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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또 다른 9·11을 기억하라

등록 2006-09-22 00:00 수정 2020-05-02 04:24

17년간 백색테러 자행한 피노체트 정권이 쿠데타를 일으킨 1973년 그날… 가족이 살해·고문당했던 바첼레트 대통령 “과거사 청산엔 유효기간 없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스러져간 이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는 더 공정하고 인간적인, 단합된 민주사회를 일궈내는 것이다.”

9·11 동시테러 5주년을 맞아 전세계의 눈과 귀가 쌍둥이 빌딩이 서 있던 뉴욕 맨해튼의 ‘그라운드 제로’에 쏠려 있던 지난 9월11일 아침 남미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조용한 추모행사가 열렸다.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을 비롯한 칠레 정부 고위인사들과 정치권 등 각계 지도자들이 두루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추모식은 33년 전 칠레 현대사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또 다른 9·11’을 기억하기 위한 자리였다.

9월만 되면 보름 남짓 격렬 시위

1973년 9월11일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칠레 군부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렸다. 이후 17년간 수많은 이들이 ‘불법체포-감금-고문-살해-주검유기’라는 잔혹극의 희생양이 됐다. 칠레 정부 공식 집계로만 9·11 쿠데타 이후 17년여에 걸친 군부독재 기간에 정치적 이유로 목숨을 잃은 이들은 모두 3197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1197명은 유골조차 찾지 못한 채 여전히 ‘실종자’로 분류돼 있는데, 이 가운데 적어도 150명의 주검은 군용 헬기를 동원해 바다 한가운데에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테러의 시절’이었다.

지난 3월11일 취임한 바첼레트 대통령도 군부가 주도한 ‘백색테러’의 희생자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아옌데 정권의 충직한 지지자였던 공군 장성 바첼레트 대통령의 부친 알베르토 바첼레트 장군은 9·11 쿠데타 직후 반역자로 몰려 체포됐다. 여러 달 이어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육신은 점점 무너져내렸고, 그는 이듬해 3월 심장마비로 끝내 숨을 거뒀다. 쿠데타 당시 22살의 의대생으로 칠레 사회당 당원으로 활동했던 바첼레트 대통령과 그의 모친 안겔라 고메즈도 1975년 1월 체포돼 비밀 고문장소로 악명 높은 산티아고 남동부의 ‘빌라 그리말디’에서 군부의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민주정부가 집권한 지 16년째를 맞고 있지만 올해 아흔 살이 된 은퇴한 독재자는 이제껏 단 한 차례도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있다. 매년 9월이 되면 수도 산티아고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보름 남짓 격렬한 시위가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좌파 무장단체의 피노체트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던 9월8일부터 쿠데타 발발일인 9월11일 사이엔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고, 돌멩이와 물대포가 거리를 점령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정부의 교육개혁 실패에 대한 대학생들의 반발까지 더해지면서 예년보다 더욱 격렬한 시위가 꼬리를 물었다.

지난 9월7일 산티아고 프로비덴시아 지역의 군 성당에선 숨진 경호원들의 20주기를 추모하는 미사가 열렸다. 1986년 이날 칠레 공산당과 ‘마누엘 로드리게스 애국전선’(FPMR)의 주도로 벌어진 피노체트 암살 미수 사건 때 목숨을 잃은 경호원 4명의 넋을 기리는 자리였다. 이들의 추모식은 매년 성대하게 치러졌고, 피노체트 자신이 직접 참석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올해는 고작 5명이 성당을 찾아 헌화한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 미사가 열리기 몇 시간 전 복면을 한 2명의 사내가 성당에 사제폭탄을 설치해 화재가 나기도 했다. 미사가 열리던 시각 산티아고 시내 곳곳에선 추모식에 반대하는 격렬한 거리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피노체트, 서서히 조여오는 법망

“만약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용서해주기 바란다. 특히 나와 뜻을 같이했던 사람들의 용서를 빌며, 내 적들도 용서하길 바란다.” 이날 추모식에 참석했던 피노체트의 부인 루시아 이리아르트는 뜻밖의 발언을 했다고 등 외신들이 전했다. 피노체트는 그동안 단 한 차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 일이 없었다. 그저 “수하들이 과도한 행동을 했다”는 정도의 말이 고작이었다. 이리아르트는 피노체트의 건강이 극도로 나쁜 상태이며, 심장박동 조절기에 의지하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피노체트의 주치의는 그가 몇 차례 가벼운 뇌졸중 증세로 쓰러진 뒤 치매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당뇨병과 관절염 등의 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늙고 병든 피노체트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갑작스런 ‘화해’의 몸짓이 최근 잇따른 법원의 판결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은 칠레 대법원이 지난 9월8일 바첼레트 대통령과 그의 모친이 고문을 당했던 ‘빌라 그리말디’에서 벌어진 59건의 고문과 인권유린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피노체트를 기소할 수 있도록 그의 면책특권을 박탈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모든 형사처벌에 대한 면책특권이 있는 피노체트를 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해선, 기소 절차에 앞서 개별 사안마다 법원의 면책특권 박탈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
앞서 칠레 대법원은 지난 8월18일에도 피노체트가 집권 기간에 적어도 200만달러가량의 정부 자금을 착복한 증거가 있다며 부패 혐의에 대한 기소 절차를 시작할 수 있도록 면책특권 박탈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미 인권유린과 탈세 혐의에 대해서도 면책특권을 잃은 피노체트로선 서서히 조여오는 법망을 피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했을 터이다.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 네 차례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군부독재의 유산은 아직도 청산되지 못했다. 전임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에 이어 민주화 이후 사회당 출신으로 두 번째 집권에 성공한 바첼레트 대통령이 여전히 과거사 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티아고 공동묘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파티오 29’를 국가추모시설로 지정해 보존하기로 결정한 것도 과거의 상처를 보듬어 미래를 열어가려는 시도다. 피노체트 집권기에 고문 뒤 살해된 정치범들의 주검 투기 장소로 사용된 이곳에선 1991년 법의학자들의 현장검증을 통해 모두 126구의 신원을 알 수 없는 유골이 발굴된 바 있다.
“1973년 9월11일 바로 이곳에서 첫 ‘실종자’가 생겨났다. 실종자의 날은 칠레인 모두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는 독재정권의 피해자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날이다.” 지난 8월30일 바첼레트 대통령은 33년 전 쿠데타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됐던 대통령궁 라모네다에서 ‘실종자의 날’ 선포식을 열고 “우리 역사의 한 시기에 벌어진 끔찍한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부끄러움과 공포를 기억해야만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고 등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단 한 사람의 실종자도 남지 않도록…

칠레를 포함한 남미에선 지난 1970~80년대 이른바 ‘더러운 전쟁’ 기간에 수많은 실종자가 양산됐다. 불의한 방법으로 집권한 군부는 더러는 살인을 덮기 위해, 더러는 피해자 가족에게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 주검을 내다버렸다. 바첼레트 대통령은 이날 “단 한 사람의 실종자라도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의 주검을 찾는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불의가 있는 한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이며, 압제가 있는 한 자유를 위해, 침묵이 있는 한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거사 청산엔 유효기간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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