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겨울이었다. 2005년 11월, 쌀을 지키기 위해 농민들이 생명을 잃었다. 그해, 당시 마흔하나인 여성 농민 고 오추옥씨가 ‘쌀 개방 안 돼’를 유서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어 당시 예순여덟인 고 홍덕표 농민과 마흔여섯의 고 전용철 농민이 쌀 수입 허가제 폐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FTA 본론 들어가기 전 ‘4대 선결조건’바로 그해 12월, 당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농민의 격렬한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내 쌀 소비량의 약 12%(2014년 기준)를 외국 쌀로 채우는 내용의 쌀 조약을 통과시켰다. 한국은 이 조약을 세계무역기구(WTO) 차원에서 맺고 쌀 수입 허가제를 2014년까지 연장했다.
그런데 뒤늦게 밝혀졌지만, 당시 정부는 미국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전대미문의 조약 협상을 개시하기 위해 이른바 ‘4대 선결조건’이라는 것을 미국에 해결해주고 있었다. 우스꽝스럽게도 미국과 협상의 본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것을 시작하기 위한 조건으로 미국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고 있었던 셈이다.
2005년 겨울 농민들의 죽음은 이 선결조건 협의 과정에서 발생했다. 미국이 바로 쌀 조약의 당사국이었다. 조약에는 해마다 미국 쌀 5만t을 수입한다는 특혜가 담겨 있었다. 미국은 지켜보고 있었다. 한국 정부가 농민의 반대를 진압하고 쌀 조약을 통과시킬 능력이 있는지 보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시험대 위에 놓여 있었다. 만일 쌀 조약을 통과시키지 못한다면 FTA를 맺자고 미국에 제안한 말을 다시 입속으로 집어넣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미국에 FTA를 체결하자고 말을 꺼낸 이상 아무리 농민이 격렬하게 반대하더라도 FTA를 통과시킬 능력이 있다는 걸 미국에 보여줘야만 했다. 농민의 죽음은 이런 구조에서 비롯됐다.
나는 몰랐다. 그해 겨울에 슬퍼하고 분노했을 뿐, 정부가 미국과 FTA 협상 개시를 위해 공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참여정부라는 이름의 정부가 왜 이다지도 폭력적인가 분노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도대체 이 배경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커다란 의문을 가졌다. 그러면서 막연하게 미국과 FTA을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에 갓 생긴 라는 인터넷 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쌀 조약 강행 처리는 미국과 FTA를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 정부 대신 누구도 할 수 없는 전면 폐지왜 지금 와서 9년 전의 일을 이야기하는가? 난 두렵다. 2005년의 비극이 다시 나타날까 두렵다. 왜 그런가? 박근혜 정부는 쌀 조약을 빌미로 2014년 말까지 쌀 수입 허가제를 전면 폐지하려고 한다. 동시에 지금 한국은 미국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을 요청하고 있다. 두렵게도 이 둘의 관계는 2005년 겨울의 쌀 조약과 한-미 FTA의 관계와 똑같다.
박근혜 정부는 2005년의 노무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시험대에 올라 있다. 농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TPP 가입을 한국에서 관철할 능력이 있음을 미국에 보여줘야 한다. 2014년에 쌀 수입 허가제를 폐지하면서 미국의 이익이 손상되지 않도록 해줘야 하는 것이다. (정부나 WTO가 사용하는 ‘쌀 관세화’는 미국의 관점에서 만든 용어다. 이 글에서는 현행 양곡관리법의 쌀 수입 허가제를 폐지해 누구나 쌀을 제한 없이 수입하게 하는, ‘쌀 수입 허가제 폐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박근혜 정부는 오는 6월까지 쌀 수입 허가제 폐지에 대한 의견을 수렴해서 결론을 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만일 쌀 수입 허가제를 폐지할 경우, 외국 쌀에 관세율을 400%로 매길지, 500%로 매길지의 핵심적 내용에 대해선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쌀농사를 지킬 것인지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해방 이후 최초로 쌀 수입 허가제를 전면 폐지하려는 정부에 대책이 있는지 함께 묻자. 정부는 쌀 관세율을 얼마로 정할 것이며, 이 관세율을 계속 유지할 방안이 있는가? 만일 정부의 예상과 달리, 환율이 급격히 하락(원화 가치 상승)해 외국 쌀의 수입가가 낮아질 경우 정부의 대책은 무엇인가? 쌀 수입 증가로 국내 쌀값이 폭락할 경우 어떻게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를 할 것인가? 2004년 쌀 협정 때 정부가 대책으로 세운 ‘쌀 산업 대책’은 실제 성과를 냈는가? 제한 없이 쌀이 수입돼 국내 벼농사가 무너질 위험에 대해 정부는 어떠한 근본적인 대책을 가지고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정부가 자신 있는 대책과 구상을 내놓지 못한다면, 정부는 쌀 수입 허가제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국제통상법으로도 가능하다. 아무리 다른 나라가 WTO에 제소한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가 쌀 수입 허가제 전면 폐지를 한국에서 한국 정부 대신 추진할 수는 없다. 그 나라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피해를 본 부분만큼만 한국의 공산품에 대해 관세를 올리는 것이다(이른바 보복 조치).
농민들과 먼저 대화하라하지만 쌀 문제에 대해선 어떤 나라도 쉽게 자신이 본 피해를 구체적으로 주장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일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쌀 수입 허가제 폐지의 조건으로 높은 관세율을 내건다면 수입량이 추가로 더 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은 소비량의 12%를 계속 수입하고 있다.
지금의 국제법 질서에서 어떤 나라도 자국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국제기구나 다른 나라에 맡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부는 미국을 상대로 쌀과 TPP를 사전 협의할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 특히 농민들과 먼저 대화해야 한다. 정부의 계획과 대책이 무엇인지 내부 협상을 먼저 진행해야 한다. 정부는 침묵하지 말고 자신의 계획과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덧붙여 만일 내가 농민단체에 조언할 수 있다면, 결론을 정해놓고 이를 정부에 관철하려는 관행을 다시 생각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는 내부 협상이 잘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정부가 쌀 수입 허가제 전면 폐지를 하더라도 소농의 쌀농사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책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안을 지역의 쌀농가들에 전달하고 의견을 수렴할 방법을 농민단체는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전제는 정부가 한국의 소농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의 쌀 수입 구조를 외국이 요구할 경우 쌀 수입 허가제를 폐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갖는 것이다. 지금 당장 정부는 말해야 한다. 농민과 협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2005년 겨울의 비극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송기호 변호사·민변 국제통상위원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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