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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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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에 눈물의 불꽃이 타오르다

일본 추석, 오봉을 맞아 눈물의 축제로 망자를 보내는 동북지방 사람들… 지진 피해 복구 늦어진 지역의 비탄은 더 깊어
등록 2011-08-25 17:35 수정 2020-05-03 04:26

3·11 동일본 대지진이 5개월째를 맞은 8월11일 오후 2시46분. 동일본 대참사 집중 피해 지역인 이와테·미야기·후쿠시마 3현에 일제히 사이렌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때의 추도 묵념은 8월15일을 전후로 한 일본의 ‘오봉’(백중맞이·일본 추석)으로 이어졌다. 때맞춰 귀성객의 대이동이 시작됐지만, 피해 지역이 고향인 사람들의 귀성길 표정, 신문·방송 등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동북 지역의 오봉 풍경은 예년과는 정반대의 형국이었다.

“죽은 자의 위로에 산 자가 답해야”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8월11일 현재 사망 1만5690명, 실종 4735명)가 가장 컸던 미야기현(사망 9295명, 실종 2425명)의 연안부 오나가와마치에 사는 사토 준은, 쓰나미에 빼앗긴 아내를 찾아 오봉 때도 바다를 서성였다. “아직 유품 하나 발견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내가 계속 자신을 찾아달라고 하는 것만 같아” 사망신고서를 내지 않았다. 지난해 퇴직하고 ‘올해부턴 아내를 돌봐야지’ 마음먹은 지 몇 개월 안 돼 쓰나미에 아내를 빼앗겼다. 그는 아내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으려고 바다와 가장 가까운 피난소에서 오봉을 맞았다. 이와테현 야마다마치의 도요마네 고오(53)는 7월 초까지도 쓰나미에 쓸려간 양친의 사망신고를 내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사망신고서를 내고 7월 말 장례식을 마친 건 “오봉 때 (영령으로) 오시면 잘 맞아드려야 할 것 같아서”였다. 후쿠시마현에서 쓰나미로 10살짜리 아이를 잃은 스즈키 아키라(35)도 “이제껏 마음을 억누르고 참았지만, 오봉에는 마음껏 울 작정”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슬픔을 털고 일어서며 오봉을 견뎠다. 1988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이며, 2007년에 란 노래로 일본레코드대상 작곡상을 받은 아라이 만은 8월12일치 에 이렇게 썼다. “옛사람은, 산 자가 있는 한 죽은 자는 계속 살아간다 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지금 바람과 새와 별로 태어나 당신을 지켜주며 더 이상 울지 말라 위로한다. 죽은 자의 위로에 산 자가 대답해야 하지 않는가.”
매년 이맘때면 마을 사람들의 열기를 달구던 ‘봉오도리’(오봉춤)도, 밤하늘을 현란하게 수놓던 ‘하나비 마쓰리’(불꽃축제)도,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상처와 울분을 고스란히 안고 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치며 금기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내야 할 몫이 있다며 ‘모두가 꺼리는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오봉’도 있었다. 엄청난 희생자를 낸 이와테현 가마이시. 아마쓰 유리코는 “이런 상황에서 무슨 하나비냐”라는 주변의 분위기 속에서도 팔을 걷어붙였다. “모두가 움츠린 채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쉴 게 아니라, 하나비 마쓰리를 계기로 떠나간 사람들을 보내며 하늘 한 번 우러르고 다시 희망을 새기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하늘에, 바다에, 그리고 내일에’라는 표어로 마을의 재건을 염원하는 행사 포스터를 뿌리며 그녀가 추진한 하나비는, 결국 8월11일 저녁 7시 절망의 가마이시 하늘을 붉게 수놓았다. 하나비를 올려다보던 살아남은 사람들의 눈물과 함께, 전국에서 뉴스를 전해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붉게 울었다.

지진에도 삶은 계속된다

미야기현 기센누마시에는 매년 8월14일, 다음해 환갑을 맞는 사람들이 모여 먼저 간 동창생의 위령법요를 행하는 ‘물고제’라는 풍습이 전해진다. 기센누마중학교 1968년 졸업생 480명의 명단이 거의 작성될 무렵 쓰나미를 겪었다. 비록 대참사 뒤라도, “모두 모이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며 주변은 외려 행사를 하자는 분위기였다. 집이 휩쓸려 피난소와 가설주택으로 흩어진 이들, 다른 현으로 전출한 이들을 찾아나서고, 지방지에 광고를 내는 것은 물론 한 사람이 몇십 명에게 전화를 돌린 결과 100명 정도의 출석 답변을 얻었다. 쓰나미가 할퀴고 간 고향 기센누마의 친구들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물고제는 그렇게 “먼저 간 이를 기리고, 하나밖에 없는 고향을 위해 힘을 쏟겠다”는 ‘가버린 친구에게 바치는 맹세’가 되었다.
미나미산리쿠초에서 피아노 교실을 열던 엔도 유카리 원장은 3월11일을 경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음대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다 닥친 쓰나미로 집도 학원도 아끼던 제자마저도 잃었다. 지금은 피난소 한켠에서 텐트 생활을 하고 있다. 피난소에 있는 피아노만 보면 손이 떨리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릴 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며 부모를 잃은 아이, 집이 떠내려간 아이들이 찾아왔다. ‘아직 내가 필요하구나’ 싶어 눈물이 흘렀고, 학생의 집을 빌려 피아노교실을 재개했다. “사실 내가 힘이 돼주기보다 외려 내 자신에게 힘이 되는 아이들을 위해” 그녀는 폐허의 마을에 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지는 오봉을 아이들과 함께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껏 많은 피해지에서 사람들이 가족의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오봉마저도 쓰나미에 빼앗겨버린 상황이다. 미야기현 나토리시 기타가마 지구의 농부 사쿠라이 스미코(67)는 지진 당일, 장남과 차남이 함께 준 효도 선물로 규슈 지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TV로 집 근처가 쓰나미에 휩쓸리는 영상을 보았다. 집과 아들 둘을 한꺼번에 잃고 유골만 남은 상태에서 장례는 치렀지만, 쓰나미로 떠내려간 가족묘를 대신할 납골장을 찾지 못한 채 황망하게 오봉이 흘렀다. 피해 지역 재건 방침 결정이 이래저래 늦어지고, 사원과 지자체들에도 묘비석 철거 작업은 골칫덩인데다, 국가 재건 계획이 결정될 때까지 묘지 개·보수도 기다려야 한다. 특히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주변의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지역 유족들의 비탄은 오봉인 만큼 더욱 뼈에 사무친다.

상처가 아문 오봉이 다시 오길

피해 지역 3현에 인접해 동일본 대지진 당시 물자 수송과 지원 활동의 거점이었으며, 지진·원전 사고로 인한 피난민 8만7063명 중 1만여 명이 대피해 있는 야마가타. 야마가타시 거주 건설기술자 요코가와 마모루(61)는 오봉 직전까지 극심한 피해 지역인 미야기현 미나미산리쿠초 시즈가와에서 가설주택 공사에 참여했다. 그는 “피해 지역에 가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처참했다. 5개월이 지나도록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내가 머문 곳이 그 지역에서 유일하게 가동되는 호텔이었는데, 피난민 500여 명이 집단으로 거처하고 있었다. 성묘할 곳도 없는 그들의 오봉은 참담한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철골만 남은 공동청사에서 추도식 겸 축조식을 한 뒤 공사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고향집 형제 가족 3대와 예년과 다를 바 없이 보내는 오봉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음 한켠이 무겁다. “한 채당 500만엔(약 5400만원) 정도 들여 지은 가설주택들이 2년 뒤면 다시 철거된다. 그때까지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또 올해와 같은 오봉을 맞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도쿄(일본)=황자혜 통신원 jahye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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