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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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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알리의 백인 친구들

등록 2004-11-04 00:00 수정 2020-05-03 04:23

튀니지를 감시사회로 만드는 종신 대통령…석유와 대테러전 노린 미국과 유럽의 낯뜨거운 지지

▣ 파리=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10월24일 튀니지의 대선 1차전에서 현 대통령 벤 알리(68)가 94.5%의 득표율을 얻었다. 알리는 4명의 후보 가운데 절대 과반수의 지지율을 얻어 2차전도 치를 필요 없이 곧장 당선된 것이다. 그는 1987년부터 17년간 튀니지를 장기 집권하고 있던 터다. “그래도 이번엔 나은 거다. 지난번엔 한명 빼고 모두 벤 알리를 찍었다, 후후….” 파리에 사는 어느 중년 튀니지인이 이번 선거 결과를 냉소적인 농담으로 맞받아친다. 1994년과 99년 대선에서 알리는 각각 99.5%와 99.9%의 득표율로 재선된 바 있다. 비공개 국민투표로 치러지는 선거에서 어떻게 매번 90%를 훨씬 넘는 투표 참가율과 득표율이 나올 수 있는 걸까.

튀니지 헌법이 사망한 날

1999년 당선 뒤 알리는 새 헌법을 제정해 2002년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새로 개정된 선거법은 75살까지 누구나 재당선될 경우 대통령직에 머무를 수 있다는 일종의 대통령 종신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도 알리가 후보로 나섰고 역시 예상대로 당선됐다. 알리 재선 시나리오나 마찬가지였던 새 헌법 통과를 위한 국민투표에 즈음해 튀니지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던 인사들은 ‘튀니지 헌법의 사망’을 고하고 한탄했다. “민주적이지 않은 튀니지였지만 그래도 헌법은 존재했었는데, 그렇게 모질게 살아남았다가 폭행에 강간까지 당하고 이젠 무자비하게 칼질을 당해선 결국 5월26일 공식적으로 장례식을 치르게 되는구나.” 튀니지의 인권운동가 사드리 키아리 튀니스의 절규였다. 여기서 2002년 5월26일은 새 헌법이 국민투표에 부쳐진 날이며 그 결과 99.5%의 지지가 보태졌다. 여하튼 모든 게 외관상으론 법대로 진행된 셈이지만, 문제는 그 법이 현직 대통령이 원하는 것이며, 국민들이 권력자가 원하는 것이 곧 법이 되는 정치 및 사회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알제리와 리비아가 좌우로 국경에 위치하며 길게 지중해를 끼고 있는 튀니지는 한반도 4분의 3 정도 크기의 국토에 인구 천만명이 안 되는 조그마한 나라다. 주변의 아랍 이슬람 국가들처럼 중세 이슬람 왕조 번영기를 거쳐 근세 스페인령이 되었다가 터키의 오토만 제국 때는 오토만 변방국으로 존속했다. 그러다 1881년 프랑스의 점령으로 프랑스 보호령으로 바뀐다.

식민지 기간 동안 다양한 저항운동을 해온 튀니지는 1956년 급기야 독립을 쟁취했다. 독립과 더불어 새 헌법이 제정돼 왕조를 마감했고, 동시에 대통령 중심제를 뼈대로 하는 공화국을 건립했다. 당시 국회에서 선임 형식으로 임명된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는 1975년 종신제를 선언한다. 부르기바의 튀니지는 60, 70년대 국가의 정체성 수립에 초점을 맞춰 이뤄진 사회주의적 성격의 개혁과 80년대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주도하면서 유일무이한 집권당 중심의 독재정치 환경을 키워간다.

그러다 1987년 11월 당시 총리이자 전직 장교인 벤 알리가 부르기바의 쇠약한 건강을 핑계로 대통령직을 이양받는다. “대통령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 총리가 대신한다”는 헌법에 근거한 합법적 권리 이양이라는 벤 알리의 주장이지만, 모두 ‘쿠데타’로 인정하는 상황이다. 굳이 토를 단다면 ‘의료적 쿠데타’라 부르기도 한다. 알리는 권력 인수 직후 가진 연설에서 “앞으로 국민이 전적으로 배제된 대통령 종신제나 자동 권력 이양은 없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시민단체들의 다양성과 복수 정당제에 기반한 합법적이고 개선된 정치 환경을 우리 국민들은 당연히 맛볼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그 뒤 17년이 지난 오늘날의 튀니지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70명의 시민에 경찰 한명꼴인 만큼 경찰력이 막강한 감시사회로 변했다. 정식으로 인정된 사회활동 시민단체는 10여개에 지나지 않는다.

정보와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인터넷도 이를 적극적으로 장려한다는 정부의 말과는 달리 지난해 위험한 자료를 다운로드했다는 이유만으로 9명의 젊은이들이 체포됐다. 반권력적 범죄는 튀니지에선 최고 26년의 실형까지 가해진다. 튀니지 정보부 직속기관인 튀니지 인터넷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는 튀니지의 인터넷 사용인구는 전체 인구의 6% 정도에 그치고 있다.

시라크의 알리 지지에 인권단체 분노

반권력적 동향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가속화하던 알리 정권은 1993년 “국내에서 처벌 가능한 범죄를 국외에서 범하는 경우에도 처벌할 수 있다”는 법까지 보태며 국민들의 공포감을 키워왔다. 이런 환경에서, 그때도 자유는 없었지만 교육과 문화적 르네상스 분위기가 있었던 부르기바 정권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사회 분위기는 익히 짐작이 간다. 독립 뒤 자유다운 자유를 맛본 적이 없는 튀니지지만, 경제 성장만큼은 주변 아랍국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른바 ‘산업화할 수 있는 산업’의 발전에 중점을 두어 관광업을 비롯해 서비스업을 발전시켜왔다. 연간 경제성장률 5% 를 기록하는 등 북아프리카 아랍국가들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2700달러로 가장 높다.

연간 3%의 인플레이션으로 북아프리카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에 속했던 튀니지다. 그런데 2002년 경제성장률이 1.9%로 급락했다. 9·11 테러 사태의 여파 때문이다. 서유럽 사람들이 관광 및 투자 진출을 꺼려한 탓이다. 실제로 2002년 봄 튀니지의 한 유대교 사원에서 폭발물 테러사건이 발생했고, 농업 흉작까지 겹쳤다. 또 유럽연합의 확대에 따라 역내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상대적인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튀니지는 유럽과의 교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튀니지가 독재정치를 하면서도 오랫동안 유럽과 미국과 잘 지내온 것은 긴밀한 경제 및 외교 관계 때문이다.

지난해 말 튀니지를 방문한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은 “가장 우선적인 인권은 먹고, 치료받고, 교육받고, 주거지를 가지는 것”이라는 발언을 해 인권운동가들의 신랄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여러 방면에서 튀니지는 다른 수많은 나라들에 비해 앞서 있다”고 덧붙인 시라크의 연설 요지는 알리를 지지한다는 표시였다. 튀니지는 미국과도 돈독한 사이다. 2002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인 테닛이 그리고 지난해 말에는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이 각각 튀니지를 방문했다. 올해 2월 알리는 부시의 미국 방문 초청을 받기도 했다. 특히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튀니지의 협조는 눈부시다. 긴밀한 정보 교환을 비롯해 미국은 정기적으로 튀니지와 군사훈련을 펼치고 있다. 튀니지의 석유 개발과 생산을 담당하는 미국 기업들도 튀니지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이런 친미적 행위들은 비단 튀니지뿐만 아니라 온건주의 아랍국들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면이기도 하다.

독재를 지지하면 테러가 온다

튀니지의 인권 및 민주운동가이며 여러 차례 체포됐다가 현재 파리에 망명 중인 몽세프 마르주키는 아랍 세계와 테러와의 전쟁 시대의 왜곡된 국제 질서에 일침을 가한다. 그는 “미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몇몇 나라들은 아랍 세계의 독재자들을 후원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유럽으로 몰려오는 불법 이민자들을 축출하고 테러 이슬람 조직들을 저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나라들은 국제무대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치면서 정작 그들의 대표는 세계에 민주주의를 심는 데 앞장서기보다는 마피아적 정권과 독재자들을 오히려 격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르주키는 경고한다. “아랍 민중들은 나날이 독재정치에 치를 떨고 있고, 동시에 반서구와 반미 정서에 차츰 더 젖어가고 있다. 이런 정서가 폭발해서 끔찍한 사건을 만드는 데는 작은 불똥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독재자를 지지하여 얻을 수 있는 서방 세계의 이익은 오히려 나중에 서방 세계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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