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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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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뜨거, 애국전투의 성화

등록 2008-05-02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티베트 시위 진압 이후 ‘붉은 애국주의 물결’, 광풍은 수그러들었으나 네티즌들의 투쟁은 진행형</font>

▣ 베이징(중국)=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그는 가장 절친한 중국인 친구다. 집들이에 초대받아 간 날, 뜻하지 않게 그의 ‘반서방주의’ 열변을 들어야 했다. 맥주 한 잔을 ‘원샷’한 그가 속사포 같은 말 대포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서방국가 놈들은 도대체가 중국이 잘되는 걸 눈 뜨고 못 보는 거 같아. 우리가 이번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이 그놈들에게 알랑거리면서 눈웃음을 팔았어. 근데 티베트 사건이 터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쾌재를 부르면서 우리를 모욕하는 걸 봐! 게다가 독일 방송에서는 마치 중국 경찰이 티베트 승려들을 개 패듯이 패는 것처럼 화면을 조작하는 수법까지 써서 서방 사람들의 판단을 오도하고 있다고! 자기들도 온갖 인종차별을 다 하는 주제에, 뭐, 우리 보고 인권의 ‘인’자도 모르는 폭도들이라고 말하는 싸가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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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한 잔 걸친 탓인지 그는 자신이 ‘박사’ 출신의 촉망받는 국가 공무원 신분이라는 걸 잠시 잊은 듯했다. 그의 눈과 입은 서방국가와 서방언론에 대한 증오로 불타는, 거의 폭발 직전의 활화산과도 같았다. 그날 그는 미처 다 토해내지 못한 분을 삭인 채 자리를 일어서는 게 못내 안타까운 듯, 헤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짜증나는 건 서양의 지독한 편견”

“우리가 가장 짜증나는 건 서방 사람들의 지독한 편견이야. 중국이 못살고 가난할 때는 사회주의 계획경제 탓이라고 하다가, 경제가 발전하고 자기들 밥줄까지 위협하게 되니까 이제는 ‘중국 위협론’ 따위의 궤변을 늘어놓지. 티베트 사건을 빌미로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는 발상만 해도 그래. 자기 조상들이 예전에 차지했던 식민지에 대해선 철저하게 ‘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티베트를 중국 땅이라고 하면 ‘강도’라고 하지. 이보다 더 심한 편견이 어디 있어?”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인들의 ‘전투’가 시작됐다. 이름하여 ‘애국전투’다. 전투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불이 지펴졌다. 지난 3월14일 티베트 시위 사건이 터진 뒤, 서방의 ‘반중국 보도’에 항의하는 중국 네티즌들이 인터넷 안팎에서 속속 집결하면서 ‘붉은 애국주의 물결’이 전 중국에 넘쳐나고 있다.

“임신 8개월째다. 티베트 사건을 기점으로 나는 뱃속의 아기와 함께 아래 열거한 일들과 같은, 중국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매일 하고 있다. 첫째, 유튜브에 티베트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동영상이 있으면 스크랩한다. 둘째, 1인당 1통씩 〈CNN〉과 백악관 대변인에게 항의 메일을 보낸다. 셋째, 자동차 뒤에 ‘나는 2008 베이징올림픽을 지지한다’(I Support Beijing 2008 Olympics)라는 슬로건을 붙인다. 넷째, 인터넷에서 티베트 독립분자들과 만나면 설전을 벌인다. 다섯째…. 서방언론이 보도한 티베트 사태 관련 보도를 절대로 믿지 마라. 그들은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뿐이다. 오늘 이 순간부터 우리의 모든 분투는 서방인들에게 우리를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서방인들에게 티베트 사건의 진상을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얘기를 듣지도 보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의 분투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며, 우리 아이들에게 서방인들이 말하는 민주와 공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이번 돌발 사태(티베트 사건)는 새로운 중국의 가치를 응집했고, 다시 한 번 모든 중국인의 마음을 단결시키는 계기가 됐다. 조국에 축복이 있기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축복이 있기를!”

지난 4월8일 중국의 젊은 네티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사이트 중 하나인 ‘톈야’(www.tianya.cn)에 올라온 글이다. 글 제목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한 임산부의 전투’다. 만삭의 몸으로 멀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코쟁이’들과 매일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이 중국인 임산부의 글은 같은 심정을 가진 중국 내 수많은 ‘중화전사’들의 심금을 울렸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고, 그의 글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중화전사’ 심금을 울린 미국 임산부의 투쟁

4월13일, 베이징의 한 카르푸 매장 앞. 가냘픈 몸집을 한 젊은 여성이 두 손에 오성홍기를 펼쳐들고 섰다. 그는 지나가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카르푸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앞서 4월7일 프랑스 파리에서 티베트 사태에 항의하는 반중국 시위대 때문에 올림픽 성화가 세 차례나 꺼지는 수모를 당한 바 있다. 그동안 중국과 가장 가까운 서방국가로 인식됐던 프랑스는 순식간에 중국인들의 ‘적’이 됐다. 그 분노의 타깃으로 카르푸가 선정됐다. 베이징, 칭다오, 우한, 쿤밍 등 중국 전역에서 카르푸 매장을 중심으로 프랑스 제품 불매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카르푸가 중국인들의 ‘공동의 적’이 된 건 단순히 프랑스의 대표적인 기업이라는 이미지 때문은 아니다. 카르푸 최대 주주인 루이뷔통 사장이 달라이 라마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소문이 인터넷 등을 타고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우한의 한 매장에서 티베트 사태에 항의하는 의미로 오성홍기가 조기로 게양된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국인들의 ‘광분’을 샀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급기야 카르푸 불매운동, 프랑스 제품 불매운동으로 번진 것이다.

카르푸 불매운동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인터넷 MSN에는 붉은 하트 모양과 함께 ‘차이나’(China)라는 글자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MSN을 사용하는 거의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나는 중국을 사랑한다’는 뜻의 ‘홍심 중국’ 문양을 자신의 아이디 위에 일제히 달았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도 바빠진 건 마찬가지.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카르푸에 가지 말자. 중국인들의 본때를 보여주자!”

〈CCTV〉의 ‘편집’과 서방언론의 ‘편집’

한편 지난 4월21일 베이징 이공대학 기숙사 창문에는 각 층마다 오성홍기가 내걸렸다. 이공대학 관계자는 이 ‘사건’을 “학생들의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애국 행위”라고 설명했다.

“친구들과 감히 논쟁을 벌일 생각을 못하겠다. ‘맹목적인 민족주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너희가 알고 있는 티베트 사건의 진실도 알고 보면 정부나 언론이 조작한 편견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도 후과가 두려워 감히 말을 하지 못하겠다. 매국노라는 답이 돌아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베이징대 박사과정 졸업반인 랴오팡의 말이다. 그는 졸업논문 쓰는 일 때문에도 두문불출하고 있지만, 나가면 친구들과 이런 ‘위험한’ 논쟁을 하게 될까 두려워 일부러라도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주변의 친한 친구들은 지금 죄다 ‘애국주의 전사’가 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의 분위기를 ‘맹목적인 민족주의 광풍’이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이 ‘광풍’의 뒤에는 정부와 언론의 암묵적인 지지가 있다고 했다.

3월14일 티베트 시위 이후 ‘신랑왕’ 등 중국의 대표적인 포털 사이트와 주요 일간지, 주간지 등은 거의 한 달 내내 머리기사로 ‘반서방주의’를 부추기는 뉴스를 쏟아냈다. 〈CNN〉 앵커가 방송 도중 중국인들을 모독하는 발언을 한 이후로 반서방주의 정서는 극에 달했다. 게다가 중국 〈CCTV〉에서 티베트인들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며 경찰과 민간인들을 공격하는 ‘편집된’ 화면만을 본 대다수 중국인들은 서구언론의 티베트 사태 보도에 ‘진실 왜곡’이라며 극도로 분노하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에 ‘안티 CNN 사이트’와 ‘안티 서방언론 사이트’ 등을 만들어 네티즌의 서명운동을 조직하거나 반서방 여론을 퍼뜨리고 있다. 포털 사이트와 언론은 이들의 움직임을 시시각각으로 보도하면서 분위기를 돋우는 구실을 한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애국운동’은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지난 4월16일 쿤밍 카르푸 사건이 있은 뒤 중국 언론은 “극단적 민족주의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다소 근심스러운 분석을 내놓았다. 한 예로, 파리에서 시위대들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성화를 지켜내 국민적 영웅이 된 펜싱 선수 진징이 “카르푸 불매운동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하자 그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이 쏟아진 일을 들 수 있다. 인터넷 쇼핑몰 등에선 민족주의 열풍을 이용해 ‘애국 티셔츠’ 등을 파는 기민한 상술까지 판치고 있다.

사태가 ‘비이성적인 국면’으로 흐르자 중국 정부와 언론도 태도 전환을 시작했다. ‘이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4월20일 중국 관영 와 는 각각 ‘국가를 잘 건설하는 것이 애국 열정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설과 ‘애국주의는 어떻게 해야 더 힘을 가지나’라는 사설을 통해 시민들의 자제와 이성을 촉구했다. 중국 상무부도 성명을 통해 카르푸 불매운동의 피해자는 결국 중국인들이라며 불매운동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투자컨설팅을 하는 후쩐페이는 “통제에 길들여진 중국인들이 통제되지 않는 민족주의 행동을 벌였을 때 그 결과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 서서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며 “중국인들이 애국운동을 빌미로 시위를 조직하고 집단행동을 하면 역으로 서방인들에게 더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자칫 올림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 정부 차원에서 선을 넘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4월 마지막주를 기점으로 광풍과도 같은 ‘애국주의 열풍’은 다소 수그러들고 있는 기미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불고 있는 젊은 네티즌들의 ‘전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 자신의 발을 찍고 있다”

“우리는 서방매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방매체의 객관적이지 않은 보도를 반대한다. 우리는 서방인민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편견을 반대한다.”(안티 CNN 홈페이지)

“민족주의는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국가를 단결시킬 수도 있고 분열시킬 수도 있다. 티베트 독립분자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민족주의 정서를 가지고 독립시위를 벌이지 않았는가? 우리가 여기서 우리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중국인을 ‘한족 매국노’라고 욕하듯이, 티베트 독립분자들도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동포들에게 ‘티베트인 매국노’라고 욕한다. 사실 우리와 그들의 도덕 수준은 똑같다. 선동을 통해 일시적인 효과를 거둘지는 모르지만 결국엔 우리 자신의 발을 찍는 것이다.”(톈야 네티즌 6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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