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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라인 가동을 확인시켜라”

등록 2004-07-29 00:00 수정 2020-05-03 04:23

강경 대응으로 출발해 경징계로 끝난 ‘북한군 무선교신 보고 누락’ 사건… 노무현의 진의는 무엇인가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우리 군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의 무선송신 보고를 누락한 사건을 바라보는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의 진의는 과연 무엇일까. 노 대통령은 무슨 노림수를 갖고 있는 것일까.

사건 발생 직후부터 진상 조사과 책임자 문책에 강한 집착을 보여온 노 대통령과 국가안전보장회의(사무처장 이종석)가 지난 7월23일 “지휘관의 판단 착오와 부주의”라는 합동조사단의 맥빠진 결론에 만족하며, 사건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정치권 안팎에서 이런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왜 공개적으로 파문을 확산시켰나

사건 발생 다음날인 7월15일 국가정보원 보고를 통해 해군작전사령부가 북한군의 무선송신 보고를 누락한 사실을 파악한 뒤 노 대통령과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최근까지 대응은 강경 일변도였다. 대통령과 군부의 갈등 양상을 드러내는 부담을 무릅쓰며 합동조사단 구성(16일)-재조사 지시(19일)-박승춘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언론 상대 정보 유출과 이에 대한 청와대의 공개 경고 및 진상 조사(20일)-박 본부장 사의표명 및 보직해임(26일) 등 숨가쁜 과정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런데 정작 조영길 국방장관이 지난 24일 국회에서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질 것을 우려한 고의 누락이며 심각한 군기위반이라고 밝히면서 ‘군의 고의성’ 문제가 전면에 드러나자, 청와대는 추가 진상 파악보다는 파문 진화에 급급해하는 기현상을 드러냈다. 지난 10여일 동안 청와대의 강경한 기류를 전달해온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은 25일 “국방장관의 국회 답변 이후 청와대가 이와 관련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합동조사단 보고는 이런저런 진술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부주의, 임의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결론낸 것”이라며 23일 합동조사단의 결론과 달라질 게 없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과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왜 일부 장성과 장교들의 판단착오와 근무태만 정도로 결론날 사건을 국군기무부대 등을 통해 좀더 은밀하고 조용히 규명하지 않고, 나라 전체를 혼돈과 논쟁 속에 몰어넣는 공개적 방식으로 헤집어 파문을 확산한 것일까.

무엇보다 노 대통령과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참여정부의 가시적인 남북화해 정책 성과물인 서해상 남북 해군간의 무력충돌 방지를 위한 핫라인이 무력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증명하는 데 집착하면서 첫단추를 과도하게 끼운 측면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남북 정상회담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보다 남북 사이에 차분하게 한 단계씩 신뢰를 진전시키는 조치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왔다”면서 “그런 관점에서 남북 장성급 회담의 결과로 구축된 핫라인의 정상 가동 여부는 대통령에게 굉장한 의미가 있는 문제였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민들에게 긴장 완화의 길을 열었다고 설명한 핫라인이 북한의 도발로 무력화됐다는 공격을 받은 만큼 국민 앞에 낱낱이 진상을 밝히고 진실을 규명하자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실제 7월14일 합동참모본부가 “해군의 교신 시도에 북쪽이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고 발표한 뒤 청와대와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충격에 휩싸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6월4일 남북 장성급 회담의 합의를 ‘6·15 공동선언 기념일’에 맞춰 공식 가동한 뒤 첫 실제 상황에서 핫라인이 작동되지 않은 데 대한 무력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인 15일 오후 국가정보원이 당시 북한 함정이 교신한 사실이 있다고 보고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국정원 보고를 진실로 확인한 국가안전보장회의는 곧 전면적인 반박에 나섰다. 상임위원회를 소집해 합참의 발표가 거짓이라고 결론짓고 남대현 국방부 대변인을 통해 국민에게 공표했다. 또 국정원, 기무사, 국방부 등으로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진상 조사와 책임 규명,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지도 천명했다. 핫라인 무력화 논쟁에서 군의 허위보고 진상 규명쪽으로 쟁점이 옮겨간 셈이다.

군에 대한 청와대 핵심인사들의 불신

노 대통령의 관심도 여기에 집중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무선교신 누락 사건을 보고받은 노 대통령은 처음부터 군이 북한 함정의 침범에 맞서 작전을 잘했느냐는 문제보다, 남북 장성급 회담으로 구축된 핫라인이 정상적으로 가동됐는지, 실제 교신이 이뤄졌는데도 충돌이 발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데 관심을 뒀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신 보고 누락 경위의 진상 조사 과정에서 노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와 군이 필요 이상 갈등을 확산하게 된 밑바닥에는 청와대 핵심 인사들의 군에 대한 불신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다른 한 핵심 관계자는 “청와대 참모들 다수는 이번 사태가 발생하자 군 내부에서 남북화해 반대세력이 조직적으로 준동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노 대통령과 핵심 측근들도 대체로 그런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한 측근 인사도 “이번 사태의 저변에는 군 고급 장교들의 보수적 성향과 군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구가 반영돼 있다고 파악했다”면서 “이런 심각한 사안을 은밀한 조사를 통해 조용히 넘길 경우 ‘군대 무서워서 아무 소리도 못하는 정권’이라는 인상을 주고, 군의 튀는 행위가 재발할 경우 어떻게 감당하겠냐느냐는 우려도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청와대와 군의 갈등이 전면화된 직접적 계기가 된 7월19일 노 대통령의 재조사 지시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중심으로 한 여권 핵심부의 군에 대한 이런 불신감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조사단이 노 대통령의 진의를 모른 채, 초점이 아닌 작전상황 위주로 보고를 했다”며 “(군이) 북한이 NLL을 침범해서 우리가 정당하게 대응했다는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려 한 것 같다”고 재조사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정부의 한 관계자는 “1차 보고 당시에도 23일 최종 보고서에 나온 것과 같은 군 내부 주요 인물들의 판단 착오와 보고 누락 사실 등 보고 체계의 문제점은 모두 담겨 있었다”며 “국가안전보장회의쪽 요구는 군의 교신 내용 누락 행위가 조직적인 반발이었는지, 또 고의성이 있었는지를 확실히 파악해 책임소재를 좀더 분명히 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추가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재조사는 노 대통령의 남북화해 정책에 대한 군 내부의 조직적 저항 여부와 고의적인 보고 누락 여부에 의심을 품었던 국가안전보장회의쪽 견해가 크게 반영된 셈이다. 결국 합동조사단은 23일 최종보고서에서 ‘사격 전 상급부대 보고시 사격 중지 명령 우려’ 등 군의 고의성을 추가한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재조사 지시는 노 대통령의 군에 대한 공개적 불신감 표출로 해석됐고, 군 내부에 대한 대대적인 인적 쇄신 논란을 촉발하면서 박승춘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육군중장)이 사건 발생 당시 북한 함정과의 교신 내용, 북한의 통지문 등을 일부 언론에 공표하는 등 항명 논란으로 사태를 확산하는 부작용도 가져왔다.

“조영길 발언이 진실에 부합”

이번 사태가 이렇게 번진 데는 청와대의 ‘군 길들이기’ 정서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 관계자 사이에는 “국가안전보장회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군을 다잡으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의 한 인사는 실제 내부에서 ‘어떻게든 군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강경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과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왜 조영길 국방장관의 ‘고의 누락’과 ‘군기 문란’ 규정을 부담스러워하며 경징계 조치로 이번 사태를 봉합하려는 것일까.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번 사건의 진상은 조영길 장관의 발언이 진실에 훨씬 더 부합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단순 경고로 넘기는 것은 군의 위상을 뒤흔들 정도로 문책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함께 보수언론이 대통령과 군의 싸움을 부추기는 데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전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북한 문제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군의 특수한 현실, ‘고의 누락’으로 결론낼 경우 군에 대한 과도한 문책과 이를 둘러싼 이념 논쟁이 촉발될 위험성 등 복합적인 변수를 고려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 관계자는 “애초부터 특정인을 문책하는 것보다 남북 관계에서 중요한 합의인 교신이 이뤄졌는지를 밝히는 것이 더 핵심이었다”며 “보수언론이 트집잡은 핫라인 합의가 지켜졌다는 것을 국민에게 확인시키는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의도한 정치적 성과는 이미 충족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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