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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준화, 정말 매맞을 일인가

등록 2003-11-13 00:00 수정 2020-05-02 04:23

제대로 한번 시시비비 가려보자… 비평준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허점투성이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평준화 정책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제대로 한번 시시비비를 따져봐야 할 때다. 평준화 비판론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조목조목 반박해본다.

고교 평준화는 교육철학의 문제다. 교육의 중점을 민주시민 양성과 사회통합에 두느냐 아니면 국가 경쟁력을 담보할 인재 양성에 두느냐에 대한 견해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쉽게 풀리지 않듯, 평준화 논쟁도 원론적 방법으로만 접근하면 그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살인적 입시제도로 ‘교육’이 극도로 왜곡된 우리 사회는 더욱 그렇다. 생각해보라. 수능시험 하나로 자녀의 미래가 결정되는 지금,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경제적 능력까지 뒷받침되는 학부모들한테 사회통합이 어떻고 민주시민 양성이 어떻고 얘기한들 그것이 귀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그래서 은 최근 보수언론과 일부 관료, 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비평준화 주장의 문제점에 대해 원론적인 접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비평준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조목조목 반박함으로써 그 논리의 위험성을 입증해 보일 것이다. 고교 평준화에 대한 학자들의 풍부한 연구와 교육인적자원부의 정확한 실태 조사 자료는 이런 ‘실증적 분석’에 많은 도움이 됐다.

△ 비평준화로 사교육비 잡는다?

비평준화론자들이 제시하는 근거 중 가장 학부모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것은 ‘비평준화로 사교육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평준화가 학교 선택권을 제한해 오히려 사교육 수요를 증가시켰기 때문에 평준화를 깨뜨리면 사교육비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로 경제학자와 경제단체들이 이같은 주장을 한다는 점에서 많은 학부모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이주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2002년에 발표한 ‘학교정책과 과외의 경제분석’이라는 논문에서 국내 사교육비 관련 자료의 실증적 분석을 통해 “평준화 정책이 당시 기대했던 것처럼 과외를 감소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비평준화 지역 학생들이 과외를 줄이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평준화가 사립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선택권을 묶어놓는 바람에 여기에 들어갈 돈이 온전히 사교육비로 몰렸고, 그 결과 경제력에 의해 교육 수준이 결정되는 불평등한 교육 구조가 양산됐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 결과는 일부 경제관료와 경제학자들이 비평준화를 주장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자주 인용됐다. 그러나 이 연구는 국내 사교육 실태와 크게 차이가 나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장수명 박사는 “사교육비는 학교 교육의 질과 관련 있는 것이지, 평준화 여부와 관련 있는 게 아니다”라며 “오히려 비평준화로 중학교 학생들의 사교육 수요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교육부 자료를 보면 장 박사의 지적이 설득력이 있다. 지난 2000년 교육인적자원부가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초·중·고 학생들의 사교육비 실태를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사교육비는 초등학생이 3조6천억여원으로 가장 많고, 중학생이 2조여원, 고교생이 1조4천억여원 순이었다. 초등학생의 경우 예·체능 과목에 대한 사교육이 절반 정도 차지하는 점을 고려하면, 입시를 위한 ‘순수 사교육비’는 중학생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교 평준화를 해제할 경우 이른바 ‘명문고’를 가려는 중학생들의 사교육 수요가 크게 늘어 결과적으로 전체 사교육비 규모가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비평준화에 따른 고교생의 사교육비 절감 효과도 기대할 수 있겠지만, 국내 대학입시 상황을 고려해볼 때 그 효과는 작을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로 학생과 학부모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 11월7일 밤 경기도 안양시 평촌동 ‘먹자골목’ 학원가에서 만난 강아무개(중3)군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학원에 안 가면 불안하니까 모두들 학원에 다닌다”며 “평준화로 고교입시 걱정은 덜었지만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학원을 안 다닐 수 없다”고 말했다. 대학입시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평준화 여부와 관계없이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안양은 성남·고양·부천과 함께 지난해부터 고교 평준화를 시행하고 있다. 비평준화 주장에 대한 이곳 학부모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안양에 사는 한 학부모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평준화에 대한 찬반이 뚜렷하게 갈린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부모는 “교육제도가 바뀔 때마다 학원비만 늘어났는데, 요즘 비평준화 얘기가 나오니 또 불안하다”고 꼬집었다. 군포고등학교 이성 교사는 “사교육은 고교 평준화보다는 대학입시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교육비 얘기는 교육 실상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지적했다.

평준화와 사교육비가 무관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조사 결과도 있다. 경기도 교육청이 성남·고양·부천·안양 4개 신도시의 학원 수강생 수를 평준화 이전(2001년)과 이후(2003년)로 나눠 조사한 결과, 성남과 부천은 줄었지만 고양과 안양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부 유은종 사무관은 “이는 사교육이 평준화 여부와는 크게 관련이 없고, 인구와 경제적 수준 등 다른 요인과 관련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평준화가 학력을 떨어뜨렸다?

고교 평준화에 대한 고전적 시비가 바로 ‘하향 평준화’다. 는 최근 평준화의 폐해를 지적하는 기사에서 “평준화로 중고생들의 학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으며, 특히 상위권 학생들이 그 정도가 심하다”고 주장했다. 서울대가 올 초 이공계 신입생을 상대로 실시한 수학능력 측정시험에서 100점 만점에 30점 미만을 받은 학생이 전체의 13.7%로, 지난 2001년의 7.4%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00년 32개 회원국의 15살 학생을 대상으로 벌인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결과 상위 5% 학생들의 읽기 점수가 OECD 평균보다 낮고, 수학과 과학도 예전보다 성적이 떨어졌다고 전했다.

‘하향 평준화’에 대한 반론은 무수히 많아 여기에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다. 대표적인 것은 가톨릭대 성기선 교수(교육학)가 지난해 발표한 논문이다. 성 교수는 1997년 전국 522개교 11만여 학생들의 전국공통모의수능시험 자료를 토대로 평준화와 비평준화 지역 학생들의 점수를 비교했다. 그 결과 상위 10% 이내 학생들은 거의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하위권으로 갈수록 평준화 지역 학생들의 점수가 더 높았다. 성 교수는 “평준화가 학생들의 학력을 떨어뜨렸다는 가설은 아직 학계에서 증명된 바 없다”며 “서울대를 비롯한 상위권 학생들의 실력 저하는 교과 수준의 문제로 봐야지 평준화와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OECD의 PISA에 나타난 상위권 학생들의 학력 저하는 평준화가 아니라 왜곡된 입시제도 탓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PISA를 분석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채선희 박사는 “평준화보다는 입시 위주의 교육이 이런 현상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가장 순위가 떨어진 읽기의 경우 정보확인, 해석, 비평적 고찰로 나뉘어 평가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비평적 고찰이 가장 낮게 나왔다. 이는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독서량이 부족해 종합적 사고능력이 다른 나라 학생들보다 떨어진다는 얘기다. 남서울중학교의 한만종 교사는 “상위권 학생들의 문제도 입시에 발목 잡힌 학교 교육을 하루빨리 정상화시켜야 풀린다”며 “평준화가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력 수준을 전체적으로 높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OECD의 PISA 결과 전체적으로 한국은 과학 1위, 수학 2위, 읽기 6위라는 매우 높은 성적을 냈다.

△ 평준화가 계층간 이동을 막는다?

서울대 정운찬 총장은 지난 10월28일 한국은행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고교 평준화로 인해 한국 사회의 계층간 이동이 막히고 있다”며 “지방 명문고를 중심으로 평준화를 폐지해 다양한 학생이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울대 학생들의 40%가 서울 출신이고 △경제·경영·법학과 등 3개 인기과의 경우 60%가 서울 출신인데, 그 중에서도 서초·강남·송파구 출신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통계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다. 이 주장은 서울대 총장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각종 언론매체에서 비중 있게 다뤘고 사회적 파급 효과도 매우 컸다.

정 총장의 주장대로 과연 평준화가 불평등을 고착시킬까. 앞서 언급한 OECD의 PISA는 이와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준다. OECD가 교육 부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은 ‘수월성’(교육 정도)과 ‘형평성’(사회경제적 지위와 학력의 연관성)인데, 우리나라는 수월성(전체 읽기 6위, 수학 2위, 과학 1위)뿐 아니라 형평성 부문에서도 매우 좋은 점수를 받았다. 형평성은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학력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경제적으로 상위 5%에 해당하는 집단의 점수와 하위 5% 집단의 점수의 격차로 평가한다. 한국은 읽기의 경우 33점으로 OECD 평균인 82점보다 무려 50점 가까이 낮았다. 수학과 과학도 각각 50점과 41점으로 OECD 평균보다 월등히 낮았다. 이는 OECD의 교육 모범국가로 평가되는 핀란드와 비슷한 수준으로 교육 구조가 매우 평등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채선희 박사는 “사회 발전과 통합이 조화를 이루려면 수월성과 형평성이 모두 우수해야 하는데, 한국은 수월성도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고 형평성도 양호해 OECD 기준으로 매우 모범적인 국가로 나타났다”며 “이는 평준화가 교육 이념을 잘 구현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방 명문고를 육성해야 한다는 정 총장의 주장도 현실과 비교해볼 때 앞뒤가 맞지 않는다. 평준화를 실시하다 지난 1991년 비평준화로 돌아선 강원도 원주시의 경우 평준화 때보다 서울대 합격자 수가 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또 비평준화 지역 ‘지방 명문고’의 서울대 합격자도 해마다 줄고 있다. 평준화 지지자들은 최근의 평준화 논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외친다. ‘비평준화론자들이여, 근거를 갖고 얘기하라!’

글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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