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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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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참사가 다가온다

등록 2004-07-01 00:00 수정 2020-05-03 04:23

이라크를 다섯 차례 방문하며 김선일씨와도 수차례 만났던 김영미 PD가 전하는 현지 분위기

바그다드= 김영미/ 분쟁취재 전문 프리랜서 PD

개인적으로 이라크를 다섯 차례나 방문하고 취재하는 동안 이라크에 정이 참 많이 들었다. 필자의 눈에는 이라크 사람들이 부모 잃은 자식들 같았고, 이렇게 대책 없이 한 사회를 무너뜨린 미국에 대한 분노가 필자를 이라크로 다섯 차례나 끌어들였는지 모른다. 이라크인들은 천성이 착하다. 한국이라면 ‘길 잘 만드는 나라, 선진국, 차도 잘 만들고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로 통한다. 이들은 사담 후세인 통치 시절에도 이라크는 한국의 친구이고, 한국 사람 좋아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한국 젊은이가 끔찍한 모습으로 희생당했다. 우리의 관계가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참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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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 사장의 단독협상, 믿을만 한가

필자는 지난해 12월 가나무역 등 한국 기업을 취재하면서 김선일씨를 처음 보았다. 한 여섯 차례 만난 것 같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친구였다. 부끄럼이 많아서인지 카메라를 무척이나 피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친구가 그 무서운 저항세력들의 카메라 앞에서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김씨와 동거동락하던 가나무역 동료들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가나무역 직원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선일이가 금방이라도 배달갔다 왔다고 막 들어설 것 같다.” “너무 착해서…. 잡혀 있는 동안 얼마나 무서웠을까”라며 가슴 아파했다. 김천호 사장도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도 연일 계속되는 인터뷰와 사건 처리로 쓰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일 만큼 야위어 있었다.

하지만 김 사장은 김씨의 납치 이후 3주간 사건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갔다는 책임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김 사장은 납치 사실이 처음 방송에 알려지자 김씨가 6월17일 납치됐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진술의 번복으로 혼선만 가중됐고, 최종적으로는 지난 5월31일 팔루자 근처에 있는 리치웨이라는 미군 부대에 이라크 사람과 함께 물건을 배달갔다가 실종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 뒤 3주간 김씨는 저항세력에 억류됐고, 김 사장은 바그다드 주재 한국대사관을 네 차례나 방문하면서도 그 사실을 대사관 관계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혼자서 김씨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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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김 사장은 김씨의 납치 사실을 알고 저항세력과 협상을 했었는가. 김 사장의 진술에 따르면 5월31일 그가 팔루자에 이라크 현지인과 출장을 갔고, 6월3일께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어 그제야 김씨가 실종된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미군 부대에 배달을 가면 2~3일은 부대에서 자고 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교통사고가 난 게 아닌가 해서 여러 병원과 경찰서로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6월10일께 팔루자에서 그가 타고 나갔다고 하는 차량이 발견되면서 저항세력이 납치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고, 이후 현지인과 이라크인 변호사를 통해 저항세력과 협상을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팔루자에서 저항세력들이 그렇게 순순히 협상을 할 만큼 자유롭게 만나주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지난해 11월 필자는 저항세력을 만나기 위해서 이라크에 있는 모든 취재망을 한달 가까이 가동했다. 저항세력들이 활동하던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결국 팔루자에 홀로 가서 우여곡절 끝에 만날 수 있었다. 운 좋게도 철저하게 보안을 요구하면서도 그들은 저널리스트를 많이 존경했고 본인들의 말이 방송되길 원했다. 또 이슬람 국가에서는 여자를 보호하는 풍습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간신히 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아무리 이라크 현지인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이라크 저항세력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지금 미군이 이들을 색출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중인데 말이다.

결국 저항세력과 김 사장 사이의 협상이 이루어졌다는 정황 증거도 없고, 이라크의 현실에 맞지도 않다. 김 사장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느 정도 협상했는가에 대해 대답하지 못했다. 본인이 직접 가지도 않았고, 이라크 현지 변호사와 현지인들이 대신 협상을 벌였다고만 대답했다. 직원의 생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본인이 가지 않고 상대가 진짜 저항세력의 간부인지, 그는 어떻게 확인하고 협상을 벌였다는 것인가. 이 대목에서 그는 더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김 사장 협상단이 저항세력 근처에도 못 가봤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 시간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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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김 사장은 왜 3주 동안이나 대사관에 알리지 않았는가. 그의 대답은 너무 간단하다. “대사관에 알릴 시기를 놓쳤다. 처음에는 내가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뒤에는 말을 못했다. 그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는 김씨가 실종된 뒤에도 대사관을 네 차례나 찾아갔다. 대사관 직원들에 따르면 대사관에 와서도 태연스럽게 사업 이야기를 하고, 김씨 납치에 대해서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 해도 김씨를 납치한 상대가 저항세력임을 알고서도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3주동안 대사관에 안 알린 이유는…

이라크 저항세력들이 일단 외국인들을 납치하면 목숨을 조건으로 협박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렇게 직원이 위험한 지경에 처했는데도 대사관에 알리지 않은 채 현지인들만 믿고 협상을 벌였다고 하는 것은 이라크 현지의 정서를 감안하면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 사장은 다른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 여론이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미군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김 사장이 경영하던 가나무역은 미 군수업체인 원청업체 ‘AAFES’에 납품하고 있었고, 그는 분명히 원청업체에 이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김 사장의 성실성과 사업 수완에 대해서는 미군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라크에서 발생한 이런 큰 일을 그들이 모른 척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 모든 의문점들을 푸는 열쇠는 김 사장이 쥐고 있다. 그러나 김 사장은 큰 정신적 충격으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있다. 사람이 갑작기 큰일을 당하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김 사장이 미군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이런 논란에 시원한 답을 못해준다면 희생당한 김씨를 위해서도 안 될 일이다. 이런 김 사장 행적의 의문들은 국내에서도 큰 논란거리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군은 모르고 있었다고 말한다.

위성TV가 이라크를 바꿔놓다

이번 사건에서 주목할 대목은 텔레비전 방송의 위력이다. 저항세력들은 김씨를 납치한 뒤 바로 인터뷰를 했고, 그 화면을 의 텔레비전 회사인 〈APTN〉에 보냈다. 화면 속의 김씨는 너무도 침착하게 자기 신상 명세를 밝히고 있었다. 저항세력들은 그런 화면을 보내면 즉시 방송을 할 거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6월3일 화면을 얻은 〈APTN〉은 뉴욕 본사로 그 화면을 보냈고, 즉시 서울 지사로 그리고 한국 외교부로 확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명쾌한 확인이 되지 않자 그대로 테이프를 방치한 것으로 보인다. 〈APTN〉 바그다드 지사에서 일하는 이라크 직원인 핫산씨의 테이프 입수 경위를 들어보자. “이런 종류의 테이프는 자주 온다. 그냥 두건을 두르고 ‘본인들은 미국과 싸우기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이고 이 땅에서 미국을 몰아내겠다’는 결의 정도의 조잡한 테이프에서 자살폭탄 테러 직전에 순교자라고 인터뷰해서 오는 테이프도 있고, 요사이는 인질을 앞에 두고 죽이겠다는 협박성 테이프로까지 발전했다. 그들은 슬그머니 와서 사무실 경비 등에게 테이프를 놓고 간다. 한국인 납치 테이프도 그런 식으로 우리 사무실에 입수됐다.”
보통 이라크 사람들은 바그다드에서 저널리스트를 만나려면 팔레스타인 호텔에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바그다드의 팔레스타인 호텔에 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APTN〉 간판이다. 그래서 막연하게 〈APTN〉에 테이프를 놓고 갔을지도 모른다. 그 뒤 방송이 나오지 않자 아랍계 최고의 방송국인 를 생각해낸 것 같다. 바그다드 지사는 팔레스타인 호텔에 있지 않고 시내 스완 레이크 호텔에 있다. 에서 절규하는 김씨의 화면이 공개될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를 납치한 저항세력들은 방송을 이용해 자신들의 행동을 알리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텔레비전을 주목하고 있었을까. 24시간 안에 한국군을 모두 철수하라는 그들의 요구는 최후 통첩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마 한국 정부의 입장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본인들이 요구한 알맹이는 싹 빼고 인도적인 호소만 강조하는 방송만 하고, 그 뒤에 바로 나온 한국 정부의 파병 강행 결정 방송에 무척 자극받았을 것이다.
필자와 같이 일하는 현지인들과 그의 친구들은 전화를 걸어 “그들은 이 한국인을 죽인다면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 정부는 지금 꼭 강경하게 파병을 한다고 말해야 하느냐. 나중에 파병할 때 하더라도 지금은 망설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며 무척 걱정했다. 그리고 24시간이 지난 뒤 김씨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팔루자 근처 고속도로변에서 미군 순찰팀에 의해 발견됐다.
김 사장도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지만 협상조차 변변하게 해보지도 못했다. 한국대사관도 속수무책으로 당한 꼴이 되었다. 진정 우려되는 것은 다른 지역의 저항세력들도 이번 사건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았다는 점이다. 북부지역 바쿠바, 키르쿠크, 모술의 저항세력들은 “우리도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라며 학습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또 다른 참사를 예고한다. 방송의 역기능이라고나 할까. 사담 시절 이라크 사람들은 위성방송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후 마구 보급된 위성 텔레비전은 이라크를 확 바꿔놓았다. 다른 지역에 있는 저항세력들까지 김씨 살해 수법을 모방한다면 외국인 납치는 팔루자뿐 아니라 이라크 전역에서 기승을 부릴 수도 있다.
김씨 사건은 24시간을 주고 약속대로 참수를 했기에 다른 지역의 저항세력들에게 영웅담 비슷하게 돌 것이다. 앞으로 한국인 납치가 또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이라크에서는 방송이 범죄에 악용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나 는 터키 기업인 납치 사건 테이프와 파키스탄 인질 등의 소식을 계속 내보내고 있다. 김씨 테이프를 가 방송하지 않고 더 신속하게 한국 정부에 먼저 알려서 석방 노력을 도왔더라면 몇 시간이라도 더 벌 수 있지 않았을까.


팔루자 폭격에 “보복이냐”

한국인들은 전투병을 더 보내서 저항세력들과 싸우자는 여론까지 일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 이라크 사람들 또한 심사가 복잡하다. 바그다드대의 인문사회학과 교수 앗사르는 “이번 사건으로 참 마음이 아프다. 이라크인은 사람이 죽는 데 대해 무감각해지고 있다. 이라크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무쪼록 희생된 한국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김씨 사건 이후 팔루자에서는 미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하루에도 수십명이 사망하고 있다. 팔루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한국인 인질 사건에 대한 보복이냐”고 이야기한다. 피는 피를 부르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이란 이렇게 한때 친구였던 양국을 갈라놓고 서로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이번 사건으로 우리는 소중한 젊은이를 잃었지만 다시 한번 전쟁과 평화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바그다드는 미국의 주권 이양 발표가 나왔지만 거의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다. 이런 터에 한국 정부는 여전히 파병을 강행할 예정이고, 김씨가 “이곳을 제발 나가주세요”라고 한 외침과는 상관없이 7월 초 현재 나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서희·제마 부대가 추가 파병 한국군의 주둔지로 결정된 아르빌로 옮겨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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