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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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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 특식이 빵과 버터…

등록 2001-09-12 00:00 수정 2020-05-02 04:22

우리가 내린 결정에 다소 당황해하며 진료실을 나왔다. 출산예정일은 12월28일경이지만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아이를 낳게 되면 크리스마스 휴가로 병원 인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므로 조기분만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사의 권유에 동의를 한 것이다.

다음에는 필히 부활절, 크리스마스, 여름 바캉스를 피하리라 다짐하면서 이렇게 내 첫아이 출산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병원에 들어가야 할 날짜가 가까워올수록 초조와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주변 경력자들로부터 이미 이런저런 정보를 귀가 닳도록 얻어들었겠지만 프랑스에서의 출산에 관련한 구체적 정보는 책을 통해 얻은 지극히 추상적인 것뿐이었다. 어쨌든 예전에 배꼽잡고 보았던 프랑스영화 <네프므와>(neuf mois)의 마지막 부분, 출산과정을 희화화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지난 한달간의 출산교육에서 배운 호흡방법을 반복연습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남편도 긴장하는 눈치였다. 분만실 동반이 반드시 의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아내를 격려해주고 태어날 아이의 아빠로서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맞이한다는 것은 놀랍고 ‘환상적인’ 체험이므로 대부분의 남편들이 그것을 선택하는 실정이었다. 산파들은 분만실에서 기절한 남편들을 옮기느라 힘들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비위와 체력이 약한 남편들은 아예 들어오지 말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평소 엄살이 심한 남편이 “당연히 옆에 있어야지” 하고 큰소리치는 것을 보며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분만실에 들어가자 벽에 텔레비전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정신을 집중해야 할 중대한 상황에 어떤 임신부가 텔레비전을 지켜볼 여유가 있을까? 아니나다를까. 산파가 와서 “텔레비전 켜줄까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분만촉진제를 투입한 뒤 오후 1시부터 규칙적인 진통이 시작되었다. 무통주사를 놔줄 마취과 의사는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게 와 나는 아플 것 다 아파하면서 진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지쳐버린 내가 마지막 순간에 아이를 힘주어 밀어내지 못하자 산파가 마치 쿠션을 깔고 앉듯이 내 윗배 위에 털썩 앉더니 두손으로 아이를 밀어내기까지 했다. 틈틈이 밖에 나가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먹으면서 당당히 버틴 남편은 결국 세상에 나온 아이를 나와 함께 맞이했다.

그 다음날 아침식사가 들어왔다. 출산을 방금 마친 산모에게 바게트, 버터, 잼, 커피라니. 미역국 대접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생각도 안 했지만 예상 밖의 식사를 맞이하니 그 황당함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아직 프랑스식 아침식단에 익숙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 딱딱한 빵을 들뜬 이로 씹는 둥 마는 둥 넘겼다. 결국 이 말을 전해들은 친구가 끓여온 미역국을 나는 아주 행복해하며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러나 그것도 그날로 막을 내렸다. 병실에 들어온 의사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창문을 활짝 열어놓더니 병원에서 주는 것 이외의 음식은 먹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산후조리에 대한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차이를 설명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출산 이튿날부터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샤워를 하고 ‘빠른 치유를 위해’ 병실 복도를 걸어다녔다.

한국여성은 출산 뒤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한귀로 흘려듣기만 하던 남편이 내가 집에 돌아온 날 던진 첫 말, “미역국 많이 끓여놓았어”는 그동안 내가 문화적 차이로 겪은 ‘시련’들을 녹여버리기에 충분했다고 한다면 좀 과장된 것일까.

파리=신순예 통신원 soonye.sin@libertysurf.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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