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당이 돌아왔다, 가장 붉은색의 장미로.
영국 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한 한 편의 드라마가 탄생했다. 지난 9월12일 발표된 영국 노동당의 대표 선거 결과, 그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변방의 좌파 의원 제러미 코빈(66)이 총 42만2664표 가운데 25만1417표를 얻어 59.5%의 압도적인 지지로 승리를 거뒀다. 이는 토니 블레어가 1994년 당대표 선거에서 받았던 57%를 웃도는 수치다. 애당초 코빈의 선거 참여 목표는 당선과 거리가 멀었다. 코빈 자신은 물론 당 안팎의 누구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당내 정책 토론과 논쟁에 기여하겠다는 소박한 목표가 있었을 뿐이다.
후보가 되는 것조차 큰 도전코빈에게는 대표가 아니라 후보가 되는 것조차 큰 도전이었다. 전체 노동당 의원 232명 가운데 코빈의 확고한 지지자는 고작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후보가 되려면 최소한 의원 35명의 서명이 필요했다. 후보 등록을 위해서는 코빈을 지지하지 않는 20명이 넘는 다른 의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가장 늦게 출마를 결심한 탓에 시간도 촉박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지지자들이 설득에 나섰다. 후보 등록 마감 2분 전, 자신을 포함해 의원 36명의 서명으로 가까스로 등록을 마쳤다. 가장 초라한 출발이었다. 그런데 선거운동이 시작된 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당내 토론 활성화라는 취지에 공감해 이름을 내준 의원들 가운데 몇몇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는 후문이다.
제러미 코빈의 당선 요인은 무엇보다 그 자신이다. 단호한 정치적 태도, 일관성, 진정성, 솔직함, 겸손함 등은 그의 반대자들도 칭송해 마지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검소함과 절제는 의원들 가운데 전설로 통한다. 일단 의원 중에서 가장 세비를 적게 쓴다. 자가용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초선 의원 시절에는 그의 어머니가 정성스레 짜준 스웨터를 입고 다녔다. 보수당 의원들은 그의 남루한 옷이 의원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며 공격했다. 덕분에 그의 스웨터는 유명세를 탔다.
1966년, 16살 학생 코빈은 핵무기 반대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자신의 첫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노동조합 활동가로 한동안 일했고, 1974년 런던 북부 지역의 구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83년 런던 최북단의 북이즐링턴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다. 올해 총선까지 포함하면 연달아 무려 8번의 총선에서 승리했다. 처음의 40%를 제외하면 줄곧 50~70%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지난 32년간 의원직을 유지해온 그는 자신의 활동을 의회의 틀 안에 가두지 않았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늘 자신의 능력을 더 큰 운동의 자원으로 제공했다.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과 연대하고 거리에서 늘 함께 싸웠다. 2000년대의 반전평화운동, 최근의 긴축정책 반대운동의 선두에도 늘 그가 있었다. 당대표 선거 기간에 마침 보수당 정부가 밀어붙인 복지 삭감을 뼈대로 한 법안에 대한 투표가 있었다. 노동당 지도부는 기권 방침을 택했고, 나머지 세 후보는 이를 따랐다. 코빈 홀로 반대표를 던졌다. 정부의 긴축정책에 분명하게 반대를 표한 후보는 그가 유일했다.
그는 기존 노동당 지도부의 방침에 500차례 이상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노동당에서 가장 반항적인 의원이라는 꼬리표도 붙었다. 반전운동에 앞장섰고, 블레어 정부의 이라크 침공에도 격렬히 반대했다. 그는 당대표가 되면 이라크 침공에 대해 당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여론조사 결과 코빈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언론은 블레어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는 코빈이 이끄는 노동당은 ‘절멸’할 것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1983년 같은 해에 의회에 입성한 두 사람은 2015년 외나무다리에서 다시 마주쳤다.
3파운드 선거인단 83.8%·기존 당원 50% 지지보수당과의 선명한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 노동당에 환멸을 느껴온 당 안팎의 당원과 대중은 코빈의 등장을 열렬히 반겼다. 그와 늘 함께해온 시민사회 및 노동조합 활동가들뿐 아니라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그의 존재를 처음 접한 지지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유세장은 가는 곳마다 만원이었다. 미처 입장하지 못한 수백 명의 군중 탓에 그는 매번 행사장 안팎에서 두 번의 유세를 해야 했다. 화려한 웅변이나 열정적인 선동은 없었지만 그의 담백하고 명쾌한 연설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영국의 양대 최대 노조인 유니슨과 유나이트의 지지까지 등에 업자 코빈의 선거운동은 기세가 더욱 높아졌다. 기꺼이 3파운드의 등록비를 내고 선거인단으로 참여한 지지자들의 성원은 당 안팎의 여론을 움직였다. 사실 이 3파운드 선거인단을 도입한 선거제도 개혁은 에드 밀리밴드 전임 대표의 작품이었다. 대다수의 평론가들은 이 제도가 노동조합이 당의 의사결정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줄이고, 일반 대중의 참여를 유도해 당을 더욱 중도주의로 이끌 것으로 보았다. 블레어 지지 성향의 후보들이 이 제도의 덕을 볼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코빈의 급부상과 함께 3파운드 선거인단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자 음모론이 튀어나왔다. 코빈의 당선을 도와 노동당을 집권과 거리가 먼 정당으로 전락시키려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역선택을 위해 잠입한 침입자를 걸러내기 위해 선거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코빈과 그 지지자들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그리고 그간 노동당과 멀어졌던 사람들의 열정적인 참여를 폄훼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선거 결과, 예상대로 이들 비당원 선거인단 대부분은 코빈의 지지자로 드러났다. 그는 비당원 선거인단의 10만5600여 표 가운데 무려 83.8%를 쓸어갔다. 하지만 기존 당원과 가맹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지지 또한 각각 50%와 58%에 이르렀다. 이 3파운드 선거인단 제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낙승은 충분히 가능했다.
코빈 반대자들은 한목소리로 그의 당선은 노동당 집권 의지의 포기라고 외쳤다. 근거는 단순했다. 치욕적인 1983년 총선 대패의 원인이 바로 당의 좌향좌 탓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 1983년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가 대승한 것은 포클랜드 전쟁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전쟁 이전 보수당의 지지율은 대략 27%에 머물렀으나 1982년 전쟁이 일어나자 이는 50%를 상회했고 이후에도 40% 이상을 유지했다. 훗날 대처도 이 전쟁이 당시의 정치 지형을 근본에서 바꿔놓았다고 인정했다. 아무튼 이런 논리라면 당의 우향우는 선거 승리를 가져와야 했다. 그러나 1987년과 1992년의 총선 패배는 이를 단숨에 반박한다. 1997년 블레어의 선거 승리가 있지만, 이 또한 각종 스캔들과 내분 등으로 지리멸렬했던 보수당의 탓이 컸다.
지지자들 “노동당이 돌아왔다”며 환호코빈의 당선이 발표된 날, 지지자들은 드디어 ‘노동당이 돌아왔다’며 환호했다. 블레어가 전면에 등장하고부터 금기시돼온 노동당의 옛 당가인 적기가(The Red Flag)가 다시 울려퍼졌다. “우린 지킬 것이다, 여기 휘날리는 붉은 깃발을.” 후렴의 이 마지막 소절은 지지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전통적인 지지층을 배반해온 노동당, ‘붉은 토리’(Red Tory)라는 비아냥을 들어온 노동당은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물론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 의회노동당 다수파의 높은 벽이 기다리고 있다. 풀뿌리 운동과 당원 민주주의의 힘으로 의회 반대파의 힘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을지가 당장 관건이다. 궁극에는 대처와 블레어의 정치적 유산을 넘어설 수 있는지가 코빈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코빈의 지역구에서 진행된 그의 마지막 유세에서 지지자들은 하나같이 외쳤다. 그의 당선은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결과를 거머쥔 지지자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3만 명. 그가 당선된 지 불과 이틀 만에 늘어난 노동당 당원의 수다.
콜체스터(영국)=최광은 영국 에식스대학 정치학과 박사과정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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