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 시절의 공포가 여전히 지배하는 아르헨티나의 오늘… 28년전 사라진 딸을 찾아헤매던 그녀는 어떻게 손자만 찾았을까
▣ 하영식의 남미기행 ① 부에노스아이레스=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s@yahoo.co.kr
군사독재의 잔혹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남미 대륙은 우리의 현대사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치열한 삶과 그보다 치열한 죽음이 모여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청산하지 못한 독재의 망령은 여전히 공포로 남아 있다. 은 두 달여의 일정으로 남미 대륙을 취재하고 있는 하영식 전문위원의 글을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아르헨티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 아르헨티나 출신 노인과 군사독재 시절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을 염두에 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서슴없이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치하에서 일어났던 ‘실종’으로 화제를 옮겨갔다. 하지만 ‘실종’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그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는 목소리를 갑자기 낮추고는 “이곳에선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며 이내 말문을 닫았다. 민주화가 진전된 지금까지도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30년 전 군사독재의 공포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듯해 씁쓸했다.
공공체육시설에서 시민들 고문·살해
지구의 반대편이란 엄청난 지리적 거리감에도 남미 국가들과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사를 돌아보면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미국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의 개입은 한반도나 남미 대륙의 정치적 기조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해왔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말살했을 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다수의 민중들을 학살했다는 역사도 닮아 있다.
군부독재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거셌던 남미에선 탄압의 강도도 다른 대륙에 비해 훨씬 강했다. 1973년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으로 칠레에서 일어났던 군부 쿠데타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은 붕괴됐고, 이듬해인 74년엔 브라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리고 76년 아르헨티나에서도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르헨티나 군부의 잔혹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7년여 군부독재 기간에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납치돼 학살됐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선 ‘Desaparesio’(실종)와 ‘desaparecidos’(실종된 사람들)라는 말이 일종의 고유명사가 돼버렸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독재에 반대하는 ‘테러리스트’를 학살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 아래 전국적으로 300여 곳에 죽음의 수용소를 설치·운영했다. 수용소는 주로 변두리 지역의 학교나 체육관 등 대규모 건물을 개조해 비밀스럽게 사용했는데,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에만 이런 수용소가 한때 수십 개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1시간 남짓 걸리는 곳에 ‘엘올림포’ 수용소가 있다. 군부가 정권을 잡기 전 엘올림포는 각종 경기가 빈번히 열렸던 공공체육 시설이었다. 1976년 3월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이곳에서 열리던 모든 운동경기를 금지한 뒤 체포한 시민들을 고문·살해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승리의 환호와 축제의 환희가 넘치던 체육관이 고문과 죽음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장소로 전락했으니, 독재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엘올림포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게다.
수용소 주변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렀다. 18년 동안 이곳에서 카페를 운영했다는 주인 아우렐(52)은 자신의 목에다 손을 대고 긋는 시늉을 하며 엘올림포를 가리켰다. 그는 “당시 군인들은 신처럼 행동했다”고 말했다. 그는 군부 출신으로 세 번째 집권했던 갈리테리 장군과 관련된 일화를 들려줬다. 갈리테리는 집권하기 전 엘올림포 수용소를 방문한 일이 있단다. 그날 갈리테리는 수감된 한 젊은 여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너는 내가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는지 아느냐? 내가 만약에 ‘너는 죽는다’고 말하면 너는 죽을 것이고, ‘너는 산다’고 하면 너는 살 것이다.” 그는 이어 “너는 내 딸과 이름이 같으니 살 것”이라고 말했고, 억세게 운이 좋았던 그 여성은 이날 목숨을 건졌다는 게 아우렐의 얘기였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그곳에서의 삶을 이렇게 전한다.
대서양 상공에서 주검을 처리하다
“끌려온 이들 대부분은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눈이 가려진 채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는 금지됐고, 굶주림과 열악한 환경에서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곳에서의 일상적인 삶은 고문이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전기봉으로 야만적인 고문을 당해야 했다. 성고문도 가해졌고, 숨이 막힐 듯한 물고문도 당했다. 어떤 사람은 땅에 목만 내놓고 온몸이 묻힌 채 뜨거운 햇볕과 퍼붓는 폭우를 감내해야 했다. 이런 고문은 며칠 동안 계속됐다. 구타는 일상적으로 행해졌는데,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수감자들을 정신적·육체적으로 완전히 꺾어버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고문기술자는 정신병자처럼 고문을 즐기기도 했다. 고문에서 살아남더라도 대부분은 살해됐다. 이들에겐 살해한 주검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처음에는 주검을 외진 곳에 묻었지만, 나중에 더 효과적인 방법이 개발됐다. 체포한 시민들을 비행기로 싣고 대서양으로 날아가서 아예 이들을 모두 비행기 밖으로 떨어뜨리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만도 수천 명에 이른다.”
수용소에서는 단지 고문과 살해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임산부를 체포해온 군인들은 아기를 낳은 여성은 죽이고 아기들은 모두 군 간부들이나 군과 관계된 기업인들의 가정으로 빼돌려 이들의 호적에 올려 키웠다. 친부모를 죽인 살인자들의 손에서 아기들이 자란 것이다. 이런 사실이 몇 년 전에 폭로되면서 다시 한 번 아르헨티나 군부의 반인륜적 범죄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인권단체들은 약 500명의 아기들이 수용소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벌써 30살에 가까운 성인으로 성장한 이들 중 82명이 DNA 검사를 통해 혈육을 되찾았다.
“만약에 당신의 신분에 대해 의심이 가면 ‘할머니들’에게 전화하라.”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 곳곳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 쓰인 문구다. ‘할머니들’은 ‘마요광장의 할머니들’이란 인권단체를 일컫는다. 군부독재 시절 실종되거나 살해된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모여 만든 이 단체는 지난 몇 년 동안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기’들과 혈육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다리 구실을 해왔다.
군부에 의해 희생된 딸이 수용소에서 낳은 외손자를 되찾았다는 로사 로이신블리트(86)를 만나기 위해 ‘할머니들’ 사무실을 찾았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로사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자원봉사자들이 그의 뺨에 키스를 하면서 존경을 표했다. 팔순을 훌쩍 넘긴 의사 출신인 그는 무남독녀를 잃은 뒤 슬픔과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지난 28년간 자식을 잃은 다른 유족들과 함께 쉼없이 싸워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젊은이 못지않게 또렷했다.
‘마요광장의 할머니’들은 계속 싸운다
로사의 딸인 마리아 카테리나(당시 26)도 군부독재에 붙잡혀 사라진 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3만 명 중 1명이다. 1978년 실종 당시 카테리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수련의 과정까지 마친 상태였다. 1년 전 선배 의사와 결혼해 임신 8개월째여서 출산 준비에 한창이었다. 아기를 낳은 뒤에 일할 병원도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딸이 체포된 이유에 대해 묻자 로사는 “지금까지 왜 붙잡혀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는 군부가 정권을 잡은 지 2년이 지난 뒤여서 카테리나 부부는 긴장의 끈을 풀어놓은 상태였다. 전문의사인 남편이나 의대를 졸업한 ‘의사 후보’였던 카테리나는 정당이나 단체에 소속돼 활동한 경험이 전무했다. 물론 대부분의 시민들처럼 군부독재에는 반대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한 적은 없었다. 당시 쿠데타 세력은 모든 시민들을 적으로 설정해놓고 있었다. 이들은 공공연히 당시의 상황을 “전쟁”이라고 떠들어댔다. 조금만 의심이 가도 납치해서 고문하고 학살하던 때였다.
1978년 3월 어느 날 자정 무렵 군인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카테리나 부부를 붙잡아갔다. 이들이 끌려간 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해군기술학교 건물이었다. 이들이 납치된 뒤부터 어머니 로사의 고난은 시작됐다. 소문으로만 듣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방의 모든 수용소를 찾아다니면서 딸과 사위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수용소 정문 앞에서 며칠씩 지내기도 했지만 군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 지 만 30년이 되는 올해까지도 정부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남편과 일찍 사별한 뒤 딸 하나만 의지해 살아왔던 로사는 딸이 납치된 날부터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야 했다. “딸이 실종된 뒤로는 세상 사는 맛이 다 사라져버렸어.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기뻐야 할 순간에도 오직 눈물만 흘리게 됐어.” 당시 같이 수용소를 찾아다니던 어머니들과 함께 매주 목요일 오후 마요광장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군부정권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시위를 벌이자, 어머니들까지도 납치해서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로사가 지금까지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성과가 있다면, 실종된 딸의 아들인 손자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당시 손자는 임신한 딸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딸은 만삭의 몸으로 납치돼 수용소로 끌려가선 아기를 낳은 뒤 죽임을 당한 것이다. 손자는 군인들의 손에서 자라 이미 28살 청년으로 성장해 결혼까지 했다. 로사는 “5년 전에 손자를 찾았을 때는 마치 죽었던 딸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뜻밖에 돌아온 손자는 벌써 28살
“28년이나 지났는데…, 살아 있을까?” 딸의 주검을 확인하지 못한 어머니는 28년이 지난 지금도 딸이 살아 있을 것이란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시위가 있을 때마다 거리로 나선다는 로사는 “딸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딸과 사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늙은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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