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인도주의적 재앙’… 모두에게 신산스런 삶, ‘차별’은 수용국의 환상일 뿐
▣ 암만(요르단)=글·사진 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2003년 이라크전쟁 이전 이라크 땅을 떠난 사람들이어야 한다.” “사담 후세인 치하의 학정과 폭정의 피해자임을 주장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한다.” “물증은 중요하지 않다. 심증만 확실하면 그만이다.” “무슬림보다 기독교인이 더 유리하다.”
난민 인정 딜레마에 빠진 미국
요르단 수도 암만에 거주하는 이라크 피란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꼬리를 문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이라크 난민 수용을 둘러싼 얘기들이다. 이라크 난민 문제가 세계적인 논쟁거리로 떠오른 건 이미 오래다. ‘지상 최대의 재난’이라거나, ‘인도주의적 재앙’이라고까지 불린다.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난민이 발생한 까닭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정치적 고려’ 때문에 이라크 피란민을 선선이 난민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이라크 침공을 주도했던 ‘전쟁 당사국’ 미국이다.
애초 국제사회의 압력에 직면한 부시 행정부는 지난 2월14일 올해 회계연도인 9월30일까지 7천 명의 이라크 난민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회계연도가 끝난 지금까지 약속한 수용 인원의 4분의 1 정도만 채워진 상태다. 그마저도 2003년 전쟁 이후 이라크를 떠나온 피란민들이 아닌, 후세인 정권 치하에서 이라크를 빠져나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라크 난민 절대 다수가 2003년 전쟁과 뒤이은 유혈사태를 피해 정든 땅을 등졌다는 현실에 비춰, 부시 행정부의 난민 수용 방식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유엔난민기구(UNHCR)가 내놓은 자료를 보면, 2003년 이라크전 개전 이래 2004년부터 2006년 말까지 미국 정부가 받아들인 이라크 난민은 모두 466명에 불과했다. 부시 대통령이 대규모 난민 수용 의사를 밝힌 이후 다소 늘어난 건 사실이다. 지난 9월 말까지 7개월간 미국이 추가로 받아들인 이라크 난민은 1608명에 이른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3~5월 10명 △6월 63명 △7월 57명 △8월 529명 △9월 889명 등이었다. 시한을 앞두고 수용 난민 규모를 대폭 늘리긴 했지만, 부시 대통령이 밝힌 수용계획 인원의 약 23%만 채운 셈이다.
이라크 난민 수용 문제를 두고 부시 행정부는 몇 가지 딜레마에 봉착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2003년 이라크전쟁 이후 발생한 난민을 ‘난민’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정치적 상황에 몰려 있다는 게 문제다. 부시 행정부는 이번 전쟁으로 “이라크에 자유를 안겨주고,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고 되풀이해 주장해왔다. 그런 미국으로선 전쟁과 잇따른 유혈사태로 인해 대규모 난민 사태가 벌어졌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다. 국제 여론에 밀려 난민 수용 의사를 밝혔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 게다. ‘자가당착’이란 이런 때를 두고 나온 말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미 “지난 회계연도에 수용하지 못한 이들을 감안해, 새 회계연도에는 이라크 난민 1만2천 명을 수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래서일까? 2003년 이전 이라크 땅을 떠나온 이들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난민 수용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이라크 난민들 사이에서 설득력 있게 퍼지고 있다. 실제로 엘렌 사우어브레이 미 국무부 인구·난민·이주 담당 차관보는 지난 9월19일 의회에 출석해 “미국에 입국한 이라크 난민 가운데 62% 정도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했다. 물론 난민 지위 심사 과정에서 특정 종교인에 대한 특별 대우는 있을 수 없다. UNHCR 암만 사무소 공보책임자인 라나 스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난민 인정 과정에서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 신경을 쓰기는 한다. 수니파 지역에 살던 시아파 무슬림, 시아파 지역에 살던 수니파 무슬림, 무슬림 지역에 살던 기독교인이나 아랍인 지역에 살던 쿠르드인 같은 경우는 난민 인정 우선 대상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특혜를 보는 건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암만 거주 이라크 난민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마냥 들떠 있다. 이라크 아시리아 정교회 기독교인(아슈리)인 아이만(가명·50)도 그중 한 명이다.
‘표적 공격’에 놀라 ‘엑소더스’
아이만이 부인과 두 자녀를 이끌고 이라크를 빠져나와 ‘떠돌이 신세’로 암만에 머물러온 것은 벌써 12년째다. 그동안 이 네 식구는 모두 다섯 차례나 난민 신청을 했고,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의 난민 정책이 바뀌면서 그의 가족에게도 행운이 찾아온 게다. 지난봄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6번째 난민 신청을 했던 아이만은 현재 ‘제3국 정착’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 있다. 신원조회와 건강검진이 남아 있지만, 그는 지금 미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로 이주를 준비하고 있다.
“후세인 정권 아래서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아이만은 “증언을 입증할 만한 물증을 제시할 수 없어 번번이 어려움을 겪었다”며 “이번에는 같은 조건이었는데도 난민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모종의 변화가 있었다는 얘기다. 암만에서 이라크 난민을 위한 교회 지원사업을 하고 있는 한 외국인 목회자는 “정확한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내가 맡고 있는 교회에서도 출국을 확신하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라며 “다른 지역의 이라크인 교회에서도 사정이 비슷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UNHCR가 지난 8월 초 내놓은 자료를 보면,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요르단과 시리아에 머물고 있는 이라크 난민은 모두 225만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수니파 무슬림이 45%로 가장 많고, 시아파 무슬림(25%)과 기독교인(20%), 기독교의 소수 종파인 만다인(또는 사비인·5%)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기독교인은 이라크 전체 인구의 3~5%(약 80만~150만 명)에 불과하다. 난민 집단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점은 이라크에서 기독교인의 대규모 ‘탈출’이 이뤄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라크에서 급증하고 있는 ‘소수파’를 겨냥한 표적 공격이 ‘엑소더스’를 부채질하는 이유일 게다.
암만 구시가지 쿠라이시 거리엔 한때 휴일인 금요일마다 몰려드는 이라크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그곳 ‘만남의 광장’도 예전만 못하다. 요르단의 이라크인들은 2년 전 ‘큰 사건’을 겪었다. 2005년 11월9일 오후 암만 시내 3개 호텔에서 잇따라 발생한 자살폭탄 공격에 이라크인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난민 공동체가 조금씩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사건 직후만 해도 거리에서 이라크인 청장년을 쉽게 만날 수 있었지만, 올해 들어선 잔뜩 움츠러든 기색이 역력하다.
종교행사에 감시의 눈길
그나마 다수의 이라크인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자리는 종교행사 현장이다. 바그다드의 거리에선 수니와 시아로 갈라선 무슬림들이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고 있지만, 요르단의 난민 공동체에선 갈등의 골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이라크와는 반대로 요르단이 수니파 이슬람 왕정국가인 탓에, 시아파 무슬림들이 사회적 소수자로서 ‘은근한 차별’과 ‘번거로움’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시아파는 수니파 무슬림과 예배 의식에 차이가 많다. 기도를 올리는 자세와 방식에서도 적지 않게 다르다. 그러나 시아파만 모이는 사원은 요르단에 없다. 요르단에 거주하고 있는 이라크 시아파 무슬림으로서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의식을 이곳 사원에서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요르단 보안 당국은 이라크 시아파가 모이기 시작하면, 혹시라도 ‘불온한 정치 조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그야말로 ‘원천봉쇄’에 나선다. 이라크인 무슬림들만 따로 모이는 사원이 없다 보니, 시아파 난민으로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기독교인 난민들은 신·구교에 처한 환경이 다르다. 구교 계통의 이라크인 기독교들은 요르단의 가톨릭 교회나 구교 계통의 정교회 예배에 합류하거나, 아예 종교 활동을 포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반면 개신교 계통의 기독교인들은 따로 종교 행사를 열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요르단 보안 당국의 감시의 눈길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이라크 난민들의 집단행동을 요르단 정부가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탓이다. 신산스런 난민살이는 모두에게 평등하다. 종교의 차이가 팍팍한 삶의 조건을 바꾸지는 않는다. 종교의 차이를 크게 보는 것은 난민을 받아들이는 나라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인 셈이다. 혹은 무지에 찬 교만이거나.
‘하쉬미 쉬말리’를 비롯해 이라크 난민들이 몰려 살고 있는 암만 시내 곳곳에선 최근 들어 중고 가구를 사고파는 일이 꾸준히 늘고 있다. ‘제3국 정착’ 대상자로 선정된 이라크 난민들이 출국에 앞서 팔려고 내놓은 엉성한 살림살이들이 골목마다 빼곡하다. 버리자니 아깝고, 남에게 팔기엔 남루하기 그지없는 물건들도 상당수다. 그럼에도 거래는 이뤄진다. 가난해서 ‘선택’된 이들과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질 똑같이 가난한 이들이 그렇게 푼돈을 주고받고 있다.
그 한쪽에 자리한 이라크 아슈리 기독교인인 사브리야(65) 할머니 집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혼자 몸으로 힘겹게 난민생활을 이어온 그도 최근 미국 재정착 대상자로 선정돼 출국을 앞두고 있다. 새 삶을 향해 떠나는 사브리야 할머니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이웃들을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햇살도 잘 들지 않는 단칸방 벽면에는 십자가와 예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단출한 가재도구 외에 살림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길을 가다
어디를 가도 남의 땅, 한평생 살아온 고향과는 이제 더욱 멀어질 참이다. 또다시 낯선 땅을 향해 떠나야 할 사브리야 할머니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그리 짧지 않았던 암만에서의 난민살이, 추억과 애환이 담긴 살림살이도 이미 남의 손에 넘긴 뒤다. 살가운 이웃들과 석별을 나누던 그의 입에서 나온 이라크 격언 한마디가 귓속 깊숙이 스며들어 쉽게 떨쳐내기 어렵다. “하나님의 집에 갔다가 돌아왔다. 내 집 같은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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