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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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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마우스로 저항한다”

등록 2000-09-07 00:00 수정 2020-05-03 04:21

통신질서확립법 등 기성세대의 ‘부적절한 통제’에 반발하는 10대 온라인 시위대

8월 말과 9월 초 사이버공간은 ‘개인정보보호 및 건전한 정보통신 질서확립 등에 관한 법률’(이하 통신질서확립법)을 둘러싼 논란으로 들끓었다. 논란은 7월 하순, 정보통신부가 현행 통신이용촉진법을 개정한 통신질서확립법을 내놓으면서 불거졌다. 통신질서확립법에서 특히 문제가 된 부분은 인터넷 내용등급제다. 내용등급제는 유해정보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인터넷 콘텐츠마다 등급을 매기겠다는 것. 그런데 문제는 청소년 유해정보라는 기준이 광범위하고 애매할 뿐 아니라, 등급 기준과 부여, 표시 방법을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독점한다는 데 있다.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인터넷 내용등급제가 정부통제를 강화해 통신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다”며 즉각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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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부터 조금씩 확산되던 네티즌의 반발은 8월20일 1차 온라인 시위를 기점으로 더욱 거세졌다. 정보통신부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자유게시판은 ‘검열반대’ 말머리를 단 항의글들로 채워졌고, 급기야 8월26일 정보통신부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날 네티즌들은 정통부 사이트에 들어가 ‘새로고침’(reload)을 계속 누르는 시위방법을 썼다. 이른바 ‘사이버연좌시위’ 혹은 ‘서비스거부공격’이라고 불리는 방법이었다. 이는 서버에 침투하는 해킹과는 다른 것이다. 정통부와 일부 언론은 이 시위법을 해킹으로 오해해 시위에 참여한 네티즌들을 ‘해커’ 혹은 ‘훌리건’으로 매도했다가 뒤늦게 정정하기도 했다.

정통부 홈페이지에 연좌시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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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들의 반발에 더욱 기름을 부은 것은 경찰청 사이버 테러대응단의 진보네트워크 압수수색이었다. 8월28일 사이버 테러대응단이 진보네트워크에 자동고침이 되는 자바스크립트를 올린 한 네티즌의 IP(Internet Provider)어드레스를 요구하며 압수수색을 실시한 것이다. 하지만 진보네트워크는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사용자의 IP어드레스를 남겨 두지 않아 사이버테러대응단은 결국 허탕을 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통신질서확립법 반대운동의 숨은 주역들이 있다. 바로 10대 소녀들이다. 통신질서확립법 반대사이트 ‘프리온라인’(freeonline.or.kr)의 배너달기운동에 들어가 보면 이들의 움직임이 확인된다. 검열반대 배너달기운동에는 이미 210여개의 사이트가 동참했다. 노동네트워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인권운동사랑방. 그런데 여기에 다소 낯선 이름들이 자주 눈에 띈다. ‘성모천사’ ‘쵸티영혼’ ‘신화창조’ ‘너희가 젝키를 아느냐’. 모두 팬픽 사이트다. 여기에 야오이 사이트도 가세한다. ‘야오이 사랑방’ ‘랴노의 야오이 소설방’ ‘야오이 밀교’. 어림잡아 팬픽과 야오이 사이트는 검열반대 배너를 단 사이트의 약 30% 정도를 차지한다.

사회적 저항이나 표현의 자유와는 무관해 보이는 팬픽과 야오이 사이트. 왜 이들이 앞장서 검열반대배너를 단 것일까. 문제는 음란성 여부다. 팬픽과 야오이는 공히 동성애를 주제로 다룬다. 팬픽은 스타 오빠들끼리의 사랑을 다루는 것이 보통이고, 야오이는 미소년들끼리의 사랑이 주내용이다.

그런데 통신질서확립법이 올 10월 정기국회를 통과하면 팬픽과 야오이는 내용등급제에 따라 청소년유해정보나 불법정보로 분류될 가능성이 짙다. 이렇게 되면 작가이자 향유자인 10대 소녀들은 팬픽이나 야오이 사이트를 만들 수도, 들어갈 수 없게 된다. 결국 문을 닫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재제조치를 염려해 벌써 문을 닫은 사이트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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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오이, 팬픽을 짓밟지 말라

‘야오이 사랑방’이 대표적이다. 이 사이트를 클릭하면 검열반대배너와 함께 이런 글귀만 덩그러니 뜬다. “이번 검열의 여파로 잠시 문을 걸어 잠급니다. 청소년 보호인지 족쇄인지….” 비단 이 사이트뿐만이 아니다. 야후에서 ‘야오이’라는 검색어를 치면 뜨는 사이트는 11개. 이 중 3개 사이트가 이미 폐쇄한 상태고 나머지도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다. 야오이 작가 김현주(18)씨는 “이미 유명한 공개 (야오이)사이트는 폐쇄한 곳이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통신질서확립법으로 야오이와 팬픽 사이트의 존재자체가 위협받으면서 그만큼 반발도 거세다. 반발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홈페이지다. 9월2일, 이 사이트 게시판에서 검색어 ‘야오이’를 입력하니 170여개의 글이 뜬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쌓인 글들이다. ‘팬픽’을 입력하면 더 많은 글이 뜬다. 무려 280여개. ‘검열반대’를 외치는 10대들의 항의글로 도배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보통신부 게시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뿐만이 아니다. 진보넷 등 많은 사이트에도 이들이 쓴 글이 올라 있다. 심지어 진보넷 게시판에는 ‘인터넷 검열에는 반대하지만 진보넷이 팬픽보호 사이트가 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요지의 항의글이 올라 있을 정도다. 그만큼 팬픽과 야오이 관련 글이 많다는 방증이다. 10대들은 팬픽과 야오이가 ‘우리만의 문화’이며 ‘청소년도 판단력이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팬픽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거야. 한번이라도 팬픽을 읽어보고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줬으면….”(팬픽 추종자)

“팬픽도 엄연한 문학입니다. 아무리 정보통신부라도 우리의 창작권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초티렐라)

“청소년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도 우리가 본 것을 판단할 능력이 있습니다.”(수정나라)

단순한 개인적 항의를 넘어 검열반대 온라인 시위에 적극 참가를 권유하기도 한다. 팬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이런 움직임이 확인된다. 통신질서확립법 반대글을 꼼꼼히 퍼 놓고 ‘온라인 시위에 동참하자’는 호소를 덧붙인 글을 첫 화면에 올린 사이트가 많다. 가수 조성모의 팬이라는 안지영(16)양은 “주변 친구들 모두 열심히 검열반대 글을 올리고 온라인 시위에도 참여한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야오이 팬들이 정통부 게시판을 점거한 사이, 국정원 홈페이지를 곤혹스럽게 한 10대 소녀들이 있었다. 바로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학생들이다. 8월25일, 이 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던 박정훈(35) 교사가 민혁당사건으로 구속된 사실이 알려졌다. 학생들을 더욱 당황하게 한 것은 “박 교사가 학생들을 포섭하려 했다”는 검찰의 발표였다.

이에 학생들은 “선생님은 우리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치지 않았다. 선생님을 되찾도록 도와달라”는 호소문을 인터넷 여기저기에 올렸다. 유명 포털사이드 게시판은 물론 각 대학 홈페이지, 청와대 홈페이지까지 웬만한 사이트 치고 글을 올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부 학생들은 자기가 속한 메일링리스트를 통해 이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생각보다 반향은 컸다. 글을 읽은 사람들은 속속 이화여자외고 홈페이지로 몰려 들었다. 덕분에 이화여자외고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8월 마지막주 내내 하루 100건이 넘는 글이 폭주했다. 이화여자외고 3학년 이아무개씨는 인터넷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신문을 보니 선생님 기사가 너무 작게 났더라구요. 그래서 일단 많이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제일 빨리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인터넷이잖아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 글을 올렸죠.”

“네티즌 여러분, 선생님을 도와주세요”

9월2일 토요일, 10대 소녀들이 현실공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화여자외고 학생 일부는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 교사 구속 규탄집회’에 참석했고, ‘검열반대를 위한 네티즌 대회’가 열리던 신촌 현대투자신탁 앞에는 야오이 소녀들이 나타났다. 민중운동 단체 깃발 속에 묻힌 10대 소녀들. 아직은 어색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하지만 야오이 작가라고 밝힌 한 10대는 시위대 앞에서 “통신질서확립법 반대합니다!”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집회가 끝나자 “학원가야 된다. 다음 집회에도 꼭 참석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지는 야오이 소녀들을 보며 진보네트워크 장여경 정책실장은 말했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10대들의 표현 욕구는 무한히 확장됐습니다. 이를 기성세대의 잣대로 억누를 수는 없지요. 섣불리 통제하려 한다면 거센 반발을 가져오거나 검열을 내면화할 뿐입니다.”

신윤동욱 기자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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