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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단어는 ‘이주민’

브렉시트의 핵심 어젠다는 유럽연합이 아니라 이민 문제… 경제적 파국만 진단하며 국민 설득 실패한 영국 노동당과 보수당
등록 2016-07-07 16:33 수정 2020-05-03 04:28
지난 6월16일 나이절 패라지 영국독립당 대표가 영국으로 몰려드는 난민 이미지를 담은 대형 포스터 옆에 서 있다. 그는 브렉시트 캠페인 과정에서 영국 서민층의 잠재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REUTERS 연합뉴스

지난 6월16일 나이절 패라지 영국독립당 대표가 영국으로 몰려드는 난민 이미지를 담은 대형 포스터 옆에 서 있다. 그는 브렉시트 캠페인 과정에서 영국 서민층의 잠재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REUTERS 연합뉴스

“이주민들이 이제는 나가야지요.” 수다스럽게 날씨 이야기를 하던 금발의 여성 택시 기사에게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의 결과에 대해 물었다.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 답이 돌아왔다.

“저도 이주민인데요?” 이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가 잠겼다. 중년 백인 여성의 무심한 말에 낯선 한국인 승객을 향한 어떤 적개심도 묻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영국인들 머릿속에 나는 ‘외국인’일지언정 ‘이주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난 수년 동안 텔레비전 뉴스를 장식한 이주민이란 그리스와 헝가리, 독일의 접경 지역을 까맣게 채운 난민이거나, 언제부터인가 영국 건축 현장 곳곳에서 눈에 띄는 동유럽계 이민자였다.

그러니 케임브리지에 살면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장하준 교수나 영국인과 결혼해 런던에서 오래 살았던 마돈나는 영국 여성의 머릿속에선 이주민 범주에 들지 않을 것도 같았다. 이렇게 자기 멋대로 차별적인 반이민 정서가 브렉시트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변수였다.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은 모두 이 영국 여성의 머릿속 반이민 문제의 실마리를 풀지 못한 채 패잔병처럼 전전긍긍하고 있다. 왜일까.

일단 이주민의 대량 유입은 분명한 현상이다. 1997년 이후 영국으로 유입된 순이주민은 5배 이상 늘었다. 2014년 영국으로 유입한 인구는 64만 명으로, 영국을 떠난 인구 32만 명을 압도했다. 해마다 서울 강북구 정도의 인구가 들어오는 셈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주민 유입이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font></font>

문제는 대량 이민이 부르는 결과다. 경제적으로 영국에 득이라는 게 중론이다. 젊고 교육 수준이 높은 이민자는 세금을 더 많이 내는 대신, 연금이나 복지급여를 받는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2014년 런던대학 연구를 이 인용한 결과를 보면, 서유럽과 비유럽 국가 출신 이주민 가운데 대졸 이상 학력 소지자 비율은 영국인 평균(24%)의 2배가 넘고, 평균연령은 26~27살이다. 영국인 평균연령은 41살이다. 공사장 일자리를 앗아간다고 눈총을 받는 동유럽 이민자 가운데 대졸 이상 학력 소지자 비율은 25%로 영국인 평균보다 조금 높다. 영국 입장에서 자국의 교육비가 따로 들지 않은 고급 인력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좀더 미묘한 문제는 이주민 유입이 영국 노동시장, 특히 저소득층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 대목에선 대략 세 가지 주장이 있다. 나름 근거도 있다.

첫째, 이주민이 가져오는 긍정적 경제효과 덕분에 영국인을 위한 값싼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주장이다. 영국 통계청은 2013년 이후 유럽연합 출신 노동자는 70만 명이 늘었고, 동시에 영국 원주민 고용인은 그보다 많은 100만 명이 늘었다고 밝혔다. 일자리를 놓고 원주민과 이주민이 제로섬게임을 벌이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둘째, 애당초 이주민은 영국 원주민이 맡지 않던 ‘3D’ 업종에 종사한다는 주장이다. 브렉시트를 앞두고 건설업과 농업 관련 업체들이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면 근거도 있어 보인다.

셋째, 값싼 노동력을 가진 이주민이 영국의 저임 노동자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주장이다. 직관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많지 않다. 다만 값싼 노동력이 대거 유입해 저임 노동자가 받는 실질임금이 떨어진다는 주장은 있다. 기업 입장에선 반색할 일이지만, 낮은 임금을 받는 영국 원주민에겐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세 주장 중 어느 것이 일방적으로 맞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세 요소가 현실에서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대규모 이민이 영국 경제 전반에 실질적으로 가져오는 혜택에도 불구하고 저임 노동자가 상대적으로 더 박탈감을 느낄 여지는 있어 보인다.

다소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인 경제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반이민 정서는 계속 번지고 있다. 영국에서 해마다 실시되는 ‘사회태도조사’를 이 2014년 인용해 보도한 내용을 보면, 영국인 가운데 ‘자신에게 인종적 편견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2000년 25%에서 2012∼2013년 29%로 늘어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일수록 </font></font>

대규모 이민자 유입과 함께 반이민 정서를 달구는 또 다른 사건도 연달아 있었다. 중동 지역 이슬람국가(IS)의 발흥은 영국 사회에서 반이슬람 정서를 확산시켰다. 전체 인구의 약 5%가 무슬림인 영국 사회에서 체감하는 IS의 위협은 결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게다가 시리아 내전의 결과로 유럽으로 몰려드는 난민 행렬도 영국인들의 반이민 정서에 기름을 붓고 있다.

특히 영국으로 넘어오기 위해 지금도 프랑스 칼레 난민촌에서 대기하는 난민 4천여 명은 영국인에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북아프리카와 중동 등에서 온 이들은 틈만 나면 국경 경비를 피해 철조망을 넘어 영국행 트럭에 몸을 실었다. 국경 경비를 맡는 공권력과 충돌하는 이들의 모습은 영국 미디어에 반복적으로 노출됐다. 위험한 밀입국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0명을 훌쩍 넘었다.

물론 난민들이 영국까지 이르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거나, 북아프리카·중동 출신의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는 영국인이라면, 칼레의 난민이나 무슬림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더 따뜻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많은 영국인들 입장에서 난민은 대문 앞을 서성이는 불편하고 두려운 이방인일 수 있다. 이런 불편함과 두려움은 영국 사회의 반이민 정서를 지피는 땔감이 된다.

영국에서 반이민 정서는 지역별로 편차가 크다. 영국 ‘사회태도조사’를 꼼꼼히 보면, 교육 수준이 높고 이민자와 접촉면이 넓은 런던과 그렇지 않은 지방의 온도차가 많이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구 300만 명의 런던(inner London)에서 인종적 편견이 있다고 인정한 비율은 2000년대 이후 무려 17%포인트 떨어졌고, 런던 외곽 지역(outer London)에서도 1%포인트 줄었다. 인종적 편견이 가장 크게 늘어난 곳은 잉글랜드의 최북단 노스이스트 지역으로 17%포인트 늘었다.

런던은 영국에서 이주민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36.9%)이고, 노스이스트는 북아일랜드에 이어 이주민 비율이 가장 낮은 지역이다(1.6%). 다른 곳의 결과를 봐도 외국인이 드문 지역에 사는 주민이 오히려 외지인에 대해 경계심이 높은 경향이 관찰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민 문제 두고 계층 간 거리감</font></font>
6월28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에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한 시민이 유럽연합기를 몸에 두른 채 트래펄가 광장을 지나고 있다. AFP 연합뉴스

6월28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에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한 시민이 유럽연합기를 몸에 두른 채 트래펄가 광장을 지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같은 역설적인 결과는 브렉시트를 둘러싼 투표 경향과도 유사하게 연결된다. 브렉시트 역시 학력이 낮을수록, 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일수록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민이라는 급격한 사회 변화에 대해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은 소외 지역 계층이 느끼는 불안감과 두려움은 통계를 통해 이렇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정치 엘리트들이 소외 계층의 정서적 박탈감과 불안감을 어떻게 해소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노동당이나 보수당 모두 이 지점에서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두 정당 모두 이민 문제에서 각자의 딜레마에 꽁꽁 묶여 있기 때문이다. 노동당의 경우, 이주노동자 유입에 맞서 국내 노동계층의 이해를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과 국제적 노동계급 연대라는 명분 앞에 지난 수십 년 동안 갈팡질팡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특히 이 문제에 골머리를 썩였다. 2001년 총선 승리 직후 그는 “다음 선거에서 내가 진다면 이민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고 은 2015년 보도했다. 당시 블레어 정부에서 이주민 유입이 영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분석 결과를 보고 “환상적”이라고 반색한 이도 블레어였다. 말하자면 ‘경제적 실익’과 ‘윤리적 명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었다.

2004년 동유럽 국가들이 대거 유럽연합에 가입했을 때, 다른 유럽연합 국가에 견줘서도 영국 노동당 정부는 노동시장을 활짝 열어놓았다. 훗날 영국 경제학자 폴 오메로드가 “영국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이라고 일컬은 결정이다. 전통적 지지 계층이 노동당에서 서서히 이탈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 노동당은 지지층의 불안감이 어느 정도 무지에 근거한다고 보고 설득을 통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지만 실제 허물어지는 지지 기반을 보면서 다시 반이민 카드를 내미는 등 갈팡질팡했다.

고든 브라운 전 총리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2007년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영국의 일자리는 영국인에게”라는 반이민적 구호를 내놓았다가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대표조차 차별을 금지하는 유럽연합 규정에 반하는 내용이라고 비판할 지경이었다.

3년 뒤 2010년 총선 과정에서 브라운 전 총리는 한 번 더 사고를 치는데, 길거리 선거운동에서 이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질문한 60대 여성 노동당 지지자와 대화한 뒤, 자신의 차로 돌아와서는 그 여성에 대해 “편협한 여자”라고 험담했다. 그가 실수로 방송사 마이크를 옷에 달고 있어 사적인 대화가 녹음돼 방송을 타는 재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일반 서민들이 품은 이민에 대한 불안감을 교감하지 못한 노동당 엘리트 그룹의 한계를 보여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민 감소 없을 것이라는 영국 보수당의 실토</font></font>

이민 문제의 딜레마에 빠져서 오래 허우적거린 건 보수당도 마찬가지였다. 보수당은 전통적 지지 세력인 자본의 이해와 반이민 정서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더 싼 노동력을 원하는 자본의 눈치를 보자니 노동시장을 더 활짝 열어야 했지만, 날로 퍼지는 극우 정서 때문에 머뭇거렸다.

일부 보수당 의원들은 빠르게 지지 기반을 넓히는 영국독립당을 기웃거렸다. 2014년 현역 의원인 마크 레클리스가 보수당을 전격 탈당하고 영국독립당에 들어갔다. 지난 6월23일 국민투표로 동요하는 의원들의 이탈을 막으려는 캐머런 총리의 승부수였다. 캐머런 총리는 반이민 정서를 고려해 2010년 총선 때 순이주민 수를 해마다 10만 명 이하로 막겠다고 공언했는데, 단 한 번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015년 순이주민은 3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각자의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두 제도권 정당은 영국인들, 특히 저소득층이 이민 문제에 품은 불안감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노동계층을 설득하려 했던 노동당이나 거짓 공약을 내세운 보수당 모두 영국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두 정당 모두 국민투표 과정에서 브렉시트가 불러올 경제적 파국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영국인이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비극적 사실은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투표 결과는 정작 이민 문제와 큰 상관이 없다는 거였다. 브렉시트 결과가 발표된 뒤, 정작 브렉시트에 찬성한 인사들이 이민 감소 문제에 발을 빼기 시작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이 대목에서 등장한 게 영국독립당이었다. 이민 동결 같은 과격한 공약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단순무식했지만, 노동계층이 오래 가려워했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줬다.

돌이켜보면, 지난 국민투표의 핵심 어젠다는 유럽연합이 아니라 이민 문제였다. 유럽연합은 애꿎게도 이민 문제의 총알받이가 돼버린 셈이다. 가 지난 1월 영국독립당의 반이민 정책은 종종 반유럽연합이라는 탈을 쓰고 등장한다고 비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극적 사실은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투표 결과는 정작 이민 문제와 큰 상관이 없다는 거였다. 브렉시트 결과가 발표된 뒤, 정작 브렉시트에 찬성한 인사들이 이민 감소 문제에 발을 빼기 시작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영국 보수당 나이절 에번스 의원은 <bbc>에 출연해 “다소 오해가 있었다”며 이민은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실토했다.
이민 문제는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더라도 별도로 다뤄야 할 사안의 성격이 강하다. 한 사례로 유럽연합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국경 너머 국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해주는 노르웨이가 있다. 영국 싱크탱크인 공공정책연구소의 보고서는 유럽연합 탈퇴가 영국의 이민 정책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면서 “(브렉시트라는) 중요한 결정이 이번주에 이뤄졌지만, 이민 문제에 대해서는 더 중대한 결정이 아직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가장 임박한 현안은 현재 영국에 머무는 유럽연합 회원국 출신 인구 300만 명의 법적 처우 문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 모두 비자를 새로 발급받아야 하는 ‘외국인’이 될 수도 있다. 또 이들의 권리는 유럽연합 회원국에서 거주하는 영국인 120만 명의 처우와 직결된 문제다. 브렉시트를 지지한 그룹은 캠페인 기간 동안 유럽연합 출신 300만 명이 영국에 머물 권리를 계속 보장해주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그에 따른 기술적 문제 역시 산적해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문제는 이민이야, 바보야 </font></font>
2015년 여론조사기관 입소스모리가 영국인 유권자에게 가장 걱정되는 현안을 물었을 때, 25% 넘은 응답자가 이민 문제를 들었다. 그다음 중요한 이슈로 경제와 보건 문제를 꼽은 유권자가 각각 10%를 조금씩 넘었다. 유럽연합 탈퇴를 이민 문제로 접근한 정당은 영국독립당이 유일했다. 보수당과 노동당은 경제 문제로 국민을 설득하려 했다. 국민투표 결과를 분석한 영국 공공정책연구소 보고서의 첫 문장은, 심각하게 헛다리를 짚은 제도 정치권에 던지는 야유다. “문제는 이민이야, 바보야.”
버밍엄(영국)=김기태 버밍엄대 박사과정(사회정책학)·전 기자 limpid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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