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속도로 달리던 기차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복면 쓴 도끼부대와 마주한 채 긴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영화 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전국철도노동조합(철도노조) 파업 사태는 브레이크를 잃은 기차처럼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검은 보호대를 찬 경찰은 철도노조 집행부를 체포하겠다며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에 거침없이 들이닥쳤다. 뿔뿔이 흩어진 철도노조 집행부는 조계사·민주당사로 향했다. 이 참담한 갈등 앞에 종교계가 나섰지만, 정부는 노조 진압의 도끼를 내려놓지 않았다. 2013년 12월28일 서울광장에서는 민주노총의 총파업 결의대회가 열리면서 터널 속 어둠을 닮은 철도노조 파업 정국의 속도가 높아지고 있다.
대화 분위기에 찬물 끼얹은 정부‘최후통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2월27일 오전 9시, 최연혜 코레일 사장은 까칠한 얼굴로 서울 중구 봉래동 코레일 사옥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 오후 4시부터 무려 16시간 동안 이어진 노사 실무교섭 회의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뒤였다. “마지막 최후통첩을 내립니다. 오늘 밤 12시까지 복귀해주십시오. 이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직원에 대해서는 복귀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파업을 풀지 않는다면 철도노조 조합원들의 정직·해임·파면 등을 진행하겠다는 경고였다. 그는 실무교섭이 결렬된 이유로 “코레일에서는 파업을 철회할 경우 ‘수서 KTX 법인의 공공성 확보와 철도산업 발전을 위한 노·사·민·정이 참여하는 사회적 논의기구를 구성한다’라는 진전된 대안을 제시했지만, 철도노조는 ‘수서 KTX 법인 면허 발급부터 중단하라’는 기존의 요구를 되풀이하면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 사장의 기자회견 직후, 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이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12월22일 경찰이 민주노총 사무실에 진입했을 때 모습을 감춘 지 닷새 만에 공식 석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정부가 수서발 KTX 법인 면허 발급을 중단하고 철도 발전 방안에 대해 사회적 논의에 나서겠다면 우리도 파업을 중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철도노조는 “노조는 면허 발급 중단 후 노·사·민·정이 참여하는 사회적 논의기구를 구성해 논의하자고 제시했지만, 사 측은 사회적 논의기구 구성은 동의하면서도 사회적 논의의 전제가 될 수밖에 없는 면허 발급 중단은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을 되풀이했다”고 설명했다. 양쪽 모두 논의의 평행선을 굽히지 못한 것이다. 정부는 이날 노사 협의 결렬의 쐐기를 박았다. 국토교통부는 이날 저녁 수서 KTX의 면허 발급을 강행했다.
‘본보기’ 삼아 깨뜨리겠다?철도노조 파업 갈등이 극단적인 대립으로 이어진 계기는, 철도 파업 14일째인 12월22일 경찰이 무리하게 철도노조 집행부의 체포에 나서면서부터다. 박근혜 대통령이 12월16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철도 파업은 국민경제에 피해 주는 명분 없는 일”이라고 언급한 뒤, 경찰은 철도노조 집행부 10명의 체포영장을 발부받았다. 경찰은 철도노조 집행부의 체포 작전을 위해 민주노총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을 5500여 명의 병력으로 에워쌌다. 일요일 아침부터 TV 뉴스로 생중계된 유례없는 ‘체포작전’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경찰은 언론사 현관을 부수고 강제 진입에 저항하는 민주노총 간부와 노조원 138명을 연행했다. 청와대에도 보고된 이날 경찰의 작전은 정부의 노동계를 향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곧바로 민주노총은 비상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실질적인 행동에 돌입하겠다”며 12월28일 조합원들이 대규모로 참여하는 총파업 결의대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노동계와의 전면전’으로 비화하고 있는 정국에 ‘강경책’을 선택했다. 철도노조 파업이 박근혜 정부가 취하는 노동문제 해법의 ‘본보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발언 수위가 높은 현오석 기획재정부 장관(경제부총리)의 12월26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의 대국민 담화문을 보자. “(코레일은) 한번 입사하면 평생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 직원 자녀에게 고용이 세습되기도 했다. ‘신의 직장이고, 철밥통’이라는 국민들의 비난이 과장이 아닌 셈이다. 반면에 잦은 고장과 운행 지연으로 국민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불안감을 심어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철도노조 사태의 파국은 종교계도 막지 못했다. 성탄절 저녁, 박태만 철도노조 수석부위원장 등 집행부 일부가 서울 안국동 조계사를 찾아 종교계에 문제 해결을 요구하면서 사태는 급물살을 타는 듯했다. 철도노조는 “조계종에서 현재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는 철도노조의 파업과 대화를 무시한 정부의 일방적 탄압,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이 하루빨리 해결될 수 있도록 대승적 차원에서 중재 등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밝혔다. 조계종 화쟁위원회도 이에 화답하고 곧바로 노사 중재의 자리를 마련했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도 12월27일 오후 회의를 열고 노·사·정 협상을 중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누구를 위한 ‘원칙’인가일주일 동안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친 철도노조 파업 갈등은 12월28일 총파업을 거치며 ‘대정부 투쟁’으로 번질 가능성도 생겼다. 노동계뿐만 아니라 시민층에서도 정부의 대화 의지 부족과 불통 정국에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 민주노총의 총파업 과정에서 ‘안녕들 하십니까’ 활동에 참여하는 일반인들과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동참 의사를 밝힌 점을 보면 그렇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이런 호응은) 한국 사회가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거나 파업에 대해 존중하는 정서가 달라졌다기보다는, 반박근혜 정서나 민영화에 반대하는 철도노조의 주장에 대한 호응이 높아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12월28일 총파업 이후 정국이 1996년 말의 이른바 ‘노동법 날치기’ 개정 뒤 벌어진 총파업 때와 비슷하다는 분석도 있다. 김유선 노동사회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경찰의 민주노총 사무실 진입을 두고 1979년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강제 진압에 빗대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1996년 총파업 사태와 오버랩된다. 당시에도 총파업이 가능하겠냐는 회의감이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 수요파업 형태로 진행하면서 정부를 압박한 바 있다. 현재 상황은 파업을 통해 생산에 영향을 준다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이므로,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표출이 있으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위력이 있을 것으로 본다.”
‘역대 최장기’라는 기록을 쓰고 있는 철도노조 파업은 이제 2막으로 향하고 있다. 어쩌면 정부는 철도노조뿐만 아니라 이들의 파업을 대하는 정부의 ‘원칙’에 불편함을 느끼는 시민들과도 마주해야 할지 모른다. 정부가 ‘철도 파업 이후’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