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무장세력에 납치됐다 풀려난 뒤 미군에 무차별 총격당했던 스그레나
파병 철수에 결정적 역할 했지만 수개월 동안 침묵해야 했던 그녀를 만나다
▣ 로마=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스그레나(56)는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 위치한 공산주의 신문인 <일 마니페스토>의 전쟁 전문기자로 활동해왔다. 1990년대부터 소말리아와 알제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두루 다니면서 전쟁의 비참함과 전쟁으로 인한 민중의 고통을 전하는 기사를 써왔다. 그는 오랜 기간에 걸친 용기 있는 취재활동으로 이탈리아 국민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아왔다.
죽음의 공포에 수개월 통원치료
언제나 위험한 전쟁지역을 쫓아다녔지만 그는 다행히 무사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올해 2월4일, 팔루자의 참상을 취재하기 위해 바그다드 근방의 한 모스크를 방문했다. 팔루자를 경험했던 이라크인들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가던 길에 알려지지 않은 이라크 무장집단에게 납치당했다. 감금된 채 한달, 이탈리아 국민들과 전세계의 언론사, 이탈리아 정부, 특히 그의 남편의 끈질긴 구출 노력으로 그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석방의 환희는 짧았다. 3월4일 납치된 지 정확하게 한달째, 로마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바그다드 공항으로 가던 자동차는 도로 옆에 대기하고 있던 미군들의 무차별 총격을 당했다. 이때 그의 석방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이탈리아 정보부원인 니콜라 칼리파리는 그를 감싸안은 채 총격을 받아 숨졌다. 스그레나는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로마로 돌아온 뒤 어깨 총상과 납치 당시에 겪었던 죽음의 공포로 수개월 동안 통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사건으로 이탈리아 사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반미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라크에서 철수를 주장하는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를 대신해 총격을 받고 죽은 칼리파리는 이탈리아의 영웅이 됐고, 스그레나는 전세계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지난 9월4일, 스그레나를 만난 날은 납치범들에게서 풀려나 미군의 총탄 세례를 받은 지 만 6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반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매일 병원을 다니고, 이탈리아와 미국 양국의 사건 조사도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사건 조사에 진전은 없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대미 관계를 우려해 저자세를 취했고, 미국 정부는 총격을 정당화하는 데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은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자동차가 고속으로 주행했기 때문에 발포했다”는 주장을 계속했고 스그레나에게 단 한마디의 공식적인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깨에 입은 총상을 보여주면서 두발의 총탄 파편이 지금도 몸 속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 더 큰 문제는 몸에 난 상처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영혼의 상처에 있다.
“지금도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어요. 어두운 데서는 잠들 수가 없어서 항상 전등을 켜둡니다. 그렇게 해야 그나마 잠이 들지요. 로마에서는 자주 거리를 산책했는데, 이제는 거리에 나가는 것조차 두려워요. 무엇보다 삶을 계획하는 것이 두려워요. 미래도 없는 것 같고, 하루하루가 힘듭니다. 이전의 삶에 대한 열정이 사라져버린 것 같고….”
이라크전은 언론의 수난시대를 증명해왔다. 지금까지 이라크전에서 희생된 언론인들의 수는 67명이라고 한다. 이라크전이 발발한 뒤부터 미군은 마치 원한이 맺힌 듯 언론인들을 향한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또 이라크 무장그룹들도 언론인들을 납치해 거액의 몸값을 챙긴다. 살해하는 일도 가끔 있다. 이라크를 위해 반미반전의 관점에서 기사를 써왔던 스그레나 기자까지 납치하자, 이라크 무장세력은 미국이 고용한 그룹이라는 의혹까지 낳기도 했다. 이렇게 이라크 무장세력들이 언론인들을 납치하기 시작하자, 이라크에서는 언론인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이라크에 남아 있는 언론인들은 미군과 계약을 맺고서 함께 움직이는 거대 언론사의 언론인들이 대부분이다.
그 납치범들, 미군과 연관됐을 수도
스그레나가 사고를 당한 것은 일곱 번째 바그다드 방문에서였다. 그는 이라크 무장그룹에게 납치당해 바그다드 주변의 비밀가옥에 갇혀 있었다. 이라크 납치범을 향해 스그레나는 “나는 이라크를 위해 기사를 써왔고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반대해왔다. 그런데 왜 나를 납치해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항변했다. 이라크 납치범들이 미국의 사주를 받고 그를 납치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를 납치한 그룹은 미국의 조종으로 움직이는 그룹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납치 행위를 저지르는 이라크 무장그룹 중에는 미국의 정보원들이 침투해 있는 경우도 있다고 본다”고 덧붙여 묘한 여운을 남겼다. 또 그가 석방되는 순간, 납치범 중 하나가 “가는 길에 미군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는데 “그 말이 들어맞았다”고 말해 이라크의 납치범들이 미국과 연관될 수도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그는 미군이 언론인들을 향해 발포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단지 언론인들만을 향해 쏘는 게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누구에게나 발포하고 있다. 심지어 이탈리아 군용차량을 향해 발포하기도 했다.” 이 말은 이라크에 주둔하는 미군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는 “어쨌든 식별할 수 있는 언론인들을 향해 발포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라고 짐작했다.
그가 팔루자에서 목격한 것 중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그곳의 저항세력이 스스로를 조직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이라크가 미군에 의해 점령되고 사담 후세인 세력이 제거된 뒤 그곳에는 아무런 조직도 없었다. 처음에는 몇명의 사람들로 저항조직이 결성되고 그 뒤 서서히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됐고 대규모 전투까지 치러낼 정도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납치되기 전 팔루자에서 탈출한 이라크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에게서 미군들이 네이팜탄을 사용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그의 증언이다. 이 사실을 전해준 이라크인은 새까맣게 탄 주검을 직접 봤다고도 한다.
나는 스그레나에게 이라크뿐만 아니라 전세계 전쟁이 일어나는 곳의 심장부를 대부분 섭렵한 전쟁 전문기자로서 나름대로 전쟁에 관한 철학이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최악의 상태에서 허덕이는 이라크 전쟁의 해결책을 물었다. 역시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미군을 비롯한 모든 외국 군대가 그곳에서 철수하는 게 가장 먼저 선행돼야 할 일”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이라크에서 철수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모든 외국 군대가 이라크에서 철수하면 초기에는 혼란스럽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었다. 내전은 걱정할 만한 수준이 아닐까? “미군이 주둔하는 지금도 내전이 발생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내전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평화는 여기서 시작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대신 죽은 니콜라를 그리며…
스그레나는 “많은 이라크인들이 사담 후세인을 증오한 것은 분명하지만, 미군과 외국 군대가 이라크 땅을 점령한 데 대해서는 더한 증오심을 갖고 있다”는 현지 사정을 소개했다. 이라크에서는 전쟁 전에는 테러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라크를 침공한 뒤부터 이라크에서 테러 사태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즉, 이라크전이 테러리즘을 양산했다는 주장이다.
스그레나도 이라크 민중들처럼 이라크전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 체험해왔다. 더구나 3월4일 바그다드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날의 사건에 대해 묻는 순간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나 대신 목숨을 바친 니콜라로 인해 죽는 날까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3월4일의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뒤부터 스그레나는 다른 사람을 인터뷰하는 위치에서 다른 기자들에게서 인터뷰 요청을 받는 입장으로 변했다. 이 때문에 서구 언론에서는 이런 유명세를 바탕으로 그가 정치권으로 진출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건강상태가 좋아지면 계속 기자생활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하는 일이 정치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굳이 정치인이 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스그레나는 덧붙였다.
160cm도 채 되지 않는 왜소한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그렇게 위험한 이라크만 취재차 일곱번이나 방문했고 전쟁으로 인해 무법천지로 변한 알제리,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도 직접 발로 다니면서 취재했다. “위험한 전쟁지역만 골라서 다녔기에 가족도 아예 포기한 상태”라는 말을 할 때는 죄책감을 느꼈던지 금방 환한 웃음을 지었다. 팔순의 노부모는 지금도 전쟁터로 가는 그를 간곡하게 만류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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