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포고 없는 전쟁시대… 세계 곳곳 분쟁지역마다 전면전보다 비정규 테러가 활개
“21세기형 테러리즘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리즘을 보는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분쟁문제 전문가인 한국국방연구원 이근수 박사는 “이번 사건은 테러리즘의 수단으로 사용된 폭력의 양상이나 강도, 피해자 규모 등에서 기존 테러리즘과는 확연히 구별된다”고 분석했다.
먼저 △항공기 납치 △공중 폭파 △항공시설과 이용객 공격 가운데 하나를 택했던 항공테러의 전통적 유형을 벗어나 ‘납치 뒤 비행기를 이용한 시설물 폭파’라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이 충격적이다. 이른바 ‘민간항공기를 이용한 가미카제식 항공테러’의 가능성을 현실화한 것이다.
공포의 균형, 전쟁환경의 변화
5천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사망자 규모 역시 기존의 잣대를 벗어난다. 수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무력분쟁은 보통 국지전급 전투로 분류된다. 대대와 연대급 규모의 전투원이 참여하고 장거리포 미사일이 사용되는 게릴라전쟁 이상에서 생겨나는 피해 규모이다. 치안 수준의 범죄행위로 분류했던 20, 30년 전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이 때문에 이번 사건이 ‘핵전쟁→재래식 전면전→제한된 재래식 전면전→게릴라전쟁→테러리즘’의 순으로 매겨졌던 무력충돌 분쟁의 강도를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전세계를 일시적 혼란에 몰아넣는 등 이번 테러리즘이 정규전에 버금가는 효과를 가져온 점을 들어 “정규전의 보조적인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던 테러리즘의 기본 위상에도 변화가 올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저강도 분쟁’(low intensity conflict)이라는 개념보다는 ‘선전포고 없는 전쟁’(폴 윌킨스)이라는 식의 좀더 호전적인 개념 규정이 보편화될 수도 있다. 바야흐로 새로운 테러리즘의 시대가 열리는 징후인지도 모른다.
새 테러리즘이 어떤 모습을 할지는 쉽게 상상할 수 없지만, 그 방향이 ‘정치목적 달성의 도구’를 본질로 하는 테러리즘의 기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미국의 군사적 대응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미국이 여전히 제3세계 국가들, 특히 이슬람권의 정치적 불만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테러리즘의 집중 공격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암살 등 20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테러’를 제외하고, 정치적 목적을 가진 집단이 목적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조직적 폭력으로서의 ‘테러리즘’이 합리적인 정치목적 달성의 도구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이후 테러리즘은 전세계적으로 확산(70년대)된 뒤, 무차별적이고 대형화(80년대)했다. 이같은 확산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은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즘 단체들이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이들의 투쟁에 동조하는 단체들이 앞다퉈 생겨난 사실이다.
테러리즘이 정치주체들에게 ‘사용가능한 무력’ 또는 ‘저비용-고효율의 매력적인 폭력’으로 비쳐진 데는 핵무기와 전면전의 기능이 크게 줄어든 상황과도 직접 관련이 있다. 재래식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그 중요성을 다했고, 강대국들에 의한 핵무기 개발은 미묘한 위장평화, 즉 ‘공포의 균형’을 만들어냈다. 누구도 핵무기를 쓸 수 없고 누구도 전면적인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상황이 상당 기간 지속됐다.
‘비국가 행위자’가 주요 주체로
그러나 나라와 나라 사이, 또는 지역과 지역 사이에 생겨나는 정치적 갈등은 여전했다. 이 당시 서구제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난 제3세계 나라들은 공식적인 지배가 끝났음에도 식민주의는 여전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확인해야만 했다. 강대국의 지배논리 아래 약소국가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 정치적 해결이 진행될 때 이를 공식적이고 직접적인 군사력에 의해 대항할 수 없었다. 비공식적이고 간접적인 폭력에 의해 대항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제3세계 민중은 서방국가와 국내 지배계급이 쳐놓은 이중의 덫에 신음해야 했다. 테러리즘은 바로 이런 상대적 박탈감을 돌파할 수 있는 도구로 쓰인 셈이다.
그리고 70년대 이후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국가 이외의 조직이나 단체들, 이른바 ‘비국가 행위자’(non-state actors)가 테러리즘의 주요한 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비정규군, 즉 극좌·극우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을 관철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비정규 무장조직들의 등장이 그것이다. 여기에 국가가 소유한 정규군은 나날이 감소했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무기가 점점 작아지고 강력해졌다. 국가가 전쟁수단을 독점하지 못하는 현실은 “전쟁은 외교의 다른 수단”이라는 클라우제비츠류의 전쟁관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2000년 2월 말 현재 전세계적으로 무력분쟁이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70곳의 지역에서 전면전이 벌어지는 곳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한국국방연구원에 따르면 70년대에 48개국에서 테러리즘이 발생한 것에 비해 81년에는 91개 국가에서 테러리즘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60년부터 95년까지 140개국 이상이 테러리즘으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테러리즘의 안전지대는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정치군사적 조건의 변화 이외에도 현대인의 생활양식 자체가 테러리즘에 적합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도로 집중화된 현대의 도시 자체는 테러리스트가 목적달성에 필요한 공격 표적을 제공해주고, 공격한 뒤 쉽게 은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시민생활의 근간이 되는 상수도원, 도시가스 저장소, 발전소, 거대한 대형건물, 주요 공공건물 등과 같은 목표는 선택된 대상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고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다.” 최진태 한국테러리즘연구소장의 설명이다.
‘뉴 테러리즘’이 떠오른다
기술의 발달도 다양한 테러리즘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테러리스트들이 가장 많이 쓰는 폭발물은 체코산 셈텍스이다. 플라스틱 재료로 만들어져 재래식 금속탐지기로는 발견하기 어렵다. 90년 3월 체코 하벨 대통령은 “구 정권이 정권을 장악했을 당시 1천t의 셈텍스를 리비아에 팔았다”고 폭로한 바 있다. 셈텍스 200g이면 대형항공기 폭파가 가능하다고 하니 150년 정도 사용할 수 있는 규모인 셈이다.
이번 사건과 함께 최근 몇년 사이 테러리즘의 양상이 다양화하면서 ‘뉴 테러리즘’이라는 표현도 등장하고 있다. ‘사이버 테러리즘’ 역시 이런 범주로 묶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테러리즘이다. 이것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해 물리적 세계가 가상의 세계로 전환돼 있는 공간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행위를 뜻한다. 군사·핵발전소·금융·항공기·철도 등 국가 기간산업의 통제 시스템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국가 전반을 일시에 혼란에 빠트릴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21세기형 테러리즘의 전형이다. 여기에 90년 일본의 이단종교 관계자들이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퍼뜨려 일반시민들을 공격한 것을 두고도 새 형태의 테러리즘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남미 볼리비아의 테러리스트인 마리 겔라는 <도시게릴라를 위한 소책자>라는 책에서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고 사회적 혼란이 고조되는 환경 속에서 더욱 공격적이고 난폭해져야 하며, 빈틈을 주지 말고 파괴·납치 등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확대시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테러리즘의 발생원인이 되는 정치적, 사회적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테러리즘을 근원적으로 예방할 수 없다는 암시인 것이다.
정치적 불안정, 실업, 비탄, 좌절, 억압과 불신, 경제적 빈부격차에서 나오는 상대적 박탈감 등이 바로 테러리즘의 온상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테러리즘이 21세기 전쟁과 평화의 본질적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되는 이유는 세계의 모순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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