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는 사람이 살았다. 이 빤해 보이는 말은, 그러나 하나 마나 한 말이 아니다. 생각해보자. 우리의 상상력에 포착된 고대인의 삶은 대개 무채색이 아닌가. 신라와 고구려 사람들에 견줘 백제 사람들의 이미지는 더욱 그렇다. 백제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 두 나라 사람들의 그것에 비해 태부족인 탓도 있겠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단조롭거나 따분하지 않았다. 전화(戰禍)에 시달리느라 그럴 틈이 없었을지 모른다? 아니다. 백제인의 삶은 결코 공포로 얼룩지지 않았다. 백제인은 당대 삼국은 물론 동아시아에서 가장 국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았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지금 우리는 국제화됐지만 국제적이지 않고, 열심히 미래에 투자하지만 현재를 무한정 유예할 뿐이지 않은가. 그래서 1400년 전 백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지금 여기’의 문제다. 외국인과 어울려 살다
중국 사서인 백제전을 보면, 백제에는 신라인·고구려인·왜국인을 비롯해 중국인도 함께 거주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 이들의 정체성을 인정하면서도 백제 사회에 뿌리내리는 것을 도왔다. 이들은 일반 백제인들과는 달리 종족별로 특별히 관리될 만큼 종족 정체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귀화인들에게는 일정 기간 세금 면제와 토지 소유 등 사회적 특권이 주어졌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충남 부여 궁남지에서 발견된 목간의 ‘부이’(部夷)라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부이는 귀화인의 집단 거주지를 뜻하는 것으로 사비도성 안의 ‘서부 후항’에 귀화인들의 특별 거주지가 설정된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백제는 다양한 계통의 사람들이 공존했고, 종족적·문화적 정체성 역시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외래 인적자원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 이는 신라나 고구려와 뚜렷하게 비교되는 국가적 특성이었다. 신라는 폐쇄적인 골품제도를 운영함으로써 각 신분층 간에 여러 제약이 뒤따라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고구려는 다종족 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자존적인 천하관에 안주한 채 중국과 오랫동안 군사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통성을 고수하는 데 급급했다.
100만이 넘는 외국인이 거주하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 비춰볼 때, 단일민족이라는 순수한 혈통 논리에 의해 다문화 사회 진입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지구상에 단일민족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해방 직후 일제로부터 독립한 신생국가의 내적 통합과 장차 통일된 민족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단일민족 국가라는 개념이 운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점점 다문화·다인종 사회로 변모해나가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런 폐쇄적 인식은 버려야 할 것이다.
생산력 발전에 힘쓴 백제인들
백제인들의 생업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건 농업이었다. 백제는 기후가 온난하고 강수량이 풍부하며, 지리적으로 한강·금강·영산강 유역에 비옥한 곡창지대를 품고 있어서 삼국 가운데 가장 풍요로운 삶의 터전을 일굴 수 있는 자연조건을 가졌던 덕분이다. 그러나 자연조건에만 의지하지 않고, 국가재정 확보와 민생 안정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농업 생산력을 높이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인 권농 정책을 시행했다. 저수지 축조와 함께 하천 범람을 막는 제방사업을 추진하고, 새로운 농경지를 개척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330년경에 만든 전북 김제 벽골제 축조가 좋은 예다. 벽골제는 길이가 약 3km고, 제방 높이는 4.3m로 연인원 32만2500여 명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흙과 나뭇가지를 층층이 싸서 다지는 이른바 ‘부엽공법’을 이용한 것도 눈에 띈다. 이 공법은 서울 풍납토성이나 부여 부소산성 성벽 축조에도 사용된 당시 높은 수준의 토목기술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안휘성 수현의 안풍당 유적에서 부엽 공법이 확인된 바 있고, 일본 오사카의 사야마이케(狹山池)는 백제의 선진 부엽공법 기술을 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으로 철제 농기구를 확대 보급하고 농사일에 우경을 실시했다. 백제의 농기구로는 논밭을 가는 따비·쇠괭이·쇠삽날, 그리고 수확구인 작은 칼과 낫·쇠스랑 등이 사용됐다. 이후 논밭갈이 기구인 ‘U’자형 쇠삽날과 쇠스랑, 중경 제초 작업에 사용된 쇠괭이·호미·살포 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철제 농기구들은 농경지 개간과 경작 규모의 확대, 작업 능률 향상을 한껏 부추겨 농업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 소에다 쟁기를 매어 밭을 가는 우경은 농업 생산의 획기적인 기술 변화로 간주된다. 가축력을 이용해 우경을 할 경우 깊이갈이가 가능해져 종전보다 2.4배의 노동생산력이 향상되고, 아울러 토질을 개선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따라서 우경의 보급과 확대 실시는 작업 효율을 크게 높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나아가 1인당 경적 면적도 확대시켰다.
대전법(代田法)과 간단관개법(間斷灌漑法) 같은 새로운 농업경영 방식도 도입됐다.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하층밭 유구에서 보듯이, 이랑과 고랑에 교대로 파종하는 방식인 대전법은 후경 없이 해마다 밭농사가 가능하도록 했다. 물을 넣고 빼는 방법을 써서 물로 김을 매는 오늘날의 간단관개법이나 습전을 건전으로 만드는 영농 방식으로 농업 생산력을 높인 것도 백제의 눈에 띄는 선진 농법이었다. 이런 농법들은 백제 이주민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농업 생산력 향상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하내 지방의 상습지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곳곳에 저수지와 수리 관개시설을 만들고 농업 생산력을 종전보다 단위 면적당 3배나 늘려 5세기에 이른바 ‘농업혁명’을 이뤘다고 한다.
지배층의 놀이, 일반 백성의 축제
백제의 신분층은 크게 지배층인 왕과 귀족, 평민층, 그리고 천민으로 나누어진다. 왕과 귀족들은 관직과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배 세력이었다. 그들은 수도인 왕경에 거주했고, 정치·경제·문화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백제는 유명한 가문으로 왕족인 부여씨 외에 사씨·연씨·협씨·해씨·진씨·국씨·목씨·백씨의 8개 대성귀족이 있었다. 지배층은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놀이문화도 독점했다. 중국 역사서에 백제인이 좋아하는 놀이 풍속으로 바둑·장기·투호·악삭·농주·저포와 윷놀이를 소개하고 있는데, 대부분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다. 투호는 화살을 항아리에 던져 넣는 놀이이고, 악삭은 주사위 놀이이며, 농주는 곡예사들의 재주에 해당한다.
지배층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사냥과 바둑이었다. 사냥은 무술을 익히기 위한 놀이였으며, 활쏘기 실력은 국왕이 되는 데 중요한 재능으로 받아들여졌다. 바둑은 백제 상류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놀이였다. 제21대 개로왕이 바둑내기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고구려가 밀파한 간첩 도림의 꾀에 빠져 왕도 한성을 상실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잃을 정도의 국난을 겪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신선놀음에 미쳐 나라를 망친 꼴이 된 것이다.
반면 일반 백성들은 촌락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내고 각종 공사에 동원됐다. 그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부유한 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했다. 백성의 세금은 토지세에 해당하는 조세와 특산물을 세금으로 내는 공물세, 그리고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노동력 징발이 있었다. 백제는 한 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차등 징수했는데, 쌀과 옷감 원료인 베·견직물·삼베 등 현물로 징수했다. 군역은 3년이 원칙이었으나 잦은 전쟁으로 백성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백성들이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재난을 당하면 생존 기반을 상실해 결국 유민의 신세가 되었는데, 이는 사회 불안 요소일 뿐 아니라 국가재정에 큰 위협이 됐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민생 안정을 위해 여러 시책을 강구했다. 6세기 초 무령왕대에 시행한 수리 제방시설 축조·정비 사업이 좋은 예다. 유민들의 귀농 조처는 곧 농업 노동력 확보를 뜻하는 동시에, 조세 징수와 노동력 징발의 기반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기 위한 집단적인 축제를 열었다. 지배층들이 놀이문화를 독점했지만, 일반 백성들은 명절이나 세시풍속을 통해 지친 삶의 애환을 달랬다. 백제의 토착적인 세시풍속으로는 5월과 10월에 행하는 농경의례와 12간지에 맞춰 행하는 세시풍속 등이 있었다. 이는 풍년 기원과 추수 감사에 집중된 벼농사 생활권의 세시풍속이다. 일반 백성들은 지배층처럼 붉은색·자주색 비단옷을 입지 못하고, 주로 삼베나 갈대를 엮어서 만든 흰색 의복을 즐겨 입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백제는 강과 바다로 이어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해외 활동에 적극 나섰다. 한강·금강 등 큰 강과 서해·남해를 연결하는 내륙과 연안 수로 교통망은 백제의 대외활동을 촉진하는 좋은 조건이었다. 강은 비옥한 평야가 열려 있어 농업생산력이 매우 풍부하고, 자연의 방어시설이 되며, 수량이 풍부해 서해로 연결되기 때문에 수운 교통로와 교역로 기능을 했다. 한강과 금강에 도읍지를 정한 것도 이런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해 국가 발전의 전기가 됐다. 아울러 서해를 통해 중국 남조와 일본열도의 왜를 연결하는 해상 활동을 전개해 국가 발전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처럼 백제가 활발한 대외 교섭에 나선 데는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적 안정과 격화되던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배경이 깔려 있다.
웅진 시기(475~538)에 중국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공주 무령왕릉이다. 이 시기는 웅진 천도 직후의 정치적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고구려에 대해 공세적이 될 정도로 정치적 안정을 찾은 때였다. 무령왕릉의 구조가 중국 남조의 묘제를 모방했고, 묘지와 매지권 등 남조의 매장 관행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를 통해 무령왕대에 백제 지배층이 중국 남조 문화에 경도됐을 정도로 남조 문물을 적극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사비 시기(538~660)에는 남조뿐 아니라 북조와의 교류도 활발했다. 6세기 후반 위덕왕대에는 남조 청자만이 아니라 북조계의 자기도 유입됐다. 부여 정림사지와 능사에서 출토된 농관을 쓴 도용(籠冠陶俑)은 북위 영녕사(永寧寺)의 것과 거의 같다. 이는 위덕왕대에 남북조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조 이외에 북조 국가인 북제·북주에까지 교섭 관계를 넓혔음을 보여준다.
수입, 백제화, 수출, 집단 이주
백제인은 문물의 수입뿐 아니라 수출도 활발히 했다. 새로 수용한 선진 문화를 개성이 있는 자기 문화로 변모시켜 이웃 신라나 가야, 그리고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에 전파하는 교량 역할을 수행했다. 백제는 역사적으로 왜와 깊은 우호관계를 맺었다. 단순한 문물 교류에 그친 게 아니라 많은 주민이 집단 이주함으로써 일본에 직접 선진 기술과 고급 문화를 이식했고, 이는 일본 고대국가 수립과 고대문화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지배층 간에 권력다툼이 심화되고 고구려의 남진 공세가 격화되면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일본열도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있었다. 5세기 후반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가 17년 동안 왜에 체류하면서 왜가 친백제 노선을 유지하도록 외교 활동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는 백제계 이주민을 통솔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왜인이 백제에 건너와 관료로 활동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백제의 중심부와 영산강 지역에서는 일시적으로 왜계 고분과 문물이 출현했다. 공주 단지리의 왜계 횡혈묘와 영산강 유역의 전방 후원형 고분과 왜계 유물들이 이런 교류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백제와 왜의 긴밀한 관계가 6세기 이후에도 이어진다. 백제는 왜에 고대국가 통치 기술과 지배 이념 확립에 필요한 새로운 선진 문물을 제공했고, 왜는 반대급부로 백제에 유사시에 약간의 군사와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이 시기 양국 관계에는 물적 교류 못지않게 인적 교류도 활발했다.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많은 이주민들이 일본열도에 건너갔다. 이들이 지니고 있던 선진 기술과 지식, 그리고 불교·유학·도가사상·천문·역법 등 고도의 정신문화 요소는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과 고대문화의 바탕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주민 중에 왜 왕권과 관계를 가지며 두드러진 역할을 한 유력한 씨족들이 나타났는데, 진씨(秦氏)·동한씨(東漢氏)·서한씨(西漢氏)·길사집단(吉士集團)·소아씨(蘇我氏) 등이 유명하다. 특히 소아씨는 웅진 천도 때 문주왕을 보필했던 목협만치(木?滿致)와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병관좌평 해구와 권력을 다투다 패하자 많은 주민들과 함께 왜로 망명했다. 소아씨는 6~7세기 중엽 천황의 외척이 돼 왜 왕권 최대의 정치 세력을 형성한 백제계 이주민 출신이었다. 소아씨는 백제로부터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불교를 흥륭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양기석 충북대 교수·한국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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