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대치 조짐이 또 다시 스멀스멀, 그러나 국제사회의 ‘흥분’은 되레 이란의 부상을 부추겨
▣ 테헤란=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이란에서 ‘핵’ 문제는 ‘하세이(핵) 에너지’라는 복합어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간지 다수가 ‘에너지면’을 따로 운영하는 걸 보면 ‘핵은 (무기 개발이 목적이 아니라) 에너지를 위한 것’이라는 정부 주장이 여론의 저항이나 의심을 받을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물론 ‘에너지’라는 말이 외교적 수사일 뿐이라는 택시기사도 있고(어딜 가든 택시기사들의 정세 분석과 사회비판 정신은 놀랍다!), 극소수 언론인들도 이런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내고 있다.
“핵무기 생산 금지는 ‘파트와’”
이란 여성운동을 주도하는 여성문화센터 활동가 닐루파 골카르(25)는 핵 문제를 “이란 정부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말한다. “유전 보유 세계 4위, 가스 생산량 2위를 자랑하는 자원대국 이란이 굳이 고갈될 에너지 운운하며 핵 에너지에 집착하는 건 (국제사회를 향한) 전략적 측면이 강하다”는 얘기다. 그는 “정부가 왜 그렇게 핵 에너지에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어느 정부가 핵폭탄을 만들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겠나? 난 그게 종국에는 무기로 갈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반지하’에서 활동하는 좌파 운동가 베자드 피루제(가명·52)는 무기론에 무게를 뒀다.
그동안 이란 정부는 핵 무기화 주장에 대해 “이슬람이 금지하고 있다”고 맞서왔다. 1980년대 이라크와 전쟁할 때 200여 미국 무기회사들의 지원을 받고 이란을 공격한 이라크의 화학무기에 대해서도 “이맘 (아야톨라 알리) 호메이니는 이란 군의 화학무기 사용을 허용치 않았다”라고 마누체르 모타키 이란 외무부 장관은 강조한다. 사실 이란의 독특한 통치구조를 고려해볼 때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서방의 의심은 기우이거나 ‘정치적 의심’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게 된다. 이란의 국방·안보·외교 분야는 전적으로 (종신직)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하메네이에게 달려 있다. 그는 이미 핵무기 생산 금지에 대한 종교적 칙령(파트와)까지 내린 바 있다. 시아파 이슬람이 통치의 근원이 되는 이슬람 공화국에서 최고지도자의 파트와를 뒤집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란 정치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적 소신을 밝혀온 영화감독 타흐미네 밀라니 같은 이도 “핵 에너지 개발은 우리의 권리가 맞다”고 말하는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이란을 끊임없이 위협해온 이스라엘의 핵무기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던 국제사회의 이중성”을 꼬집었다. 실제로 이란은 1994년 이집트와 함께 ‘중동 비핵무기지대화’(MENWFZ)를 위한 유엔 규약에 참여한 국가다. 반면 이스라엘은 핵확산금지조약(NPT)조차 가입하지 않았다.
물론 이란 정부의 대응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핵 에너지는 지지하지만 정부의 대응 방식은 이성적일 필요가 있다.” 바드로사닷 모피디(46) 이란 기자협회 사무총장의 말처럼 ‘에너지 지지’가 정부의 대응 방식 지지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80년대 이라크와의 8년 전쟁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40대 후반의 여론은 극한 대치나 무력 대결로 가는 상황을 대단히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그 극한 대치 조짐이 또다시 스멀거리고 있다.
지난 5월23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1년간의 사찰 결과를 담은 6쪽 분량의 이란 핵 보고서를 발표했다. IAEA 보고서를 보면, “이란은 평화적 핵 활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사찰단에도 협조적”이었다. 그럼에도 보고서는 “핵무기를 추구하는 어떠한 증거도 없지만 정보 부족으로 인해 비밀스런 핵 활동의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보고서 발표 직후 이란과 미국, 유럽연합 그리고 유엔 등 이해 당사자의 움직임도 바빠지고 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의 우라늄 농축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3월에 이어 또 다른 제재안을 논의하고 있다. 특히 제재를 밀어붙이기 위한 미국의 외교전이 불꽃 튄다는 후문이다. 이미 지난 4월께부터 이란이 ‘우라늄 농축 중단’이라는 유엔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다는 보도가 ‘주류 외신’을 통해 지속적으로 흘러나왔고, 그 ‘주류’들은 다시 “이란이 평화적 핵 활동을 유지하고 있다”는 IAEA 보고서 대신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계속하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춰갔다.
‘주류 외신’은 여전히 우라늄 농축 의심
하지만 냉정히 말해 이란 핵 프로그램에 대한 국제사회의 ‘흥분’은 되레 이란의 부상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친미 정권을 무너뜨린 이슬람 혁명이 이슬람 세계의 자존심을 낳았다면, 그 이후 유지해온 대미 독립성이 핵 협상 과정에서 더욱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치밀한 외교전과 심리전, 여론전, 심지어 자존심 대결로 비쳐지는 핵 협상 과정에서 이란은 현재까지 도덕적, 외교적 승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간 에너지 개발은 NPT가 보장한 가입국의 권리”라는 주장에 반박할 근거는 솔직히 없다. 지금까지 이란은 어떤 국제법이나 그들이 조인한 조약을 어긴 적이 없고, 번복하거나 뛰쳐나간 적도 없다.
또 미국이 이라크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이란이 챙긴 반사이익도 만만치 않다. 미국 덕분에 이란은 오랜 숙적인 사담 후세인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떠나보냈다. 이란이 오랜 세월 지지해온 시아파 정당 ‘알다와’는 이라크 정부에 참여하고 있고, 80년대 말 호메이니의 아이디어로 출범한 ‘이슬람혁명최고평의회’(SCIRI)는 미국이 안겨다준 ‘민주주의’ 덕분에 이라크 최대 정치세력로 발돋움했다. 시아파 종주국 이란은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연결되는 ‘시아벨트’의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이라크전의 승자는 이란”이란 말도 그리 큰 과장이 아닌 셈이다.
“이란만이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만난 자타가 공인하는 수니파 근본주의자 아시야 안드라비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파키스탄, 그게 어디 무슬림 국가야! 사우디도 친미 일색이고….” 그는 이란만을 쳐줬다. 지난해 초 예언자 무함마드를 테러범으로 묘사한 만화로 이슬람권이 들끓었을 때 말레이시아 같은 온건 수니파 무슬림 사회에서도 시위대는 호메이니와 하메네이 그리고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등 시아파 강경 지도자들의 사진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서방세계의 ‘오만한’ 언론자유론에 종파를 초월한 이슬람의 자존심으로 시위대는 시아파 강경 지도자들의 사진을 주저 없이 들어올린 것이다.
시아벨트 완성, 이라크전 진정한 승자
이란은 또 레바논의 헤즈볼라(시아파)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수니파)도 지원한다. 말하자면 대중적 지지기반을 제법 갖춘 중동의 ‘떠오르는 이슬람주의 정당’들이 모두 이란의 지원을 받거나 손을 잡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주도하게 될 대이란 군사행동이 끔찍한 재난을 초래한다는 건 이렇게 전선 확장의 가능성이 넓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란은 이제 시아파 종주국을 넘어 이슬람 세계와 중동의 자존심으로 확실히 떠오르고 있다. 그야말로 ‘핵 무장’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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