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프로화 이후 구단 이기주의와 인센티브 부재 속에 추락하는 ‘태극마크’의 경쟁력 </font>
▣ 조범자 기자 butyou@sportsworldi.com
“프로구단들의 협조 없이는 더 이상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지난 5월26일 일본 도쿄 메트로폴리탄 경기장 기자회견장에선 자조 섞인 한숨이 새어나왔다. 당장 눈앞의 올림픽 진출 실패라는 ‘좌절감’보다는 뚜렷한 해결책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에 더 겁이 났다. 이정철 한국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모든 게 감독 책임”이라고 고개를 떨궜지만, 속으론 구단 이기주의로 일관한 프로 구단들을 떠올리면서 가슴 한켠이 무너져내렸다.
[%%IMAGE4%%]<font color="#216B9C">△ ‘울고 싶어라~!’ 지난 5월25일 일본 도쿄 메트로폴리탄 경기장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세계 예선 7차전 경기에서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상대 전적 5전 전승을 기록했던 도미니카공화국에 1-3으로 역전패하며,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사진/REUTERS/ KIM KYUNG HOON)</font>
태릉선수촌에서 선수 빼가는 ‘신풍속도’
한때 세계 무대를 호령하고 아시아 정상을 자부했던 한국 여자배구가 2008 베이징올림픽 세계 예선에서 여덟 팀 가운데 6위에 그치며 올림픽 진출마저 좌절됐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메달(동메달)을 따낸 여자배구가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 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이어 이번이 역대 두 번째. 1996년 애틀랜타 대회부터 3회 연속 올림픽 무대를 밟은 여자배구의 저력은 이번 대회 어느 경기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라이벌로 여겼던 일본에는 1-3으로 패하며 최근 상대 전적 11연패를 기록해, 더 이상 ‘맞수’로 불리기에도 낯부끄러운 지경이 됐다. 상대 전적 8전 전승을 기록했던 카자흐스탄과 5전 전승을 거뒀던 도미니카공화국에 완패한 건 어떤 설명으로도 납득되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배구팬들은 “한국 배구는 끝났다”며 종언을 고했다.
배구 관계자들은 올림픽 예선을 앞두고도 지난 시즌보다 오히려 한 라운드를 늘려 7라운드의 장기 레이스로 V리그를 운영한 한국배구연맹(KOVO)을 탓하기도 하고 김연경·황연주(이상 흥국생명)·정대영(GS칼텍스) 등 주축 선수들을 부상을 이유로 대표팀에 보내지 않은 구단 이기주의를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배경은 따로 있다. 일견 성공작으로 비쳤던 ‘배구 프로화’가 서서히 ‘국제경쟁력 약화’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2005년 야구와 축구, 농구에 이어 4대 구기 종목 중 가장 마지막으로 프로화의 첫걸음을 뗀 배구는 4번의 시즌을 거치며 지역 연고제 정착,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 등으로 프로 흉내를 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프로화 이후 국가대표팀의 경쟁력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프로’라는 그럴듯한 열매가 빛나긴 했지만 그 뒤의 어두운 그림자는 갈수록 짙고 길어졌던 것이다. ‘태극마크’에 대한 명예와 자긍심보다 리그 소속팀의 성적이나 개인 공헌도에 따른 달콤한 연봉과 보너스가 선수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프로’라고 생각했다.
태릉선수촌에서 한 달 이상 이어지는 고단한 합숙훈련의 결과가 정작 소속팀에서는 부상과 체력 저하로 나타나자 어린 선수들은 대표팀 합류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프로 출범 이후 생겨난 ‘신풍속도’다. 구단 관계자가 ‘선수 보호’라는 미명으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소속팀 선수의 손목을 낚아채 당당히 대표팀을 이탈하는 장면도 더는 충격적이지 않다. 게다가 실력 좋은 어린 재목들이 여기저기서 마구 쏟아지는 행복한 상황도 물론 아니다.
남자 배구는 병역 혜택, 여자는?
그 결과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5위에 오르며 ‘매운맛’을 보여줬던 여자배구는 불과 4년 뒤인 올해엔 본선 진출에도 실패하는 비보를 맞게 된다. 세계선수권에선 2002년 6위였던 한국 여자배구가 프로 출범 뒤인 2006년 13위로 급추락했고, 늘 중국·일본과 메달 색깔을 다퉜던 아시아선수권에선 2005년 카자흐스탄에 밀려 4위, 2007년엔 타이에 뒤져 또다시 4위로 메달을 놓치는 위기를 맞았다. 그랑프리 국제여자배구대회 역시 1997년 3위에까지 랭크됐던 대표팀이 2004년 11위, 2005년 9위로 맥을 못 췄다. 급기야 2006 도하아시안게임에서는 대회 사상 최초로 노메달에 그치는 수모를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선수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수만은 없다. 몸이 재산인 선수들에게 무조건적 희생을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무작정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도 진부하다. 선수들의 구미를 당길 만한 메리트 제도가 필요하다. 같은 배구라 해도 남자의 경우는 다르다. 바로 ‘병역 혜택’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 선수라면 올림픽 메달 또는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 문제를 해결해 선수 생활을 좀더 안정되게 이어갈 수 있다.
프로 출범 12년째인 농구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남자는 병역제도로 그나마 대표팀의 국제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지만 여자는 이렇다 할 인센티브가 없어 갈수록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여자농구도 2006 도하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첫 노메달의 치욕을 안았지만 고참 선수들을 다시 불러모아 간신히 베이징올림픽 티켓을 딴 상태다. 하지만 아마추어 시절을 더 길게 보낸 노장 선수들이 대표팀을 떠난 뒤 여자농구가 국제무대에서 또 어떤 결과를 낼지는 장담할 수 없다.
프로스포츠라 해도 축구와 야구는 상황이 다르다. 축구는 배구·농구와 정반대 양상이다. 소속팀에서의 활약을 발판 삼아 대표팀에 들어가는 게 선수들의 1차 목표다. 세계적으로 시장이 넓게 형성된 축구라는 종목 특성상 대표팀에 뽑혀 A매치에서 이름을 날려야만 유럽 빅리그에 진출할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빅리그에 진출하지 않더라도, 소속 리그에서 몸값을 두세 배 띄울 수 있는 지름길은 대표팀 활약이 거의 유일하다. 그래서 축구에서는 거꾸로 소속팀이 말리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대표팀에 가려는 선수들이 줄을 섰다.
야구는 병역 혜택이라는 ‘실리’와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에 힘입어 굵직굵직한 대회 때마다 당대 최고의 대표팀이 꾸려지고 있다. 간혹 ‘실리’가 충족된 스타급 선수들이 조금씩 태극마크의 자부심을 잊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최정예 멤버로 ‘드림팀’이 구성되고 있다.
애국심만 바라지 말고 동기 유발해야
다시 여자배구. 맹목적 애국심에 기대기 힘들다면, 그 이상의 애정과 열정을 끌어낼 만한 동기 유발이 필요하다. 국가대표팀에서의 공헌도에 따라 소속팀에서 인센티브를 주든, 연봉 고과에 반영하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당근책이 필요하다. 국제대회의 성적이 좋고 나쁨에 따라 리그의 인기가 오르내리기 때문에 이제 각 구단들도 팔짱만 끼고 볼 순 없는 일이다. 한국 여자배구의 실력이 50이라면 그것을 100으로 만들 수 있는 게 1970~80년대엔 명예와 자긍심이었다. 이젠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제시돼야 한다. 대한배구협회와 한국배구연맹, 각 구단이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고 머리를 맞댈 때다. 프로화 이후 국제경쟁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다시 아마추어로 되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 다음 올림픽까지는 고작 4년 남짓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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