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유고슬로비아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탁구뿐만 아니라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대회였다.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한국에는 ‘사라예보의 기적’이었지만 중공(현 중국)에는 ‘사라예보의 비극’이었다.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은 조 예선 A·B조를 1·2위로 통과한 4개국이 예선 전적을 안고 돌려 붙는 라운드로빈 방식으로 치러졌다. B조에 속한 한국은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단식, 이에리사와 박미라를 복식에 기용해 스웨덴·유고슬라비아·서독을 3-0으로 완파한 뒤 중공과 실질적인 결승전을 벌이게 되었다.
한국은 첫 번째, 두 번째 단식에서 이에리사와 정현숙이 중국의 정화이잉과 후위란을 각각 2-1로 꺾으며 2승으로 앞서나갔다. 세 번째 복식에서 이에리사-박미라 조가 중국의 정화이잉-장리 조에 0-2로 졌으나 네 번째 단식에서 강력한 루프드라이브를 장착한 이에리사가 그 대회 단식 세계챔피언인 후위란을 세트스코어 2-0(21-15, 21-18)으로 눌러 우승으로 가는 최대 고비를 넘었다. 4강이 겨루는 결승리그는 B조에서는 한국과 중공이 1·2위로 올라갔고, A조에서는 일본과 헝가리가 진출했다. 한국은 4강 결승리그에서 일본과 헝가리를 각각 3승1패로 꺾고, 라운드로빈 방식에 따라 예선에서 거둔 중공전 1승을 포함해서 3전 전승(예선리그 포함 8전 전승)으로 완벽하게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세계를 제패한 한국 탁구의 주역 이에리사가 겨우 19살이었기 때문에 한국 여자탁구는 2년마다 열리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최소 두 대회 정도는 더 정상에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2년마다 홀수 해에 열리기 때문에 1975년(33회), 1977년(34회) 대회를 치를 때쯤 이에리사의 나이가 여자탁구 선수의 기량이 절정에 이르는 21~23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5년 인도 콜카타에서 치러진 33회 대회에서 한국 여자탁구는 복병을 만났다. 중공이 듣도 보도 못한 ‘이질(異質)러버’(라켓 표면에 붙이는 고무판·롱핌플러버)를 들고나온 것이다.
이질러버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 구기 종목 사상 처음 세계를 제패한 이후 가볍게 2연패를 노렸던 한국 여자탁구의 등 뒤에 비수를 꽂는 중공의 비밀병기였다. 중공의 거신아이 선수는 다른 나라와 경기할 때는 평범한 라켓으로 싸웠지만, 한국 선수들과 경기할 때는 이질러버를 장착한 라켓을 들고나왔다. 이질러버를 사용한 이면타법은 백핸드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서 개발됐지만, 결국 중공 탁구를 위기에서 탈출시킨 구세주 역할을 했다.
2년 전 사라예보 대회에서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한 이후 더욱 노련해진 한국 대표 이에리사와 정현숙은 이질러버를 들고나온 거신아이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그야말로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불과 5~6분 만에 참패를 당한 것이다. 당시 세계선수권대회 2연패를 확신했던 한국 팀의 에이스 이에리사는 거신아이에게 완패를 당한 뒤 너무 분해서 경기장에서 숙소까지 가는 동안 울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튼 중공은 ‘사라예보의 비극’으로 충격받고 그대로 가다가는 한국 탁구에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특단의 대책을 세운 끝에 이질러버를 마련했다. 중공 탁구는 이질러버로 한국의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제압한 뒤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이질러버를 사용해 지금까지 세계 탁구를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스포츠는 경쟁을 먹고 산다.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스포츠 세계에서 남에게 이기려면 ‘기존 방법을 답습’해서는 곤란하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스포츠 역사에서 시대를 앞서갔던 새로운 방법이 세계를 제패했고, 그 새로운 방법은 오랫동안 스포츠계를 지배하곤 했다. 기영노 스포츠평론가가 그 순간의 역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