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 수사, 구속영장실질심사, 방어권, 진술거부권, 기소, 공소유지, 선고… 피의자가 되는 순간부터 재판이 끝날 때까지 들어야 하는 ‘외계어’다. 몇 번씩 들어본 단어이긴 하지만 각 단계에서 정확히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헤아리는 것은 쉽지 않다.
익숙지 않은 용어가 주는 공포만이 문제가 아니다. 수사기관으로부터 “가족이 다 다치고 싶어요?” 같은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쉽게 무너진다. 잘 아는 변호사가 있거나 미리 변호인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체포나 압수수색은 예상치 못한 때 벼락처럼 내려친다. 게다가 일반 시민이 수사 과정에서부터 변호사의 도움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변호사 선임 비용이 부담되고 어떤 변호사를 찾아갈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대형 로펌 ‘에이스’ 변호사를 여럿 거느리고 기자들 앞에서 “검찰에서 소상히 밝히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대기업 오너 정도라면 모를까 시민들이 수사기관의 조사에 잘 대응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민변이 ‘자기변호노트’팀 꾸린 이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이 ‘자기변호노트’팀을 꾸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공익센터)는 2016년 여름부터 시민들이 수사기관의 조사 과정에서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왔다.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재심이 진행되면서 수사기관이 평범한 시민을 얼마나 쉽게 살인범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지 낱낱이 밝혀지던 때였다.
민변은 고민 끝에 문제점을 하나 찾아냈다. 피의자에게 메모하지 못하게 하는 수사기관의 관행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2011년 11월 검찰총장에게 피의자가 조사받는 중 메모할 수 있게 허용하라고 권고했다. 2010년 7월 수사 과정에서 메모를 금지당했다는 당시 40대 남성의 진정을 받아들인 것이다. 검찰은 권고 결정이 나기 전에 인권위에 “피의자가 메모를 이유로 조사를 방해할 수 있으며, 공범 관계에 있는 자 등의 증거인멸 또는 도주를 용이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내왔다. 권고 이후에는 “조사 도중 기억환기용으로 간략히 메모하는 것은 허용”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인권위 권고는 법적 강제성이 없는 ‘권고’일 뿐이다.
2013년에도 비슷한 진정이 인권위에 접수됐다.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한 진정인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메모 작성을 제지당하자 진정을 낸 것이다. 인권위는 2014년 3월 거듭 수사 중 메모를 허용하라고 검찰에 권고했지만 ‘수사 관행’은 바뀌지 않았다. 메모가 수사기관이 은밀하게 움직여야 범행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이른바 ‘수사의 밀행성’을 해친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메모 작성은 이미 피의자에게 자료를 보여주고 모든 질문을 한 뒤 이뤄진다. 공익센터는 메모로 인해 밀행성이 침해받지 않는데다, 밀행성보다 시민들의 인권과 방어권 보장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고 판단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선 변호사연합회를 중심으로 피해자가 경찰과 검찰 조사를 받기 전후 직접 수사 과정을 기록하는 ‘피의자노트’ 제도가 정착됐다. 피의자노트는 2003년 아키타 마사시 변호사가 오사카 변호사회에 제안한 뒤 이듬해인 2004년 일본 변호사연합회가 정식 도입한 제도다. 이 노트는 주요 수사 절차의 안내와 용어 설명, 부당하고 강압적인 수사가 있었는지를 묻는 문항 등으로 구성돼 있다.
수사기관 강압 밝히는 증거로 사용
피의자노트 시행이 10년을 넘자 일본 수사 관행에 변화가 생겼다. 아키타 변호사는 2016년 11월 공익센터와의 화상통화에서 “피의자노트 작성을 의식해 경찰 조사가 부드러워졌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런 일이 쌓여 조사 환경이 개선되거나 권리침해 사례가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키타 변호사는 또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가 부당하거나 조사가 잘못돼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피의자노트를 열심히 쓴다. 예를 들어 한 번만 때렸는데 세 번을 때렸다고 수사기관이 과장하거나, 고의로 저지른 일이 아닌데 고의로 몰고 가는 경우 등이다. 본인이 무죄라고 생각할 때도 피의자노트를 열심히 작성한다”고 말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피의자노트를 스스로 방어하는 ‘작은 무기’로 활용하는 셈이다. 실제 피의자노트는 일본에서 수사기관의 강압을 밝히는 증거로도 사용됐다. 은 2011년 9월 “2007년에는 오사카 지방재판소가 피의자노트의 신뢰성을 일부 인정해 (조사 과정에서) 경찰의 폭행이 있었다고 확인했고, 2009년에는 교토 지방재판소가 피의자노트의 기재 내용을 근거로 불법 수사를 인정한 바 있다”고 보도했다.
이후 공익센터는 한국형 피의자노트를 만들기 위해 자기변호노트팀을 별도로 꾸려 변호사 10여 명이 함께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자기변호노트 초안을 만들어 문구 조정 등을 하고 있다. 특히 수사 과정에서 방어권이 취약한 외국인 피의자를 위해 자기변호노트를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할 계획도 있다.
“기록이라도 해야 스스로 지킬 수 있다”
자기변호노트팀에서 활동 중인 송상교 민변 공익센터 소장은 과의 통화에서 “일본에서 피의자와 변호사가 스스로 수사 과정의 인권 보장 문제를 제기하고 캠페인을 벌여 피의자노트를 보편화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충분히 의미 있는 일로 한국에서 도입할 만한 사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사는 경찰이나 검찰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사실에서 진행되고 초기엔 변호사들이 참여하는 것도 쉽지 않다. 피의자가 심리적 위축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제대로 기억 못하는 상황이라면 기록이라도 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 가운데 하나는 검찰·경찰 개혁이다. “검경 개혁에서 누가 수사권, 기소권을 가질 것인지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시민들의 인권침해를 막을 것인지다. 수사기관은 피의자가 조사받는 중에 메모할 수 있게 하고 앞으로 나올 자기변호노트 사용을 적극 허용해야 한다.” 송상교 소장이 힘줘 말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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