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파병은 실리와 현실 강변했던 ‘실용주의 외교’의 파산…미국·영국서도 공론화한 철군을 4월 임시국회에서는 논의해야
▣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gaemy@pspd.org
미국과 다국적군의 이라크 점령 3년, 한국군 파병 2년11개월째를 맞고 있다. 전쟁을 일으킨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이라크의 덫에 걸려 정치적으로 침몰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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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나라가 이라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국 정부와 국회, 언론만은 이 세계사의 대논쟁을 외면하고 있다.
‘재건 특수’란 주관적 기대일 뿐
이라크 점령 3년, 이라크 점령 지원 3년의 과정은 부도덕한 군사적 패권주의가 스스로와 세계를 망치는 과정이었다. 또 실리와 현실을 강변했던 한국의 ‘실용주의 외교’가 파산하는 과정이었다. 3년 전 미국과 영국 등 침공 주도 국가들은 전쟁 이후의 세계가 그들이 주도하는 힘의 질서로 재편될 것이라는 오만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 3년을 맞은 오늘의 세계는 그들의 오만한 자신감과는 거리가 멀다. 앞으로도 세계가 ‘그들의 것’이 될 것 같지 않다. 이라크는 힘에 대한 고정관념, 현실 혹은 실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바꿔놓고 있다.
파병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국회는 냉전 이래 가장 중대한 국제정치적 논란거리를 제공한 미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일체의 판단을 배제했다. 요컨대 명분도 의미도 제대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리고 실리와 현실을 내세웠다. 그러나 미국의 현실적 힘을 의식해 원치 않는 대규모 파병을 강행한 한국 정부와 국회의 근시안이 확인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부가 강변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도, 이른바 ‘재건 특수’도 주관적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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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정부와 국회와 언론은 명분 없는 파병을 해야만 했던 자괴감과 부담감으로 인해 가장 치열하게 논쟁하고 검토해야 할 것들을 외면하고 통제하고 있다. 특히 김선일씨의 사망과 자이툰 부대 추가 파병 이후 이런 현실도피적 태도는 더욱 노골적이 되었다. 그 결과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이라크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역동적 민주주의를 저당 잡히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이라크에서 빠진 늪보다 더욱 고약한 것일지 모른다.
이라크 문제를 다루면서 정부는 외교가 필요한 곳에서 맹종을 택했고, 현실주의가 필요한 곳에서 맹목을 선택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그 힘에 의존해야 할 순간에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밀실과 공모된 침묵 속으로 도피했다. 국회의원들은 마치 범죄에 공모한 사람들처럼 이 문제를 다루길 꺼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 평가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돌아보기 싫은 현실을 정확히 직시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왜 아르빌에 더 머물러야 하는가’에 대해 정부와 국회가 답해야 한다. 지난해 말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파병 재연장 논의 과정에서 정부와 국회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또다시 맹목적 재연장을 선택했고, 재건 지원을 더 해야 한다는 공허한 주장만 늘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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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 뽑기 위해 더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아르빌의 재건 지원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의 보고에서도 확인된다. 정부는 자이툰 부대가 수행하고 있다는 재건 지원 활동의 목록조차 제대로 내놓지 않았다. 어떤 통계에는 23만여 점의 물자 지원 실적이, 어떤 통계에는 2만여 점의 물자 지원 실적이 서로 다르게 보고됐다. 대다수 국방위원들은 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요청하지도 않은 채, 밑도 끝도 없이 ‘본전을 뽑기 위해서는 더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와 국회는 올해 안에 1천 명을 감축하겠다고 결정했지만, 남게 될 2300여 명은 아르빌에서 ‘유엔 경호’ 등 평화·재건과는 무관한 새로운 임무도 떠맡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과 영국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들이 철군 일정을 밝히고 있다. 미국과 영국에서도 철군 문제는 이제 공론화한 의제다. 우리보다 1년 이상 늦게 파병한 일본은 침공의 4대 주축국인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오는 5월 철군한다. 한국군이 이라크에서 미국·영국과 운명을 같이할 이유가 없다. 3년이면 충분하다. 한국군은 올해 안에 철수해야 한다. 지금부터 철군 일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 국회는 4월 임시국회부터 철군 계획을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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