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에 관심을 갖는 아이들은 크게 두 부류예요. (부모님의 영향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애들이 있는가 하면, ‘일간베스트’ 같은 극우 사이트에서 본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애들이 있고요. 생각이 다른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다 같이 토론할 수 없으니 그 상태로 계속 있는 거죠.”(전직 고등학교 교사)
정치는 갈등을 공론의 장에서 풀어내는 과정이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폭력적으로 싸울 수 없으니, 사회제도를 통해 차이를 좁힌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는 갈등을 제도적으로 풀어낼 통로라기보다는 전쟁터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치에 실망한 시민들은 그들 나름대로 타인을 향해 혐오 발언을 쏟아내거나, 사제 폭탄을 던지는 등 극단적 방법으로 의견을 표출한다. 이 만난 한 전직 교사는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말한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정치교육은 ‘사회’ ‘생활과 윤리’ 등 과목의 일부 단원과 ‘법과 정치’ 과목에서만 이뤄지고 있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고교 교육과정에 ‘정치’ 과목이 독립적으로 만들어졌으나, 2009 교육과정에서 ‘정치’ 과목과 ‘법과 사회’ 과목이 ‘법과 정치’ 과목으로 통합됐다. 학습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선택과목을 축소하면서 정치 관련 내용의 비중도 줄어든 것이다. 모든 학생이 선택과목인 ‘법과 정치’ 과목을 배우는 것도 아니다. 2015학년도 대입수학능력시험을 치른 학생 가운데 ‘법과 정치’ 과목을 선택한 학생은 약 5.2%(약 59만 명 중 3만1056명)였다. 한 교사는 “이과 학생의 경우 1학년 ‘사회’ 과목을 끝으로 평생 정치나 법에 대해 배울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법과 정치’ 과목을 듣는 학생들은 정치의 효용을 실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 교육이 입시 위주로 꽉 짜인 탓이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의 ‘법과 정치’ 교사 장아무개(50)씨는 “나도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당장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수능 점수이다보니 진도를 나가기 바쁘다”고 말한다. 그는 “교육이 아이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다른 국가들은 일찍이 정치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높아진 독일에선 1952년 연방정치교육원을 세워 국민의 정치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또 초·중등 전 교육과정에 ‘정치교육’ 과목을 만들었다. 프랑스는 1998년에 ‘시민교육’을 중학교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영국도 2002년부터 ‘시민교육’이 중등학교 필수과목이다.
차이는 교과서 내용에서 크게 드러난다. 의 취재 결과 한국 ‘법과 정치’ 교과서의 상당 부분은 추상적인 개념 설명으로 채워져 있었다. 정당의 역할과 기능을 기술하면서도 한국 정당의 종류와 역사, 각 정당의 이념과 의석수 등은 설명하지 않는다. 반면 프랑스, 독일 등의 교과서는 신문 기사와 사진 등 자료로 가득하다. 프랑스 중학교 4학년 ‘시민교육’ 교과서는, 정치 참여와 정당에 관한 내용을 다룬 단원에서 프랑스 각 정당의 역사와 이념, 강령, 의석 현황을 자세히 소개한다. 노동을 다루는 단원도 프랑스 주요 노조의 이름과 역사, 가입자 수, 성향을 보여준다. 독일 중학교 ‘실제 정치2’ 교과서의 선거 단원은 ‘일주일에 수업은 하루만당’ ‘동물보호자당’ 등 가상의 정당을 만들어보는 내용이다. 전당대회를 열어 강령을 정하고 후보자를 공천해 다른 정당과 선거전을 벌여 선거를 치르는 활동을 수업시간에 경험할 수 있다. 선거제도 등 개념 설명은 각 단원이 끝날 때 간단히 다루고 넘어간다.
경기도 의왕 모락고 교사 김원태(57)씨는 “프랑스, 독일 등의 교과서는 우리처럼 누군가 ‘사회는 이런 거야’ 하고 정해주지 않는다. 학생들이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스스로 개념을 구성하게 한다”고 말했다. 4년 전까지 고등학교에서 정치를 가르친 박아무개(38)씨도 “학생들에게 ‘이익집단이라는 게 있다’고만 말하는 것과, 자동차정비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네가 가입해 활동할 수 있는 이익집단이 뭘까, 한번 조사해봐’라고 하는 건 다르다”고 말했다.
정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적절치 않은 서술도 국내 교과서 여러 대목에서 발견됐다. 특히 선거제도나 정당체제의 장단점을 기술하며 ‘(국가적) 통합에 도움이 되는지’와 ‘(사회 갈등 비용을 포함한) 비용을 줄일 수 있는지’ 두 가지를 주된 기준으로 삼은 게 눈에 띄었다.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수반하며, 이를 제도적으로 해소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는 걸 간과한 대목이 보였다. 무조건적 통합을 강조한 권위주의 시대의 그림자가 교과서에 남아 있는 것이다.
[%%IMAGE2%%]‘공익’의 의미에 대한 설명 없이 “정당은 정치권력 획득이라는 목표를 공개적으로 내세워 공익을 도모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얻는다”고 적어,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정당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한 부분도 있었다. 이익집단에 대해서도 “각 집단의 특수 이익을 달성하려는 이익집단의 활동이 지나치면 공익과 충돌할 수 있다”고 썼다(천재교육 교과서 76쪽).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민주주의에서 ‘다수’란 단일한 다수가 아닌 ‘소수들의 총합’이다. 정당과 이익집단이 추구하는 부분 이익을 ‘집단이기주의’로 몰고, ‘국가 전체의 이익’(공익)만 말하기 시작하면 다양한 계층적 차이를 국가정책에 반영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거대 양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재의 정당체제를 옹호하는 서술도 있었다. 양당제 국가에서는 “사실상 두 개의 주요 정당이 정국을 주도하기 때문에 정국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된다고 설명한 반면, 다당제 국가에서는 “어느 한 정당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면 군소정당이 난립하여 정국이 불안정해질 우려가 있으며, 정치적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60쪽). 최태욱 한림대 교수는 “다당제 국가들 중 정국 불안으로 문제를 겪은 국가는 거의 없다. 오히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국가의 정책 기조가 급격하게 바뀌는 게 양당제의 단점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교과서를 통해 정치를 배운 학생들이 기존 거대 양당 중심의 정당체제에 문제의식을 갖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독일 “논쟁적 학문은 수업도 논쟁적으로”
정당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정당의 공천권 행사를 부정적으로 본 대목도 있었다. 교과서는 비례대표제에 대해 “우리나라와 같이 비례대표 후보를 유권자가 아닌 정당이 정하게 되면, 국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뿐 아니라 후보자 선정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67쪽). 이에 대해 최태욱 교수는 “비례대표제의 목적은 대의민주주의의 핵심 주체인 정당에 (선택을) 맡기는 것이다. 각 정당의 이념과 정책을 가장 잘 구현하는 후보자들을 각 정당이 알아서 뽑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정치학계가 중요한 연구 주제로 여기는 경제정책, 경제발전, 국가-기업 관계, 노동, 지역통합 등의 주제를 교과서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독일이 1976년 보이텔스바흐협약을 통해 “학문과 정치의 영역에서 논쟁적인 것은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과 대조적이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전후 독일에선 ‘전체주의는 안 된다’는 정치권의 초당적 합의가 있었다. 반면 한국에선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이 갈등을 회피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교육에도 이 차이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한국에도 변화를 위한 움직임은 있다. 경기도교육청은 일부 현직 교사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란 이름의 ‘인정 교과서’를 개발·발행했다. 이 교과서는 양심적 병역거부, 원자력발전, 노동시장 유연화 등 논쟁적 현안에 대한 찬반 입장을 보여주는 자료로 이뤄져 있다. 경기도의 일부 학교는 별도로 시간을 편성하거나 사회, 도덕, 생활과 윤리, 한국사, 법과 정치 등의 수업 중간에 이 교과서를 활용하고 있다.
민주시민 교육이 지금보다 체계적으로 이뤄지게 하기 위한 법안과 조례의 필요성은 1990년대 후반부터 대두됐다. 하지만 관련 법안이 국회에 발의돼도 정치권의 무관심 속에 매번 자동 폐기됐다. 이언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1월23일 민주시민교육지원법안을 발의했다. 학생들뿐 아니라 전 연령대의 국민이 민주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민주시민교육 독립기구를 만드는 게 법안의 주요 내용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민주시민 교육에 관한 조례’를 공포했고, 경기도 역시 조례 공포를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여전히 과제는 남아 있다. 정치교육에서 ‘인성 교육’을 중시하는 보수 진영과 ‘시민성 교육’을 강조하는 진보 진영 사이의 의견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다. 채진원 교수는 둘 사이의 균형을 강조한다. 그는 “세월호 사건만 보더라도 원인을 사회구조에서 찾을 수도 있고, (선장 등의) 인간성에서 찾을 수도 있다. 결국 정치교육은 (인성 교육과 시민성 교육이) 같이 다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 참고 문헌‘주요 외국 학교시민교육 내용연구- 미국·영국·프랑스·독일·스웨덴을 중심으로’, 김원태 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고등학교 정치교육의 지식과 교육 내용의 관계에 관한 연구- 한국정치학회보와 정치교과서 비교를 중심으로’, 정혜온, 인하대학교, 2014
‘민주시민교육 활성화 방안 연구’, 강영혜 외, 한국교육개발원, 2011
정인선 인턴기자 insun9782@naver.com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2차 ‘내란 특검법’ 국회 통과…최상목, 이번에도 거부권 행사할까
나경원, 트럼프 취임식 가서 ‘극우 유튜버 음모론’ 퍼뜨리나
[단독] 공수처, 윤석열 영장에 ‘확신범’ 지칭…“재범 위험 있다”
[단독] 윤석열 구속영장에 텔레그램·스마트폰 ‘증거인멸 우려’ 명시
헌재 “포고령 속 반국가활동” 뜻 묻자…윤석열 변호인단 대답 못 해
경호처 ‘윤석열, 하늘이 보낸 대통령’ 원곡자 “정말 당혹”
[속보] 공수처, 윤석열 구속영장 청구…현직 대통령 최초
박정훈 무죄, 경호처에 ‘징표’ 돼준 듯…“부당명령 복종 안 돼”
최대 개신교 단체, 내란 첫 언급…“헌재, 국민 불안 않게 잘 결정해달라”
권성동 “애초 내란 특검법은 필요없다”…최상목 대행에 거부권 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