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부흥과 유가 고전 읽기 열풍…후진타오 체제 정치 보수화 경향과 민족주의 열기가 배경
▣ 베이징=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중국에서 공자가 다시 살아났다. “공자 타도!”의 함성과 함께 지난 20세기 중국에서 ‘수난의 시대’를 살았던 공자가 21세기를 맞아 금의환향을 했다. 초등학교에서는 “공자왈, 맹자왈”이 다시 흘러나오고, 중국 곳곳에서는 유가 경전을 가르치는 사설 학당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게다가 각계 학자들은 저마다 유가사상을 서구의 기독교처럼 중국인들의 정신적 ‘신앙’의 반열로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유가의 핵심 내용인 ‘인의예지신’을 기본으로 하는 ‘유가헌정주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공자뿐 아니라 사회주의 신중국 건국과 더불어 20세기 중국에서 온갖 낙후된 ‘중국병’의 원인으로 취급받던 모든 전통들이 널리 확대되고 발전시켜야 할 미덕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자나 장자 등 ‘불순한’ 고전은 제외
2004년 5월, 베이징 서점가에 ‘중화민족 고전기초교육 암송본’이 출시됐다. 이 책은 어린아이들을 위해 편찬한 중국 고전문화서다. 유가의 사서오경 중에서 대표적인 내용들만 골라 암송하기 쉽게 편집한 책이다. 이 책을 편집한 중국의 대표적인 유학 연구가 장칭(蔣慶)은 책 머리말에서 “중화문화의 부흥은 반드시 어린아이 때부터 틀어쥐어야 한다”며 “성인이 된 뒤에는 자연스럽게 중국 역대 성인들이 가르쳤던 사람됨과 일처리의 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중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도덕의 붕괴라고 지적한다. 이런 도덕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유가경전을 읽게 하는 대대적인 ‘운동’을 벌일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미국 예일대학교의 유명 논객인 쉐융(薛涌)은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인 <남방주말>에 “이것은 문화몽매주의로, 문화보수주의 기치 아래 전개되고 있는 우민운동일 뿐”이라고 비꼬았다. 이 글은 바로 논쟁의 도화선이 되어서 지난 해 7월부터 연말까지 이른바 ‘고전읽기 논쟁’이라 이름 붙여진 일대 사회적 논쟁으로 비화된다. 이 논쟁에는 중국 내 내로라 하는 각계 학자들이 총출동했고, 역시 중국에서 유명 언론매체들이 이들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그런데 특이한 현상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반전통’을 주장하던 자유주의 계열의 학자와 논객들이 이번에는 전통문화를 수호하자는 문화보수주의자들로 돌변했다는 점이다. 평소에는 이들과 대립각을 형성했던 좌파 학자들도 마찬가지로 갑자기(?) 유가사상의 위대함과 중국 전통문화의 부흥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사건’이었다.
그들의 공통된 주장은 이렇다. “유가 경전들을 읽어서 해될 게 뭐가 있느냐?” “서구의 고전은 읽어도 되고 우리 민족의 고전은 읽어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러나 이 ‘고전읽기 운동파’들이 말하는 ‘고전’에는 노자나 장자, 도가 같은 다른 고전사상들은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 유가를 제외한 다른 고전사상들에는 다소 ‘불순한’ 정치사상이 섞여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다른 관련 사건들이 줄줄이 터져나왔다. 2004년 9월5일에는 각계 저명인사 72명이 참가, 서명한 ‘갑오문화선언’이 발표됐다. 이 서명을 발의한 사람들은 화교로서는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양전닝 교수를 비롯해 유명학자 지셴린과 작가 왕멍 등 5명의 각계 대표들이다. 이들은 지난해 9월3일부터 사흘간 베이징에서 열린 ‘2004년 문화 최고봉 논단’ 자리를 빌려 국내외 동포와 국제사회에 ‘우리의 문화주장’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의 핵심은 전통문화에 대한 재평가와 재건설이 필요하며, 중화민족 전통문화의 핵심 가치를 확대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또 중국 문화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각 민족과 국가는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 차원에서 공자학교 세운다
중국 각계 지식인들의 ‘갑오문화선언’이 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10월 초 국경절 연휴기간에 베이징 시내에서는 또 다른 차원의 전통문화 수호 운동이 벌어졌다. 중국 언론과 인터넷에서는 이것을 ‘한복(漢服) 사건’이라고 불렀다. 이 일은 국경절 기간에 유명한 민족주의 인터넷 사이트인 ‘한왕’이 기획, 조직한 것으로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옛날 한족들이 입던 전통의상을 입고 베이징시 번화가를 활보한 사건이다. 이들은 중화민족, 그 중에서도 특히 한족문화의 부흥을 주장하며 일상생활에서 전통의상 입기과 같은 운동을 실천해나가자는 취지에서 ‘한복 사건’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지난해 벌어진 일련의 문화복고 사건들 중 마지막은 ‘원도(原道) 사건’이다. ‘원도’는 학술잡지 이름으로, 지난해 12월19일 창간 10주년을 맞아 ‘원도 10년 - 유학, 공통의 전통’이라는 주제로 대규모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는 중국 내 자유주의, 좌파 계열의 유명학자들이 대거 참석해 유가와 중국 전통문화 부흥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중국 관방도 침묵하지만은 않았다. 드러내놓고 공자 예찬론을 펼치지는 못해도 간접적인 행동과 정책들을 통해 정부의 입장을 표시하고 있다. 가장 큰 주목을 끈 것은 ‘공자 제사’다. 2004년 9월28일 공자 탄생 2555주년 기념일에 산둥성 취푸에 있는 공자 묘에서 관방이 주관하는 공자 제사를 지냈다. 취푸시 시장과 부시장 등 정부 관원들이 대거 참석한 이 공자 제사는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행해진 관 주도의 제사였다. 이외에도 중국 정부는 지난해 11월 한국에 처음으로 ‘공자학교’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조만간 전세계에 100개의 공자학교를 세워 중화민족의 전통사상을 널리 알려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지난해 9월부터는 중앙선전부와 교육부 주최로 ‘민족문화 발양과 교육의 달’ 행사를 열어, 각급 학교에 청소년들에게 민족문화 교육을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중국에서 전통문화 부흥운동은 지난해에 갑자기 불거진 게 아니다. 90년대 초반부터 이미 이러한 전통문화를 부흥시키자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전개돼왔고, 90년대 후반에는 ‘신유가 논쟁’ 등이 벌어지면서 유교의 현대적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들이 지난해를 기점으로 학계와 민간, 정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봇물처럼 쏟아져나오는 데는 현재 중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환경이 반영돼 있다고 분석하는 견해들도 있다. 이 논쟁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들어서도 식을 줄 모르고 있고, 대표적 관방매체인 <인민일보>가 올해 2월 중국 전통문화를 수호하자는 요지의 글을 연속으로 내보낸 것 등은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지’도 개입돼 있다는 분석이다.
‘고전읽기 논쟁과 정치보수주의’라는 글에서 젊은 학자인 청칭(成慶)은 “이것은 미래 중국의 다양한 정치적 비전에 대한 발언권 쟁취투쟁의 성격이 짙다”며 “고전읽기 논쟁을 통해 중국 사회에 정치보수주의가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팡푸(龐朴)는 <외탄화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정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조화로운 사회’ ‘민본주의’, 그리고 ‘화평굴기’ 등의 정책은 모두 중국 전통사상과 유학의 주요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정부가 판단하기로) 현재 정세에서 필요한 것으로 문화복고주의의 흐름은 이 지점에서 정치와 결합점을 찾았다”라고 논평했다.
전통과 민족주의로 인민을 묶는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한 연구원은 중국 사회에 문화 복고열이 불고 있는 것은 “후진타오 체제의 정치 보수화 경향과 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민족주의 고양 열기가 뒷받침돼 있다”고 분석한다. 유가가 과거 봉건 통치자들의 구미에 맞아떨어진 통치사상이 되었듯이, 지금의 중국 정부도 정치권력의 합법성을 지배계급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라고 말하는 유가사상의 기본 이념과 중화민족 부흥을 외치는 민족주의 사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미 ‘고별혁명’을 한 중국에서 전통과 민족주의가 아니면 무엇으로 인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느냐는 얘기다. 이 때문에 최근 고전읽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왕도정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헌법학자들이 ‘유가헌정주의’ 등을 제창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에서 공자가 수난받는 시대는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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