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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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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의 흔적, 너를 지운다

등록 2001-08-15 00:00 수정 2020-05-03 04:22

<font size="3" color="#a00000">일상에 뿌리내린 ‘역사의 때’ 지우려고 일제청산에 뛰어든 사람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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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잔재 청산과 친일파 처단은 한-일간 축구 경기와 비슷하다. 일본의 교과서왜곡문제 등이 터지면 한동안 잔뜩 달아오른다. 그러나 곧 잊어버린다.” 지난 10년 동안 친일파 및 친일잔재 청산에 몰입해온 민족문제연구소 한 간부는 이 땅에서 ‘친일문제’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했다.

‘친일’, 지난 세기 동안 누구나 그것을 반민족 행위라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광복 56돌을 맞은 2001년 여름, 우리는 아직도 일제청산을 외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세기가 바뀐 지금까지 불행한 과거에 집착하느냐”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일상에 뿌리내린 친일잔재와 한판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싸움은 친일은 이제는 덮어야할 옛날 일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아직 강한 힘을 발휘하는 오늘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식민사관 100년사를 폐기처분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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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0일 천안역 광장에서 만난 전재진(45)씨. 그는 순천향 의대 임상병리사다. 그러나 천안에서는 일제잔재에 맞서는 투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전씨는 이날도 기자에게 지난해 천안시와 천안시문화원 주도로 간행된 <천안백년사> 내용을 들먹이며 열을 올렸다. 천안시가 2500여만원을 들여 한말부터 현대까지 천안에서 일어난 100대 역사를 정리한 책인 <천안백년사>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 들어 있기에 그가 그렇게 흥분하는 것일까.

그가 보여준 <천안백년사>에는 청일전쟁이 ‘일본에 대륙진출의 기반을 구축시켜준 전쟁’으로 적혀 있었고, 일제 침략은 ‘일본의 한반도 진출’로 기록돼 있었다. 척왜를 내세운 동학혁명은 ‘난’으로 격하됐고, ‘동학군의 폭거 자행… 탈취’, ‘… 정예를 자랑하는 일본군이… 동학… 반란… 토벌… 궤멸’ 등이 쓰여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강탈·분배한 돈은 ‘은사보조금’으로 칭송됐고, 조선인 강제징용자는 ‘조선인 인부(머슴)’, 그리고 일제의 토지수탈은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 사업의 성공으로 방대한 땅을 얻어 식민의 기반을 확립하였다’고 쓰여 있었다. “일제의 만행에 대한 왜곡은 일본인만 저지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천안시민의 혈세로 만들었다는 <천안백년사>가 항일운동의 본거지 천안을 모독하고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전씨는 즉각 천안민주단체협의회(의장 김지철) 등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천안시를 상대로 수정을 요구하는 한편 항의시위를 벌였다. 또 <천안백년사>를 집필한 민병달 천안문화원장, 이정우 천안문화원사무국장, 이창주 천안신문사 편집국장, 홍윤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황서규 전 동성중학교 교사 등 5명을 상대로 시민단체 등과 함께 공개토론회를 열자고 요구했다. 더욱이 문제의 <천안백년사>가 1997년 11월30일 민병달 현 문화원장이 집필한 <천안시지>를 거의 그대로 재탕한 것이 국사편찬위원인 백승명(35) 직산·위례문화연구소장에 의해 밝혀지면서, 사태는 <천안백년사> 내용 수정을 넘어 문화원장 등 문화원 인사들의 식민사관 논란 및 퇴진운동으로까지 확대됐다.

결국 천안시도 물러섰다. 애초 “일부 잘못 표기된 부분에 대해 정오표를 만들겠다”고 버티던 천안시는 배포된 <천안백년사>를 수거해 폐기처분한 것이다. 그러나 전씨와 백 소장에게는 부분적인 승리일 뿐이었다. 우선 전체 발행 책자 500권 가운데 회수·폐기된 것은 242권에 그쳤다. 또 중요한 것은 책임자 문책이기 때문이다. 집필에 참여했던 민병달 원장은 “동학 관련 연구자료를 직접 옮기다보니 몇 군데 실수가 있었고 옛 습관에 따라 혁명을 ‘난’으로 표현하는 잘못도 있었다는 점을 겸허하게 사과한다”면서 “그러나 친일식민사관이라는 비판은 동의할 수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전씨를 비롯한 천안의 시민단체의 태도는 완강하다. “천안시민은 혈세로 자기를 비하하고 일제를 미화·대변하는 책이 만들어지는 것도 모른 채 살았다. 그러나 이제 안 된다. 친일잔재와 식민사관을 뿌리뽑기 위해서라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전재진씨와 백승명 소장은 요즘도 천안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함께 천안역 광장과 시청, 문화원을 오가며 끈질긴 항의시위를 거듭하고 있다. 이들의 요구는 명확하다. 예산 및 회계장부 공개와 필진에게 지급된 집필료 환수, 민병달 문화원장의 퇴진이다.

친일 수탈기관을 역사자료로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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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진 안양지역시민연대공동대표는 일제시대 면사무소 복원문제로 지역유지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674-271번지에 자리한 136평짜리 전통한옥. 이 건물은 얼마 전까지 설렁탕집이었다. 하지만 이씨에게 이곳은 단순한 설렁탕집이 아니다. 조상의 항일대업을 이어가는 치열한 전투장이다. 이씨의 할아버지는 상하이에서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했던 이용환씨, 부친은 광복군을 창설했던 이재현씨다. 큰아버지 이재천씨는 1935년부터 5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기록만 남아 있을 뿐 그 주검조차 찾지 못했다.

그런 이씨가 이른바 ‘설렁탕집 싸움’에 뛰어든 것은 지난 99년 11월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안양지역 몇몇 유지들은 1917년부터 32년 동안 서이면사무소로 사용됐던 이 설렁탕집을 귀한 역사자료라며 서이면사무소 복원작업을 추진했다. 안양시도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는 2000년 3월 복원을 위한 부지 및 건물 매입 예산 24억원을 배정했고, 그해 9월 매입했다. 지난해 12월 말 수원소재 한 건축회사에 의뢰해 복원공사 기본계획까지 확정했다.

그러나 이런 시의 계획은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인 이형진씨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조선총독부 하부기관인 서이면사무소는 이 지역 수탈기관이었다. 그런데 고택 문화재라며 복원하는 것은 역사를 되돌리는 행위다.” 그는 특히 면사무소 복원을 제안한 10명의 유지 가운데 김형욱, 안현선, 심완섭씨 등이 일제 때 이곳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서이면사무소에 근무했다면 사실상 친일인사나 다름없다. 그런 사람들이 지역유지라며 복원을 추진하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려는 음모다.”

최근 상당수 시의원들이 일단 이형진씨의 손을 들어줬다. 안양시가 올린 복원예산 5억2천만원을 부결시킨 것이다. 이씨는 지역사회의 논란을 의식해 나름의 절충안을 내놓았다. “고건물의 가치를 고려해 서이면사무소로 복원하되, 지역에 대한 일제의 수탈 행위, 징용 및 정신대 관련 자료를 함께 전시하는 일제수탈관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신중대 안양시장은 일단 이 제안에 동의했다. 복원을 추진했던 유지들은 아직 이씨의 타협안에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다. 여론을 등에 업은 이씨가 부분적 승리를 거둔 셈이다. 그러나 이씨는 “일본 교과서왜곡 등 국민 감정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지만 언제 다시 역사를 되돌릴지 모른다”며 경계의 눈빛을 감추지 않고 있다. 먼저 신 시장이 약속은 했지만 아직 문서로 확정된 것은 없다. “좀 좋게 봐줄 수 없냐거나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냐, 현재와 미래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는 이 싸움이 앞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 속에 최근 향토사학자·시민운동가 몇몇과 ‘안양민족정기 바로세우기 모임’을 결성했다.

친일파 삭제한 향토사연구가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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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근현대사연구회 연구원 김경현(37)씨. 경남지역 향토사 연구에 몰입하고 있는 그는 최근까지 깊은 자괴감에 시달렸다. 지난해 12월 자신이 쓴 경남 진양군 명석면사 때문이다.

사정은 이렇다. 명석면사가 기획된 것은 지난 98년 말 당시 손태기 진주시 의원의 제안으로 기획됐고, 99년 초 마을 이장회의, 면 경로잔치 등을 통해 제작이 최종 결정됐다. 그리고 그해 5월 편찬위원회가 구성되고 김씨에게 면사 집필이 맡겨졌다. 그는 ‘있었던 일을 그대로 쓴다’는 소박한 마음을 갖고 의욕적으로 덤볐다. 광범한 자료수집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직접취재 등을 거쳐 99년 12월 드디어 초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 초고는 김씨의 삶을 뒤흔들었다. 가와모토 마사오였던 하판락씨의 친일 관련 기록 때문이었다. 그는 일제 때 경남 경찰부직원록 등 각종 사료를 토대로 이렇게 적었다. “일제 광란기의 가장 대표적 친일파는 관지리 출신의 일제 고등경찰 하판락이었다. 하판락은 관지리에서 태어나 진주고보를 졸업한 뒤 일제 경찰에 투신해 조선인으로서 경찰 간부직이던 경부보(지금의 경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애국지사들 사이에는 ‘고문왕’으로 악명을 떨쳤던 악질 친일파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반민특위에 체포된 하판락의 반민족 죄상’ 등 그 근거 자료들을 제시했다.

하씨 문중이 발끈한 것이다. 하씨 문중은 12월 어느날 하씨 집성촌인 명석면 관지리 마을회관으로 김씨를 불렀다. “당시 회관에는 50여명의 하씨 문중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썼냐. 근거를 대라.’ ‘하판락은 단지 경찰이었다. 고등계 형사가 아니다.’ 험악한 분위기였다.” 당시 김씨는 글의 근거를 대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하씨 문중은 “면사는 면의 단합을 위해 쓰는 것인데 오히려 분란을 일으켰다”며 무조건 삭제를 요구했다. “그때 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나중에는 자신이 전남 광주 출신인 점이 여론의 집중 공격거리가 됐다. “당시 ‘광주놈이라 경상도를 저렇게 쓴다’, ‘외지인 주제에 지역사정을 뭘 안다고 그렇게 막 쓰냐’는 등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고민했다. 그러던 중 몇몇 편찬위원들이 “면단위에서 근현대사와 좌우의 문제를 담았다는 것만도 귀감이 된다”면서 설득했고, 그는 결국 하판락 부분을 삭제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지막 양심을 편찬후기 형식으로 끼워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명성면 출신자 중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위의 결의로 삭제했다.” 하씨 문중은 뒤늦게 ‘죽일 놈 살릴 놈’했지만 책은 인쇄가 끝난 뒤였다.

하씨 문중의 중심인물로 면사편찬 추진위원이었던 하중락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면사에 인물을 넣지 말자고 했는데 유독 하판락을 친일파로 돋보이게 하려고 했다. 일제시대 때 부득이하게 친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는데 이것도 무시했다. 그래서 집안 어른 몇몇이 나섰는데, 그런 느낌(강압)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이상 역사를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김씨는 이후 한동안 자괴감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그러나 최근 다시 하씨 문중과 싸움을 시작했다. 하판락씨에게 10개월간 모진 고문을 받았다는 독립운동가 이광우씨의 아들 상국씨가 올 초 그의 양심에 비수를 꽂았기 때문이다. 상국씨는 김씨에게 “하판락 같은 악질 친일파를 빼놓고 어떻게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냐”는 등 모두 10개항의 질의서를 보내 김씨의 양심에 불을 지핀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가 역사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이미 사라지고 없는 화석화된 역사, 추상화된 개념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명석면사 집필과정을 겪으면서 그것이 현재진행형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이 일을 겪은 뒤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서부경남지역 친일파인명사전 편찬위원으로 위촉돼 이 지역의 친일인사 및 그 기록을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하판락 삭제건에 대한 자괴감은 아직도 지울 수 없다”며 “반드시 역사에 바로 기록되도록 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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