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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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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제2의 강남이다

정경유착·재벌 특혜 등으로 점철된 제주 관광개발의 역사… ‘부당내부거래’로 거둔 이익, 지역사회에 전혀 환원 안해
등록 2011-10-19 16:09 수정 2020-05-03 04:26
» 나라가 민간 땅을 빼앗아 공유지를 만들고 이를 다시 민간에 파는 전례가 1950년대에도 있었다. 1957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제주 송당목장 설치 지역 오름을 방문한 모습. 제주도청 제공

» 나라가 민간 땅을 빼앗아 공유지를 만들고 이를 다시 민간에 파는 전례가 1950년대에도 있었다. 1957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제주 송당목장 설치 지역 오름을 방문한 모습. 제주도청 제공

» 196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주 휴가 모습. 정부기록사진집

» 196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주 휴가 모습. 정부기록사진집

제주는 제2의 강남이다. 강남처럼, 제주 관광개발의 역사는 한국 자본주의 역사의 단면이다. 1960~80년대 개발독재 시절의 정경유착, 재벌에 특혜주기, 불평등 따위가 다 그 단면에서 보인다.

인천공항·중문단지 매각처럼 알짜배기 공유재산을 국가가 사기업에 넘기는 일은 놀랍도록 반복돼왔다.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은 한라산 중산간에 송당목장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전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한미재단고문이 설득했다. 농림부는 1957년 개발계획을 발표하고 990만㎡(300만 평) 규모의 송당목장을 제주목장으로 한다고 밝혔다. 도민환영대회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우리 국민도 이제는 쇠고기를 먹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송당목장 일대는 예전부터 마을 공동 목장으로 사용된 곳이었다. 공유지는 작았고 대부분 개인 소유지였다. 정부와 제주도는 국가 정책사업, 지역발전을 명분으로 소유주들에게 땅을 국가에 무상 임대해줄 것을 요구했다. 1957년 양 148마리와 소 200마리가 목장에 들어왔다. 5·16 쿠데타가 벌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영업실적을 이유로 목장의 민간 불하를 지시했다. 나라가 사실상 빼앗은 땅을 다시 민간에 되판 셈이다. 제주 주민 안정립이 재일동포의 자금 지원을 받아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재일동포가 자금 지원 약속을 저버렸다. 결국 목장 운영권은 삼호그룹에 넘어갔다.

권력이 자본에 특혜를 준 사건들

‘남원 방갈로 사건’은 관광개발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제주 행정 당국과 재벌의 정경유착에 해당한다. 남제주군 남원리 2385번지 일대 바닷가에 호화 방갈로 74동이 지어졌다. 아름다운 서귀포 바다 가운데서도 절경이었다. 해안가는 전용이 불가능한 절대농지였다. 지역 언론이 1979년 3월 이를 보도했다. 제주도가 발칵 뒤집혔다. 제주지검이 건축허가 경위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외지인인 건축주 76명이 절대농지에 건축허가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방갈로의 실제 건축주는 서울에 거주하는 정준태 전 피부비뇨기과 의사로 밝혀졌다. 서귀포의 옛 프린스호텔 대표이기도 했던 그는 아들 명의로 토지를 사서 친지 등 10여 명의 명의로 분할 위장 등기해 취득·등록세도 포탈했다. 건축허가는 남원면장 명의로 발부됐다. 1976~78년 재임한 치안본부장 출신 장일훈 전 제주도지사가 연루됐다는 의혹이 나왔다. 그는 언론 보도가 나올 때 제주도지사를 마치고 산림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박정희 유신독재 말기였다. 야당인 신민당이 남원 방갈로 사건을 대표적 정치부패 사건으로 지목했다. 신민당은 8월 성명을 발표했다. “제주도가 돈 있는 사람들의 손에서 멋대로 주물러져서는 결코 안 되며 신민당은 제주도민의 여론에 따라 남원 방갈로에 대한 시원한 결말을 위해 현지조사반을 파견할 방침이다.” 검찰은 정준태씨 등을 기소하고 관련 공무원을 여럿 구속 기소했다. 불법 방갈로는 모두 폭파됐다.

지금 서귀포 시민들은 개신교계 기업 이랜드를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소망교회 장로 출신 대통령이 사랑의 교회 전 장로 출신 이랜드 회장에게 특혜를 주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1982년에 터진 ‘대지 사건’은 권력이 자본에 특혜를 주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준다. 이정식은 5공의 실력자였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의장인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부의장이면서 도시계획 용역업체인 대지종합기술공사 대표였다. 전국의 도시계획 용역을 도맡았다. 그는 서귀포 신시가지 조성 용역 업무를 맡았다. 이정식은 1981년 7월 서귀포시와 도시기본계획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그 뒤 그는 신시가지 후보지인 서호동 ‘신머들’ 일대 땅을 아들 이름으로 사들였다. 자신이 용역을 맡은 지역의 땅을 스스로 투기 목적으로 산 것이다. 이정식은 서귀포 시내 여인숙에 아들을 위장전입시켜 땅을 샀다가 매입이 끝나면 서울로 다시 전입신고했다.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5공의 모토가 무색했다. 이런 사실은 1984년 7월 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전국이 들끓었다. 이정식은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부의장을 사퇴하는 기자회견에서도 안하무인이었다. “나는 투기꾼이 아니라 노후와 자녀를 위해 땅을 산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정식은 구속 기소된 뒤 1984년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정식은 1987년 형기를 채우고 석방됐지만 ‘부당 내부거래’로 매입한 땅 이익을 전혀 제주 지역에 환원하지 않았다.



외지 대자본이 토지 등 제주도의 공공재를 매입해 큰돈을 벌고 이익은 지역에 환원하지 않는다. 제주시 탑동 매립은 1988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5공의 대표적 정경유착 사업으로 지적받았다. ‘특혜’와 ‘불법’이 모두 벌어졌다. 박희택 당시 범양건영 회장은 개발이익을 “한 푼도 제주 지역에 줄 수 없다”고 밝혔다.

탑동 매립, 5공의 대표적 정경유착

외지 대자본이 토지 등 제주도의 공공재를 매입해 큰돈을 벌고 이익은 지역에 환원하지 않는다. 중문단지 매각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다. 그들의 우려를 막무가내로 몰기 어렵다. 과거에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제주시 탑동 매립은 1988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5공의 대표적 정경유착 사업으로 지적받았다. ‘특혜’와 ‘불법’이 모두 벌어졌다. 먼저 석연찮은 이유로 시행사의 이익을 제한하고 공공성을 강화한 공유수면매립법 신법이 공포되기 일주일 전인 1986년 12월24일 매립 면허가 나왔다. 신법은 민간이 매립할 경우 총 공사비의 10%로 개발이익을 제한했다. 구법에는 제한 조항이 전무했다. 매립 면허는 범양건영(당시 대표 박희택)과 제주해양개발(당시 대표 백형수)에 주어졌다. 범양건영의 개발이익이 500억원에 달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면허를 받는 과정에서 해녀들의 모임인 ‘잠수회’의 동의가 조작됐다는 의혹이 나왔다. 장병구 전 제주도지사는 당시 건설부 장관이던 이규효(현 동아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씨가 압력을 가했다고 국정감사에서 증언했다. 이규효씨는 1986년 ‘평화의 댐’을 만들자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두 차례의 국정감사와 장 전 지사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박희택 당시 범양건영 회장은 개발이익을 “한 푼도 제주 지역에 줄 수 없다”고 밝혔다. 박희택 당시 회장은 1989년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개발이익 환수 주장을 일축했다. “(개발이익 제주 일부 환원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제주에서 번 돈은 제주에서만 쓰고 강원도에서 번돈은 강원도에서만 쓰라는 법이 있는가.” 제주도민의 항의운동 끝에 범양건영은 1990년 제주 시내 하천 복개와 장학금 20억원 기탁에 합의했다. 범양건영은 21년이 지난 2011년 현재 개발이익 환수 사업을 완료하지 못했고 여전히 진행하고 있다.

제주=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참고 문헌 (김종배 지음·제주도지방의정연구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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