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가려진 기업의 비자금 조성 백태… 교묘한 수법으로 부패 고리 만들어

참여연대는 얼마 전에 아주 흥미로운 제보를 하나 받았다. 한 건설회사 노조가 경영진의 비자금 조성 혐의가 있다며 법률상담을 신청한 것이다. 경영진과 대립하는 처지에 있는 노조이긴 하나 회사 내부 조직이 자기 회사의 비자금 조성 사실을 외부에 털어놓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노조 간부인 ㄱ씨에 따르면, 이 회사는 얼마 전 화학회사 한 군데를 합병비율 1 대 0으로 흡수합병했다. 합병비율대로라면 피합병회사 주식의 가치는 0인데 가격을 부풀려 산정해 대금을 지급했으며 그 액수가 70억원에 이르는 것을 노조가 우연히 입수한 내부보고서를 보고 알았다는 것이다. 노조쪽은 이 자금이 경영진의 비자금으로 쓰였을 거란 의혹을 갖고 법적 대응을 준비중이다.
회사 내부 감시망의 문제제기 잇따라
법정관리기업인 ㅎ전자의 ㅎ사장도 비자금 조성 혐의로 현재 검찰의 은밀한 수사를 받고 있다. ㅎ사장은 거래업체인 ㅅ전자 등에 지급해야 할 물품대금을 과다하게 지급한 뒤 그 차액을 돌려받는 수법으로 20억원가량의 비자금을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ㅋ제과도 하청업체에 지급해야 할 물품대금을 과다하게 지급, 차액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부정부패의 뿌리가 되는 검은 돈, 비자금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검찰에 기소돼 사건이 표면화된 것 외에 이처럼 내사를 받고 있거나 회사 내부 감시망의 문제제기로 사건화 직전 단계에 와 있는 사건이 잇따라 꼬리를 드러내고 있다.
기업들의 비자금 조성 수법은 날로 교묘해져 들추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검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예전엔 20억원짜리 자산을 1억원에 판 것처럼 엉성하게 장부를 꾸미는 회계처리도 있었지만 근래 들어선 전문 회계사가 장부를 들여다보더라도 알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게 기본이다.
최근 기업들의 비자금 조성 행태에서 두드러진 양상은 계열사 및 부동산 처분(구조조정) 과정에서 비자금으로 빼돌리는 경우가 유난히 많다는 점이다. 서울지검 특수1부 지익상 검사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계열사, 부동산 등 보유자산을 처분하는 일이 잦다보니 이와 관련된 비자금 조성 사례가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풀이했다. 계열사나 부동산의 경우 평가기관에 따라 산정가격이 크게 달라 이중장부를 꾸며 매매가격을 속이기 쉽기 때문인 것 같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코스닥 등록 직전에 비자금을 조성하는 사례가 많은 점 또한 최근 들어 달라진 양상으로 꼽힌다. 코스닥 등록 직전 대주주가 회사보유주식(비등록 상태의)을 실제보다 싸게 팔면서 비자금을 조성하는 일이 많다는 게 검찰쪽 판단이다. 예를 들어 코스닥 등록을 하면 주당 2만원 정도의 가치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1만원에 팔면서 액면가(500원)에 판 것처럼 장부를 거짓으로 작성하는 방법이 동원된다는 설명이다. 코스닥 시장이 한때 활황세였을 때 집중적으로 저질러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기업 비자금은 회계장부에 올라가지 않는다. 수많은 상거래 속에 숨어 있으며 주로 큰 거래가 이뤄지면서 조성된다. 기업의 대규모 자산이 오가는 건설공사, 해외장비 구입, 부동산 거래 등은 비자금 형성의 좋은 기회가 된다. 대형 비자금 사건이 주로 건설회사나 장치산업에서 터져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자금이 조성되는 전형적인 예. A기업이 B기업으로부터 1천억원짜리 땅을 사는 경우, A기업이 100억원의 비자금이 필요하다면 B기업에 계약서를 1100억원에 꾸미자고 요구하고 자신도 장부에 같은 금액을 올려놓는다. 결국 돈은 1천억원만 B기업에 가고 100억원은 A기업의 비자금으로 남게 된다. 반대로 비자금이 필요한 쪽이 B기업이라면 계약서를 900억원으로 쓰고 1천억원 중 900억원은 장부에 올리고 100억원은 비자금으로 조성한다. 심한 경우에는 매입하지도 않은 물품을 매입한 것으로, 사용하지도 않은 경비를 사용한 것처럼 문서를 조작하는 경우까지 있다.
큰 거래하는 건설회사·장치산업이 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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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을 조성하는 가장 전통적인 수법은 물품단가 조작과 인건비 가공 계상이다. 물품단가 조작은 물품매입(매각) 때 매매가를 실제보다 높여(낮춰) 차액을 따로 챙기는 수법인데 지난 8월 구속된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 비자금 사건이 이런 예다. 검찰 수사결과 박 전 회장은 1997년 경기도 광주 연수원을 다른 기업에 넘기는 과정에서 (주)한씨네텍 한상찬씨와 짜고 비품(가구류) 가격을 조작하는 수법으로 19억원을 빼돌려 나눠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 수법은 금융실명제 실시 뒤에는 다소 어려워졌다고 한다.
인건비 가공 계상은 건설회사에서 주로 저지르는 고전적인 비자금 조성수법이다. 요즘도 심심치 않게 불거져나오고 있다.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뉴코아 전 회장 김의철씨의 횡령사건에도 이런 혐의가 있었다. 김씨는 지난 1994년 2월부터 2년9개월 동안 공사장에서 일하지도 않은 인부들에게 노임을 준 것처럼 서류를 조작해 비자금 51억6천만원을 조성해 횡령했다. 김씨는 이 비자금을 계열사 임직원 명의로 분산예치해 종합소득세 13억4천만원을 포탈한 혐의도 받아 지난 8월 구속됐다.
건설회사에서 자주 써먹는 수법의 하나로 공사금액을 부풀리는 방법도 있다. (주)새한은 지난 2월 이런 수법을 사용한 혐의로 노조쪽으로부터 고발당하는 처지에 빠졌다. 노조쪽은 고발장에서 “이 회장 모자(새한그룹 회장 이영자씨와 장남 재관씨)가 지난 96∼98년 건설회사인 새한건설(주)이 사원아파트 신축공사 등 그룹의 신축공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사금액을 부풀려 허위계약서를 작성하는 수법으로 2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주장했다.
고정자산의 취득과 처분 때 차액을 위장하는 수법은 대규모 비자금을 조성하는 데 유리하다. 덩치가 큰 만큼 떡고물도 많다. 항공사가 항공기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자주 동원한 수법이었는데 몇번 들통난 뒤 최근엔 몰래 리베이트(사례금)를 받는 방법으로 바뀌고 있는 분위기다. 항공기는 도입 단가가 높아 외국의 제작사와 짜면 단번에 대규모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성된 비자금은 주로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묘한 수법
리베이트 등 부정기 수입금을 별도 관리하는 것도 비자금을 만드는 주요 통로로 꼽힌다. 하청업체로부터 받는 뇌물도 여기에 포함된다. 하청업체 등으로부터 받은 뇌물 일부는 정·관계에 뇌물로 바쳐져 비자금 유통의 검은 고리를 형성한다. 동아건설 비자금 사건은 전형적인 예다.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당시 고병우 회장 등 동아건설 경영진은 14개 계열사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상대 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수십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조성한 자금은 정치권 인사들에게 뿌려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금융실명제 실시 뒤부터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이전가격 조작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해외지사(현지법인)를 통해 물건을 들여올 때 단가를 실제보다 높게 책정, 본사에서는 실제 금액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빼돌린다. 반대의 방법을 쓰면 해외로 돈을 빼돌리는 수단이 된다. 대우그룹이 영국 런던의 (주)대우 역외금융창구인 BFC(British Finance Center)를 통해 불법관리해온 75억달러의 자금 또한 이런 유형의 비자금이란 혐의를 받고 있다.
이 밖에도 비자금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회수가능 채권을 회수불능으로 처리한다든지, 회사공금을 대범하게 빼돌려 사채놀이나 부동산·증권 투자용 비자금으로 활용하는 등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검은돈 둘러싼 비리의 먹이사슬
기업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조성한 비자금은 회사의 사업을 확장하거나 신규 사업을 따내는 데 필요한 자금으로 쓰인다. 중소 하청업체는 대기업에, 대기업은 공무원 및 정치인에게 비자금으로 뇌물을 줘 새로운 사업을 따내거나 말썽이 생겼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각종 비자금 사건에서 하청업체-대기업이 엮여나오고 공무원, 정치인이 먹이사슬의 꼭대기로 연루되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회사 사업을 위해 지출되는 것과 함께 비자금 사용처의 또다른 한축을 이루는 것은 오너(또는 경영진)의 사사로운 이익을 채우는 것이다. 검찰 일각에선 이는 아예 비자금으로 여기지도 않으며 횡령이라는 시각이다.
IMF 사태 뒤 각종 제도 정비를 통해 소액주주권 강화, 회계법인의 감사 강화 등 감시망이 촘촘해졌지만 기업들의 비자금 조성 실태는 여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자금 조성이 어려워진 만큼 수법이 더 교묘해졌을 뿐 검은돈이 줄지는 않았다는 게 검찰 안팎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여기에는 비자금 조성을 통한 줄대기가 아니면 사업을 하기 어려운 기업환경 아래에선 당연하다는 설명도 덧붙는다.
기업환경의 구조적 개선 시급하다
건설산업노조연맹의 배명호 부위원장은 “관청 공무원이나 현장 감독관에게 판공비를 주지 않고 원리원칙대로 하면 공사를 따낼 수 없는 게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박상길 대검 수사기획관도 “회계법인의 감사가 엄격해지는 등 외부 환경이 달라져 비자금을 조성하는 게 힘들어지긴 했지만 줄어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박 기획관은 “예전엔 20억원짜리 자산을 1억원에 판 것처럼 엉성하게 장부를 꾸미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회계법인들도 진위를 가려내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회계처리하기 때문에 내부관계자의 제보가 없으면 알아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검찰의 다른 관계자는 “비자금의 가장 큰 부분은 정치자금인데 정치권으로 흘러간 비자금에 대해선 처벌이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같은 돈을 공무원이 받았다면 뇌물죄가 적용되지만 정치인이 받으면 합법적인 정치자금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정치자금에 대한 검찰의 수사 의지도 문제이지만 정치인에게 제공된 자금의 대가성을 검찰쪽에서 입증토록 돼 있는 법체계도 바뀌어야 비자금 문제도 다소나마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배 기자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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