈질긴 공세가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BBC가 겪은 변화 역시 외생적 변수가 크게 작용했다. 그것은 1979년부터 90년까지 집권하면서 BBC의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 등에 매우 적대적인 입장을 보여왔던 보수당의 대처 수상으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보수당 정부의 방송 정책이 BBC에만 한정됐던 것은 아니다. 또 BBC가 시행한 내부적 변화도 외부의 압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케이블과 위성 등 새로운 매체들이 속속 등장하는 데 따른 매체환경 변화에 BBC 역시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새로운 매체질서 수립의 필요성이 영국 방송정책의 변화를 이끈 주요 원인이 되었다. 문제는 보수당 정부가 이 변화를 민간상업 방송이 주도하는 환경으로 이끌었고, BBC에도 시장과 자유경쟁의 원리를 도입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다.

대처 수상을 포함해 우파 진영의 신문들, 그리고 자유주의적 정책연구단체나 광고업계 등으로 대변되는 영국의 보수세력은 BBC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처음부터 숨기지 않았다. 보수당 정부는 기존의 BBC를 거대한 관료주의 체제라고 비판하면서 경영 효율화와 재정 안정을 이유로 BBC 경영위원회의 이사들을 시장주의적 성향의 인물들로 대폭 교체했다. 대처의 집권에 앞장섰던 영국의 이나 같은 우파 신문들 역시 BBC가 엘리트주의적이며 독선적이고 경영이 방만하다는 등등의 이유를 들면서 BBC의 개혁을 설파했다. 광고업계 역시 막강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BBC를 유용한 광고매체로 활용하기 위한 논리를 제공했다.

블레어 집권과 함께 개혁 막 내려

이들이 가장 문제 삼은 것은 TV 수신료와 BBC의 위상 부분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시장논리가 주도하는 새로운 방송환경에서 준조세 성격의 수신료는 적절치 않은 제도이며, 따라서 이를 폐지하고 BBC를 민영화해 광고는 물론 협찬과 유료 서비스 등의 재원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고업계는 BBC가 약간의 광고만 하더라도 더 이상의 수신료 인상은 불필요하며 광고가 국내 산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고, 우파 신문들도 BBC의 비효율성과 수신료 인상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광고 도입을 통한 수신료 동결과 BBC의 민영화를 촉구했다.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바탕은 공공적 경제 운용 정책을 반대하는 신자유주의적 논리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관료적 공영 체제의 비효율성을 비판하면서 시장원리와 소비자의 선택을 강조하는 탈규제와 상업화 개념을 강조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신료를 BBC에 대한 압력 수단으로 사용해 BBC 프로그램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보수세력의 뜻도 숨겨져 있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보수당 정부가 세운 BBC 개혁 방안은 BBC뿐 아니라 새로이 대두되는 방송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1985년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알란 피콕을 위원장으로 하는 피콕위원회를 만들었다. 방송 전반의 개혁 청사진 수립 용역을 맡은 위원회 보고서의 핵심은 ‘BBC 경영구조의 개편’ ‘상업방송 분야의 규제 완화’ ‘시장주도적인 케이블 및 위성방송 도입’ 등이다.

이후 BBC는 본격적으로 내부 조직의 개편에 들어가게 된다. 우선 첫 번째 변화는 1988년부터 93년까지 인건비 감축을 통해 경비 절감은 물론 5천명 정도의 인원이 감축된 것, 둘째는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 제작부서가 통폐합된 것, 셋째는 프로듀서 선택제 도입(예산을 배정받아 프로듀서가 프로그램 제작에 필요한 시설, 장비, 스태프 등을 비용에 맞추어 자유롭게 BBC 내부 또는 외부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게끔 하는 제도), 넷째는 이를 감안한 25%의 외주제작 도입, 다섯째는 BBC 재정 수익을 늘리기 위한 국내외 상업활동의 강화(BBC 월드와이드그룹의 설립), 여섯째는 같은 맥락에서 정규 방송 이외의 시간대에 유료 가입 서비스를 제공하는(텔레텍스트 같은 정보제공 서비스) 등의 방안들이 시행된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재정적자, 관료적 조직의 비효율성, 방만한 경영 등을 이유로 진행된 BBC 개혁은 90년 대처 수상이 물러나면서 강도가 급격히 약화된다. 감축됐던 인원도 점차 원상회복되고 프로듀서 선택제 역시 대폭 축소된다. 그 이유는 상업화 개혁 드라이브의 부작용이 나타나면서 노조를 중심으로 한 내부의 강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새로이 집권한 메이저 수상의 유연한 정책 스타일에도 영향 받은 바 크다. 그리고 1995년 블레어 수상의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보수당 주도하에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적 BBC 개혁은 막을 내린다.

‘공영방송’위상은 흔들릴 수 없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보수당 정부의 BBC 체질 개선이 BBC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BBC에 변화는 필요하되 공영방송으로서 위상 자체가 흔들릴 수 없다는 많은 관계자들의 공통된 인식 때문이었다(물론 대처 수상이 계속 집권했다면 BBC의 민영화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예로 앞서의 피콕위원회도 BBC의 변화를 주문했지만 동시에 BBC는 공공서비스이며 경쟁적인 환경에서도 유지돼야 할 가치 있는 존재로서 공영방송의 역할은 상업방송이 제공할 수 없는 질 높은 프로그램과 정보의 제공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BBC도 1992년 발표한 자체 보고서를 통해 방송이 시장에 지배된다면 시민적 문화의식 형성이라는 방송의 사회통합 역할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위력과 영향력을 고려할 때 민주사회에서 방송 가운데 일부는 시장과 국가로부터 독립돼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BBC라는 공영방송의 위상이 무너져서는 안 되며, 일단 무너지면 원상회복이 어렵고,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성공적인 공영방송사를 함부로 바꾸거나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고서는 특히 강조하고 있다.

최근에 빠른 속도로 등장하는 각종 뉴미디어에 대한 BBC의 정책에 지금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흔들리고 있지 않은 BBC의 위상은 당당한 자신감과 함께 영국 사회 전체가 인정하는 BBC에 대한 신뢰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거듭나려는 KBS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같은 위상을 세워나가고자 하는 미래에의 강한 의지와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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