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독일에서 사라졌던 것들이 추억의 상품으로 부활… 디자인·영화·미술 등으로 시장 넓혀
최근 독일사회에서는 ‘추억’ 또는 ‘과거회기’(retro)가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코드로 자리잡고 있다. 80년대를 풍미했던 각종 ‘추억의 상품’이 물밀듯 쏟아져나오고, 한 상업방송사가 제작한 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그 여세를 몰아 80년대 이라는 노래로 독일 가요계를 평정했던 한 여가수는 컴백에 성공했고, 한국에도 잘 알려진 남성그룹 ‘모던 토킹스’는 재결합과 함께 각종 가요차트의 상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잊혀졌던 독일 스포츠 상표 ‘퓨마’는 새로운 패션 디자인 감각으로 젊은 소비자층을 사로잡으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독일의 소비문화 코드는 ‘추억’이다

‘퓨마’의 성공은 많은 이들에게 70년대 향수를 자극했다. 당시 서독 프로축구 1부 리그에는 ‘아디다스’ 신발을 신은 선수들이 주로 ‘정면돌파’라는 단조로운 전술을 구사했다. 이때 ‘퓨마’를 신은 한 소도시 축구단이 혜성처럼 등장해 ‘측면돌파’라는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며 단숨에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또한 동서냉전이 지배적이던 당시 정치구조 속에,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동방정책’이라는 ‘측면돌파’로 동서독 갈등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하나의 신발상표가 이제 노년에 접어드는 독일의 68세대들에게 복합적인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것처럼 ‘추억’이라는 코드는 강력한 흡입력을 자랑하며 독일 소비문화 속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돌풍은 급기야 독일인들에 지금까지 조소와 멸시의 대상이었던 ‘사회주의 동독’까지 그 대상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동서 베를린을 외양만으로 구별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서베를린 지역에는 길게 뻗어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고층 아파트 단지’는 노동자들의 복지를 상징하는 옛 동독(DDR) 사회주의식 거주문화의 하나였다. 단순한 회색 빛의 다소 흉물스럽던 고층 아파트 단지들은 지난 13년간 화려한 빛깔로 새롭게 단장되었고, 통일 이후 도시생활을 동경하며 베를린으로 상경한 독일 젊은층이 선호하는 거주공간으로 변해버렸다.
동베를린 거리에 들어섰음을 쉽게 알아차리게 하는 또 하나의 힌트는 바로 건널목의 신호등이다. 서베를린 신호등의 평범한 사람 모형과는 달리 동베를린의 신호등에는 모자를 쓴 귀여운 ‘꼬마신사’가 등장한다. 이 신호등 꼬마신사는 분단과 통일이라는 세월의 파도를 넘어 어느덧 동베를린 거리의 상징물이 되었다. 옛 동독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아온 신호등 꼬마신사는 1961년 한 교통 심리학자에 의해 탄생되었다. 이는 어린이와 시력장애인들에게 더 눈에 띄기 쉽고 안전한 교통표시를 만들고자 했던 동독 교통정책의 결과였다. 1989년 동독 정부는 건립 40주년을 기념해 많은 이들에게 이른바 ‘사회주의 공로훈장’을 수여하는 등 성대한 행사를 치렀다. 이 행사에서 신호등 꼬마신사는 40주년 기념품에 등장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해 자유를 외치는 동독 시민들에 의해 철옹성 같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신호등 꼬마신사의 운명도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꼬마신사의 첫 번째 시련은 서독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동독의 신호등 꼬마신사는 암울했던 동서냉전의 분단 시기에도 서베를린 지역으로 수입되었고, ‘남성’을 상징하는 꼬마신사의 중절모자는 당시 서독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서베를린시 정부도 이러한 여론을 받아들여 꼬마신사 신호등을 다시 철거하고 만다. 40년 동독 철권 통치의 폐막을 알리는 맑스 동상과 레닌 동상의 대대적인 철거작업에 이어 신호등 꼬마신사도 하나 둘 철거돼 나갔다.

동상과 함께 사라졌던 신호등 꼬마신사
체제 전환의 격변기인 90년대 옛 동독시민들은 정치무대에서 자신들의 발언권을 잃어버렸다. 슈퍼마켓의 상품들에서 화폐에 이르기까지, 재건축에서 학교 교과과정까지 모든 것이 옛 서독을 기준으로 동독시민들에게 강요되었다. 속속들이 옛 동독 정부의 만행들이 밝혀졌고, 공안 당국 협력자들의 방대한 신상자료가 공개되었다. 동서 분계선과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사망·처형된 동독시민이 1천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동독 공안 당국은 이웃집, 심지어 아내와 자식들까지 체제 저항적인 사람을 관찰하는 첩보원으로 활용하였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드러났다. ‘저항하지 않았던 자들’은 모두 독재 정권의 ‘간접적 협력자’로 여기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심지어 동독보다 오히려 서독에서 인기를 끌었던 동독의 저항 문인들과 예술가들 중 상당수가 공안 당국의 협력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90년대 초반 이른바 ‘협력자 논쟁’을 통해 옛 동독의 국가예술뿐 아니라 저항예술과 문화마저도 통일 독일에서 그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런 동독체제의 몰락은 그 사회의 중심세력이었던 30∼40대들의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이들에게 새로운 통일 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은 하루빨리 옛 동독의 생활양식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조기 연금을 받으며 은퇴에 들어간 노년의 옛 동독 노동자들이나 새로운 것을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청소년들과 달리, 이들 장년 세대는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을 삶의 무게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90년대 후반, 분단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며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철거되던 ‘신호등 꼬마신사’가 옛 동독 시민들이 중심이 된 시민단체들의 저항과 노력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2000년에는 꼬마신사를 소재로 한 디자인 업체도 출현했다. 꼬마신사는 열쇠고리, 티셔츠 등 캐릭터 상품으로 부활하며 시민들의 폭발적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베를린 시의회도 새로 교체하는 건널목 신호등은 옛 동독의 꼬마신사 신호등으로 교체하는 방안을 의결하게 된다. 경매 사이트에서는 옛 동독 가수들의 LP판이 고가에 팔리기 시작했고, 각종 동독 관련 전시회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상영 초반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6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Goodbye Lenin)은 ‘추억’이라는 문화코드의 상업화에 성공한 대표주자로 꼽히고 있다.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의식불명에 빠진 열성 당원 ‘어머니’는 동독체제의 몰락을 경험하지 못한 채 ‘통일 독일’에서 기적적으로 다시 의식을 찾는다. 어머니가 다시 커다란 충격에 빠져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걱정한 아들 알렉스는 어머니가 ‘사회주의 조국 동독’과 아름답게 이별하는 것을 도와준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동독 상품들 중 몇몇은 이미 거의 모든 슈퍼마켓의 진열대에서 찾아볼 수 있고, 뮌헨 등의 동독상품 전문점, 동독의 각종 기호상품들을 주문 판매하는 인터넷 사이트들도 성업 중이다. ‘80년대 쇼’를 통해 성공을 거둔 상업방송사는 ‘동독 쇼’(DDR Show)를 9월3일부터 시작한다고 홍보 중이다. 연이어 독일 제2 국영방송사도 동독을 소재로 삼은 프로그램을 발표했고, 다른 상업방송사들도 앞다투어 유사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굿바이 레닌〉의 성공… 자본주의의 위력인가
한편 옛 ‘동독’ 사회에 대한 ‘집단적 거부’에서 ‘선택적 수용’으로 돌아선 경향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선택적 수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최근 시작된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의 동독 미술전을 꼽을 수 있다. 지난 98년에 시도되었던 ‘동독의 미술’ 전시회는 들끓는 여론에 밀려 조기에 전시를 마감했다. 사회주의적 현실주의 경향의 미술품들이 당시 주된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에 반해 올 10월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는 ‘동독의 미술’이 아닌 ‘동독에서의 미술’을 그 제목으로 하고 있으며, 400여점에 이르는 대규모 작품들에는 체제 비판적이거나 검열을 피해 제작된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국가 주도의 미술작품들을 극도로 제한해 한 구석으로 몰아넣음으로써 비난의 화살을 비켜나간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 적혀 있는 “예술의 시간은 정치 또는 역사의 시간과 다른 것”이라는 동독 출신 극작가 ‘하이너 뮐러’의 말에서 전시 기획자들의 의도를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추억’을 거침없이 팔아먹는 오늘의 자본주의 상품문화가 예술과 역사의 시간을 구별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베를린=강정수 전문위원 jskang@gmx.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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