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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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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등록 2002-06-20 00:00 수정 2020-05-03 04:22

충격적인 중산층 가정의 존속살인사건… 자녀를 학력 경쟁터로 내모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풍경

또다시 끔찍한 존속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대학생 아들이 아버지와 할머니를 차례로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 주검 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군입대를 앞두고 있던 그는 지금 냉엄한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제서야 “후회스럽고 죄송하다”고 입을 열었다.

지난 6월9일 새벽 3시30분께 이아무개(22·ㅅ대 3년 휴학)씨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ㅇ아파트 자신의 집 안방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스키 폴대 끝에 흉기 두개를 테이프로 묶어 마치 삼지창처럼 만든 도구가 들려 있었다. 안방엔 그의 아버지(47·ㄱ대 경영학부 교수)가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목을 겨눠 흉기를 찔렀다. 아버지가 충격에 깨어나 덤벼들자 그는 다시 옆구리와 이마, 무릎 등을 잇따라 찔렀다. 그는 이어 건넌방에서 자다 시끄러운 소리에 깨 거실로 나온 할머니(72)마저 흉기로 찔렀다.

“넌 왜 그 모양이냐!”

오전 6시께 이씨는 집을 나왔다. 근처 목욕탕에서 샤워를 한 그는 아침 8시30분 건대 앞 카페에서 여자친구 김아무개씨를 만났다. 여자친구의 여권 갱신을 도와주기로 전날 이미 약속이 돼 있었다. 10시30분 여자친구와 헤어진 그는 다시 분당 집으로 돌아왔다. 숨진 아버지의 차를 타고 근처 주유소에서 휘발유 3l를 사와 거실과 주검을 덮은 이불 등에 뿌리고 불을 질렀다. 오후 1시께였다.

처음 경찰의 심문을 받으며 그는 범행을 부인했다. 6월9일 새벽 3시께 강남의 친구 ㅁ씨 집에 가 있었다고 알리바이를 댔다. 친구 ㅁ씨도 같은 진술을 했다. 그러나 둘의 진술엔 미세한 차이가 발견됐다. ㅁ씨는 새벽 3시께 이씨가 와서 곧 잠이 들었다고 했지만, 이씨는 ㅁ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5시께 잤다고 했다. 여자친구를 만난 뒤의 행적에 대한 진술도 엇갈렸다. ㅁ씨는 오전 10시30분 여자친구를 만나고 다시 집으로 온 이씨와 함께 텔레비전을 봤다고 했지만, 이씨는 ㅁ씨 집에 가자마자 곧 잠이 들었다고 말했다. 12시간 만에 이씨는 결국 사건 전모를 털어놓았다. ㅁ씨에겐 단순히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경찰에 말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분당경찰서는 존속살인 혐의로 11일 이씨를 구속했다.

이씨는 경찰에서 처음엔 “명문대를 졸업한 아버지가 ‘공부를 못한다’고 꾸짖는 등 권위적으로 대해 오래 전부터 반감을 가졌다”며 “그러다 보니 존경심이 원망으로 바뀌고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날 새벽 자는 모습을 보고 살해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6월12일 현장검증에선 “사건이 일어난 날 밤 친구들과 맥주 1000cc를 마시고 11시30분께 집에 들어갔는데, 아버지가 ‘왜 이렇게 늦게 다니느냐’며 머리를 손으로 몇대 때리는 바람에 그만 죽이고 싶었다”고 범행동기를 바꿔 말했다. 그는 “몇대 맞고 서재로 가 두 시간 동안 ‘나는 네 나이 때 안 그랬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는 아버지의 질책을 들어야 했다”며 “마지막엔 정말 이런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씨가 ‘머리가 복잡해 사건 직전 두통약 13알을 한꺼번에 먹은 상태로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숨진 이씨의 아버지는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ㄱ대에서 교수로 근무해왔다. 이씨의 어머니(46)는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숨진 할머니(72)는 유치원을 경영했다.

2남1녀 중 장남인 이씨는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국내로 들어왔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다시 미국으로 나간 그는 6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검정고시로 고교과정을 마친다. 이씨의 외삼촌은 “당시 비자가 만료된 상황에서 본인은 들어오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워낙 원리원칙주의자라서 그렇게 안 했다”며 “아마도 그때 아버지에게 크게 마음이 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엘리트 아버지의 기대와 현실의 격차

검정고시를 마친 이씨는 캐나다 밴쿠버로 가 전문대학을 다니다 1998년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 재수를 거쳐 2000년 ㅅ대 영문과에 특례입학했다. 범행 당시 그는 군 입대(6월20일 예정)를 불과 11일 앞두고 있었다.

이씨와 가족들은 그가 평소 아버지로부터 학력과 공부 문제로 정신적 압박을 크게 받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왜 그것밖에 못하느냐는 야단을 자주 들었다”며 “밴쿠버에서 전문대 다닐 때도 아버지가 크게 실망하는 표정이었으며, 그렇게 있을 바에는 차라리 들어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친척들 말을 들어보면 아버지가 큰아이 얘기를 꺼내는 자체를 꺼릴 정도였다”며 “엘리트 코스를 밟은 아버지 밑에서 열등감을 자극당하며 자라는 과정에서 적개심이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할머니와의 관계는 비교적 무난한 편이었다고 전했다. 이씨 어머니는 “할머니는 첫 손자니만큼 어려서는 땅에 내려놓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했다”며 “자라면서 아버지와 엄마를 닮았으면 아주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하니 좀 실망하시긴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이씨가 ‘할머니에 대해선 별로 나쁜 감정이 없었지만, 아버지를 죽이는 걸 봤는데 어떡하느냐’고 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어머니에 대해선 “늘 힘이 돼주셨다”며 “어머니가 옆에 있었다면 안 그랬을 것 같다”고 울먹였다. 이씨의 어머니는 지난해 12월부터 미국에 나가 조기유학 중인 이씨의 두 동생을 뒷바라지해왔다. 이씨는 “사건 3일 전에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전화통화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심경을 얘기했냐”는 질문엔 “그냥 잘 있느냐는 얘기만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에 깊은 충격과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사건을 단순히 일회성의 충격적 사건으로 흘러보내선 안 되며 사회적 차원의 대응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특히 이번 사건이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중상층 가정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했다. 에스원 범죄예방연구소 이현희 전문위원(사회학 박사)은 “이번 사건은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상습적으로 구타한다든가 하는 물리적인 폭력이 심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이해가 존재하는 가정에서 발생한 것이 특이하다”고 지적했다. 이 전문위원은 “부모를 우발적으로 죽이는 경우도 대개 아버지의 가정폭력이 만연돼 있는 경우”라며 “이번 사건은 사람에게는 경제적인 욕구 이외에 자존감이 매우 중요함을 말해준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자존감은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데, 이번 사건에선 엘리트 아버지의 기대와 아들의 현실과의 격차가 너무 컸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같은 맥락에서 전문가들은 자녀를 학력지상주의의 경쟁터로 내모는 한국 부모들의 과잉기대와 독선적 태도를 존속범죄의 주요한 배경으로 제시한다. 이훈구 연세대 교수(심리학)는 2년 전 벌어진 ‘명문대생’ 이은석씨의 부모 토막살인사건을 연구해 지난해 라는 책으로 펴낸 바 있다. 그는 책에서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란 무엇인지,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전혀 연구를 하지 않고 그저 남 하는 대로 그리고 자기 신념대로 밀고 나가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는 “자식의 행복이 명문대 입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며 “자식이 잘돼야 부모의 위신이 선다는 착각은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대 간 심리적 단절도 원인

세대 간 심리적 단절이 불러온 비극이라는 지적도 많다. 과학수사연구소의 강덕지 범죄분석실장은 “이번 사건은 본질적으로 요즘 젊은 세대의 외부 자극에 대한 심리적 저항치가 급격히 떨어진 데서 비롯된 것”이라며 “부모 세대가 오로지 공부만 강요할 뿐 자식들의 인성교육에 무관심한 결과 조그마한 질책 등에도 쉽게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현상이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현희 전문위원은 “존속살인범의 경우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내적으로 억압하고 있다가 일순간 폭발시킨다”며 “심리학에서 ‘수동-공격적 성향’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그 희생자가 되기 쉽다”고 말했다. 이훈구 교수는 “기성세대는 효 사상 등 깊숙이 밴 유교적 도덕관념 때문에 부모에 대한 복수심 등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 채 성장한 반면, 요즘 세대는 자기 주장이 강하며 이런 것이 가로막힐 때 쉽게 폭발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존속살인사건의 사회적·심리적 의미를 면밀히 분석해 이를 토대로 우리 사회제도, 교육제도, 가정교육 문제 등을 심각하게 재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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