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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축제, 여전한 숙제

월드컵 1년 뒤 돌아본 같고도 다른 남아공의 오늘… 범죄 줄고 사회기반시설 늘었지만 다수 빈곤층의 삶 변화 없어
등록 2011-06-16 17:05 수정 2020-05-03 04:26
»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경기장은 주변 지역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남아공 소웨토 사커시티 월드컵 주경기장 모습. 한겨레 류우종

»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경기장은 주변 지역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남아공 소웨토 사커시티 월드컵 주경기장 모습. 한겨레 류우종

1년 전,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월드컵은 끝없이 울려대던 부부젤라 소리와 함께 성공적으로 끝났다. ‘무지갯빛 나라’ 남아공에서 열린 월드컵의 큰 목표 가운데 하나는 인종과 민족 간 통합을 통한 새로운 국가 건설이었다. 다민족·다문화 국가인 남아공은 거대한 스포츠 이벤트라는 시험을 무리 없이 통과했다. 하지만 상당수 시민은 이런 통합의 분위기가 지속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월드컵 뒤 시든 국가 통합 노력 </font></font>

“1년이 지난 지금, 월드컵의 최대 목표였던 다인종·다민족 통합의 국가 건설 측면에서 그다지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각 인종 그룹들은 다시 자신만의 작은 세상으로 돌아갔고, 월드컵 때 단합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월드컵을 잘 치를 수 있을지에 대한 긴장감은 단합된 형제애로 나타났지만 월드컵이 끝난 뒤 그 형제애는 사라진 것 같다. 일시적 효과를 위해 비싼 값을 치른 듯하다.”(소피 나카무라·대학 연구원)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처음으로 인종 간 통합을 이루는 데는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지역 선거에서 많은 정치인이 아직도 인종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에티안 터블란쉬·엔지니어)

물론 사회 통합 면에서 긍정적 평가도 있다. 영어 강사인 템린 지만은 “월드컵이 가져온 축구 열기는 남아공인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월드컵 이후 축구 대표팀에 대한 열기가 생겨났고, 남아공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

남아공 월드컵 이후 1년이 지난 지금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사회기반시설의 확충이다. 교통·통신·방송 등에 대한 투자는 남아공 발전의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많은 도로가 새로 포장되거나 신설됐다. 남아공 대도시인 요하네스버그와 프리토리아를 잇는 80km 구간에는 시속 160~180km로 하루 18시간 운영되는 기차가 다니기 시작해, 공항과 요하네스버스 시내 중심을 편하게 연결한다. 고속도로 곳곳에는 교통현황 표시판도 생겨났다. 버스 전용 중앙차선제가 도입됐고, 시내버스 노선이 재정비돼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는 시민도 편리해졌다. 위험하고 비싸서 이용을 꺼리던 택시는 월드컵 이후 콜택시 회사가 많이 생겨나 훨씬 안전해지고 가격도 저렴해져 젊은이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월드컵이 남아공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던 안전한 대중교통을 가능케 한 것이다. 월드컵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모든 기반시설이 완공되고 안정화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경기장 주변의 환경과 상업시설도 한층 향상됐다. 케이프타운의 경우 월드컵 이전에는 지저분하고 위험한 곳으로 분류되던 지역이 인근 월드컵 경기장과 공원, 팬워크, 새로 들어선 많은 상가와 유흥가 덕분에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거주지로 바뀌었다. 케이프타운에 신설된 팬워크는 월드컵 경기 때 자동차 유입을 줄이려고 시내버스·기차역에서 도시를 가로질러 경기장까지 약 2.6km가 이어진 산책로인데,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 주변 지역도 함께 발전했다. 치안 불안과 넓은 영토 탓에 자동차를 주로 이용하고 좀처럼 걷는 일이 드문 남아공 생활문화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애니메이션 디자이너인 티안스 판 렌스버그는 “1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시민이 자전거 전용도로를 이용하거나 인도로 걸어다닌다. 월드컵 기간 중 유명해진 여러 가게와 식당은 아직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일자리 16만 개 창출, GDP 0.5% 상승 </font></font>

남아공 월드컵 준비 중 가장 큰 걱정거리는 치안이었다. 소매치기나 좀도둑들의 범행은 월드컵 기간에도 발생했지만, 남아공 범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폭력 및 강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월드컵 이후 늘어난 가로등은 범죄 공포를 줄여주었고, 친구들과 함께 저녁식사 뒤 산책로를 걸을 때면 월드컵 이후 달라진 남아공을 느낄 수 있다. 광고회사 편집자인 앙코 헤닝은 “또 다른 변화는 외국 투자자나 관광객이 남아공 범죄 및 치안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이다. 구체적 효과를 논하기는 이르지만, 월드컵 이후 향상된 사회기반시설은 사람들을 공공시설과 야외로 이끌었고, 장기적으로 범죄로 인한 불안감과 범죄 기회를 줄이는 역할을 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얼마 전에는 미국 할리우드 제작팀이 케이프타운의 경기장에서 영화를 촬영했다. 월드컵 이후 세계적 음악 스타들의 대형 콘서트도 여러 차례 열렸다. 시민을 위한 음식축제와 문화축제도 이어지고 있다. 월드컵 경기장은 이제 한 지역의 문화와 스포츠 축제의 중심 구실을 하며 주변 지역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월드컵 뒤 남아공은 아프리카를 세계로 잇는 교두보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올해부터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에 정식 합류한 남아공은 아프리카 53개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27%를 차지하며 아프리카의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월드컵으로 일자리 16만 개가 창출되고 2010년 GDP가 0.5% 가까이 증가하는 효과를 얻었다. 월드컵과 브릭스 가입을 계기로 대외교역 확대에 나서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실질 GDP가 2.8% 성장한 데 이어, 올해는 3.5% 성장할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4월 전망했다.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경기장과 도시 주변만의 발전은 다수를 차지하는 남아공 빈곤층에게는 큰 변화를 안겨주지 못했다. 월드컵 경기장 주변이 집중적으로 발전한 대신 다른 상업지역은 투자액만큼 벌어들이지 못한데다 월드컵 이후 경기가 식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월드컵을 겨냥해 문을 연 식당과 숙박업소들은 월드컵이 끝난 뒤 운영이 힘들어져 문을 닫거나 파산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또 남아공 인구의 24%가 빈곤층에 속하고 실업률은 지난해 24.8%를 기록했다. 물가는 지난해 4.3% 상승한 데 이어 올해 4.9% 상승할 것으로 예상돼 빈곤층의 시름은 깊어질 전망이다. 월드컵 개최를 위해 4조원 가까이 투자한 탓에 늘어난 재정적자를 해결하는 것도 문제다. 대학 연구원인 소피 나카무라는 “처음부터 남아공 시민의 전반적 생활을 높이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가난과 불안정 그리고 계속되는 에이즈와의 전쟁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 것 같다”고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또 다른 시험 앞둔 남아공</font></font>

남아공은 지금, 바로 1년 전에 월드컵을 치렀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잠잠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남아공 시민들은 무엇이 발전했는지, 숙제로 남은 것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성공할지 의문을 품었지만 그 시험을 무사히 치러낸 것처럼, 남아공은 세계라는 방청객 앞에서 또 다른 시험을 치르려고 오늘도 준비 중이다.

케이프타운(남아프리카공화국)=정우현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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