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오브제 미술의 성과 보여주는 ‘일상의 연금술전’… 연탄 · 국수 · 면장갑 등이 상상력의 소재로
글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경기도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 연탄이 전시되고 있다. 마치 전시실 한 모퉁이가 연탄창고로 변신을 꾀한 듯하지만 엄연히 미술관에서 20여년 동안 화단 경력의 작가 박불똥씨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연탄 옆에는 (2004)라는 작품 이름이 버젓이 표기돼 있다. 그만의 ‘유쾌한 신랄함’으로 사회적 모순을 꼬집었던 작가는 일상에서 효용성을 잃어버린 연탄이 박제화된 작품보다 얼마든지 위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관객들은 ‘오늘의 미술’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며 새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불을 지피는 구실을 잃어버린 연탄이 일상과 권력, 환경을 생각하는 성찰의 도구로 거듭난 셈이다.
연탄 3333장이 주는 ‘유쾌한 신랄함’
미술관에 연탄이 전시되기까지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올해 초 전시기획자가 박불똥씨에게 전시 의뢰를 했을 때 흔쾌히 응했다. 콘텍스트에서 이미지와 오브제를 도려내는 콜라주로 널리 알려진 작가는 일상의 사물을 재발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박씨는 본격적인 작품 설치에 들어갈 즈음에 모눈종이에 아이디어를 스케치한 종이 한장을 보냈다. 가로·세로 3m, 높이 3.5m 면적에 연탄 3333장(실제 작품에는 3500여장 소모)을 쌓겠다는 아이디어였다. 문제는 연탄의 수분이 빠지면 연탄가루가 전시공간을 떠돌며 다른 작품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파고다’ 옆에는 연탄가루에 영향을 덜 받을 작품을 배치하고 실내 정화용 바람 세기도 조절하기로 했다.
이처럼 국립현대미술관의 2004년 봄 기획전시 ‘일상의 연금술’전(6월27일까지)에 전시되는 70여점의 오브제는 일상의 사물들이 비범한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여기에서 23명의 작가들은 일상의 연금술사 구실을 한다. 2000년을 전후해 국내 미술에서 폭발적으로 높아진 일상에 관한 관심을 다양한 작품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김경운 학예연구사는 “최근 미술계의 관심이 다시 회화쪽으로 이동하기에 그동안의 오브제 작품 성과를 적절한 방식으로 매듭을 짓는 게 필요했다. 이번 전시는 70대의 원로작가에서 20대의 신진작가까지 참여해 국내 오브제 미술의 성과를 총체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관객들은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일상적으로 보았던 사물들의 놀라운 변신을 목격하게 된다. 작가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DIY 공방에서 ‘반쪽이 마을’을 가꾸며 만화가로 더 알려진 작가 최정현씨는 키보드와 마우스, 자동차 걸레와 의자 등받이·팥 등등의 재활용품을 조합하고 변형시켜 신비로운 조형물로 재탄생시켰다. 마치 피카소의 (1942)에서 자전거 손잡이가 황소의 뿔로, 안장이 머리로 변신했던 것을 보는 듯하다. 키보드의 자판으로 작품 제목을 단 (2004)의 재료는 거대한 뱀으로 변신한 키보드를 쥐(마우스)들이 공격하는 형상이다. 하잘것없는 개인이 집단의 힘으로 권위에 맞서는 모습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사실 일상의 사물들이 미술계의 주요한 논점으로 떠오른 것은 1990년대부터다. 당시 거품경제의 수혜를 입어 활황을 누리던 미술시장은 다양한 공급처를 찾아나섰다. 주류로부터 비껴나 있던 오브제 작가들도 어엿한 미술품 생산자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20세기 초부터 작가들은 산업사회의 부산물인 평범한 사물에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안규철씨의 (2004)은 원룸을 재현해 천장에 매단 작품으로 현대인의 부유하는 삶을 표현했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그대로 작품의 재료로 활용한 함진씨의 (愛玩·2004)과 자전거와 시험관, 나무젓가락 등을 이용한 박계훈씨의 (2003) 등도 사물을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국수’도 처절하게 생명 연장했다오
한편 대량생산과 소비로 이루어진 사회현실에 눈을 돌린 작가들은 사물의 반복과 집적을 통해 독특한 미적 체험의 기회를 이끌어냈다. 사물의 변신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설치작가 조성묵씨의 (2004). 종이·네온·용수철·흙·타이어 등을 재료로 사용해 ‘사물의 예술화’를 꾀했던 조씨는 국수가닥이 그대로 주방 바닥에 꽂히는 것을 본 뒤, 국수를 현대적 소재로 활용한 연작을 내놓고 있다. 호텔 객실을 연상케 하는 공간은 관객들을 동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공중에 빈 배가 있고 바닥에는 ‘커뮤니케이션’이라 쓰인 침대와 의자, 탁자 등이 놓여 있다. 공간을 빼곡히 채운 것은 놀랍게도 부스러지기 쉬운 국수가닥들이다. 작가는 바닥이나 소재의 표면에 부스러기 국수들을 깔아놓은 뒤 국수를 수북하게 꽂아놓았다. 그 위에 스프레이를 뿌려 국수가닥이 움직이지 않도록 했다.
산업사회의 뒤안길에서 서서히 밀려나는 일상적 사물들은 다양한 변신으로 생명 연장을 꾀했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는 사물의 처절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물론 세련된 감각으로 완성도를 높인 조형적 실험은 설치와 회화의 ‘합일’을 꾀하기도 한다. 면장갑을 염색해 사각 기둥에 붙여놓은 정경연씨의 (1995)는 설치 미술의 진화를 예고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밤무대 의상이나 핸드백 장식에 쓰이는 ‘시퀸’(sequins·반짝이)을 활용한 노상균씨의 (2002~3)은 폴리에스터 레진과 유리섬유 위에 붙인 시퀸이 조형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구실을 했다. 룸살롱에서 쓰이는 금장 접시에 모조 보석을 올려놓은 정소연씨의 (2004)는 ‘가짜 디저트’에 삶의 욕망을 고스란히 담았다.
일상에서 밀려나는 산업사회의 부산물들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기도 한다. 여기에는 진짜보다 진짜 같은 가짜가 넘쳐나는 세태가 녹아 있다. 이동욱씨의 (2003)에는 겉포장에 그려진 인물이 스컬피로 만들어져 캔의 내용물로 채워졌으며 소시지 비닐을 벗기면 (2004)가 튀어나오는 듯한 형상이다. 고속도로변에 서 있는 대형 입간판을 연상케 하는 최두수씨의 (2004)에서는 이발소 형광등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변신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텔레비전 뉴스 앵커의 “비가 와도 춥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요”라는 한가한 멘트까지 들려줄 정도로 오브제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보는 눈이 있는 관객이나 문외한이나 나름의 눈높이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일상의 연금술’에서 비롯된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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